1. 개요
남아 있는 디자인에 따라 복원된 목걸이[1] |
2. 상세
사건의 발단은 1772년 프랑스 왕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국왕 루이 15세는 자신의 애첩인 뒤바리 부인을 위해 왕실 보석상 뵈머에게 유럽에서 가장 훌륭한 다이아몬드들을 모아서 목걸이를 만들어 오라고 명했다. 뵈머는 신바람이 나서 무려 값비싼 다이아몬드 600개로 목걸이를 만들었는데 루이 15세가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줄 사람이 없어져 버렸다. 뵈머는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한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이 목걸이를 사 달라고 간청했지만 프랑스의 재정 상태를 알고 있던 앙투아네트는 이 목걸이가 너무 비싸다며 거절했다. 일설에는 앙투아네트가 거절하면서 '차라리 그 돈으로 해군의 군함을 1척 사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목걸이의 디자인도 앙투아네트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스카프 같다고 평했다는 말도 있다. 사실, 현재 기준으로나 그때 기준으로나 디자인이 영 거시기하다. 인형 착용샷을 봐도 확실히 볼품없다. 거기다 당시 프랑스의 패셔니스타로 알려질 정도로 패션 센스가 매우 뛰어난 마리 앙투아네트가[2]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든다고 안 샀다고 하니, 당시 기준으로 보아도 예쁘지 않은 사치품과 다를 것이 없다.[3]한편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추기경은 앙투아네트의 신뢰를 얻고자 동분서주했으나 앙투아네트는 이 타락한 추기경을 싫어했다. 이유인즉슨 앙투아네트가 결혼 전 아직 고향 오스트리아에 있을 때 로앙이 프랑스 대사로 와 있으면서 온갖 스캔들과 사치스런 생활을 일삼았고 이후 앙투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를 험담하고 다녀서 여제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는 막 동맹의 역전이 일어난 직후여서, 프랑스 정계에선 "우리 프랑스 조상 대대의 원수인 신성로마제국의 여자황제가 귀얇은 우리 왕의 애첩을 구워삶아 여자들간의 동맹을 맺으려 한다."라는 인식이 강했고, 로앙은 이를 저지하자는 쪽 파벌이었으니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결국 결혼동맹은 맺어졌고 프랑스에 시집 온 공주 앙투아네트는 이제 왕비가 되어, 로앙 추기경 좀 치워달라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로앙을 프랑스로 소환시켜 버렸다. 이제 로앙의 입장에선 앙투아네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면 출세길이 막힐 위기였다.
이런 정황들을 알고 접근한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잔 드 발루아 라 모트 백작부인이었다. 백작과 결혼한 게 아니라 발루아 왕조의 방계 후손이라고 칭했기 때문에 정확히 표현하면 '여백작'이 맞다. 그런데 라모트의 남편은 평민이었음에도 '아내가 백작 부인이니까 나는 백작'이라면서 자신을 백작으로 칭했다. 부르봉 이전의 프랑스 왕조인 발루아 왕조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이 여자는[4] 로앙 추기경에게 접근해서 자신이 앙투아네트의 신임을 받는다고 속이는 데 성공했다. 잔은 로앙 추기경에게 앙투아네트가 루이 15세가 주문한 그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고 싶어하지만 너무 비싼 목걸이라 사람들 눈이 두려우니, 로앙 추기경이 왕비 대신 목걸이를 사서 전해달라는 내용의, 왕비의 필체 위조된 편지를 전해주고는, 이 일을 해주면 왕비의 환심을 얻을 것이라고 꾀어내었다.
그후 잔은 다른 공범들과 함께 앙투아네트의 필적을 따라하여 편지를 여러 통 위조해 로앙에게 보내서 앙투아네트가 로앙에게 마음을 연 것처럼 속였다. 그리고 왕비와 닮은 한 매춘부, 니콜 르 과이를 찾아내 그녀를 왕비라 속여 야밤에 로앙 추기경과 베르사유 궁의 숲에서 만나게 해줬다. 로앙은 어두운 밤이라 상대방의 얼굴을 제대로 못 봤음에도 앙투아네트가 완벽하게 자신을 총애하게 되었다고 착각하였다.
결국 로앙 추기경은 보석상 뵈머에게 가서 왕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오랬다면서, 2백만 리브르를 할부로 지급하기로 약속하고는 그 목걸이를 받아서 앙투아네트에게 전해 달라며 잔에게 넘겨주었다. 하지만 잔은 남편을 런던으로 보내 이 다이아몬드를 분해하여 매각해 버렸다. 남편은 런던에 머물렀으나 잔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파리에 그대로 남아서 정부들을 사귀며 사치스런 생활을 즐겼다.
하지만 목걸이 할부금을 지불해야 할 날자가 되자 문제가 생겼는데, 잔은 로앙 추기경의 수표를 제시했지만 보석상 뵈머는 현금을 요구했던 것. 결국 목걸이를 사 간 사람이 왕비라고 알고 있었던 보석상 뵈머는 왕비에게 찾아가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전혀 그런 사실이 없던 앙투아네트는 분개하며 의회에서 이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게 했다. 결국 로앙 추기경을 필두로 관련자들이 줄줄히 잡혀들어가 조사를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잡혀들어간 사람 중에 칼리오스트로가 있었다는 것.[5]
로앙은 고등법원에서 재판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저 속았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로앙은 추기경이었기 때문에 고등법원이 아닌 교황청에서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교황의 항의가 나오며 정치적으로 미묘해졌다. 결국 그는 무죄로 풀려났고 지방 수도원으로 좌천되었다. 의외로 그는 이미지에 큰 타격을 받지 않았는데, 사람들이 진실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편지가 위조된 것이 아니라, 왕비가 정말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오라고 로앙 추기경에게 명령한 후, 목걸이를 받자 뒤통수를 친 것이라 생각했고, 로앙은 앙투아네트의 그저 왕비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다 버림받았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어느정도냐 하면, 로앙은 1789년 프랑스 혁명의 도화선이 된 바로 그 삼부회에 성직자 대표로 선출되었을 정도다. 물론 왕비로부터 사기를 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로앙은 이를 거부하다 혁명이 일어나자 독일로 망명을 가서 그곳에서 죽었다.
왕비로 위장한 르 과이와 칼리오스트로 역시 무죄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왕비의 필적을 위조한 르토 드 빌레트는 해외로 추방당했고 평생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진범이라 할 수 있는 잔은 사기 혐의로 체포되어 어께에 낙인이 찍히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감옥에 갇혔지만, 이듬해 반왕비파의 도움을 받아 남장하고 탈옥하여 영국으로 도망쳤다. 이후 그녀는 "잔 발루아의 회고록"이라는 책을 내서 자신은 앙투아네트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책은 날개 돋친 듯 팔려서 잔은 짭짤한 수입을 거두었다. 더구나 목걸이 사건과는 별도로 앙투아네트가 매우 사치스럽고 방탕하며 남자 애인은 물론이고 여자 애인까지 여러 명 거느리는 등 성적으로 문란하다는 악담을 퍼뜨렸다. 그러나 그녀는 이후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탕진하고는 런던의 호텔에서 빚쟁이들을 피하려다가 창문에서 떨어져 추락사했다. 그의 남편은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로 돌아와 살았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최대 피해자는 결국 앙투아네트라고 할 수 있다. 안그래도 프랑스의 전통적인 라이벌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이미지가 나빴던 왕비는, 잔의 회고록으로 인해 왕비를 창녀로 묘사하는 포르노 찌라시가 인쇄되어 파리의 하층민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며 권위가 완전히 추락했다. 나중에 프랑스 혁명 당시, 혁명정부는 앙투아네트를 심문하면서 잔과의 관계 및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에 대해서 심문했다. 앙투아네트는 당연하게도 결백을 주장했지만 민중은 여전히 그녀를 믿지 않았다.
3. 그 외
사건 전개에 대해 다른 이설도 있는데, 백작부인이 보석상으로부터 왕비에게 목걸이를 팔아주겠다고 받아 가로챈 뒤, 보석상이 목걸이의 외상값을 왕실에 청구하면서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는 것이다. 이후 루이 16세는 조용히 덮을 수도 있었던 사건을 보복심에 고등법원을 끌여들이며 세간의 화제로 키운데다 (자신이 왕비와 밀회를 했다고 믿은) 로앙이 무죄판결을 받으면서 졸지에 왕실, 특히 왕비의 지조에 대한 평판이 땅에 떨어지면서 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었다는 것이다.[출처]무죄의 배경에는 왕의 아우들인 아르투아 백작, 프로방스 백작과 왕의 사촌인 오를레앙 공 등이 왕의 퇴위와 왕위를 탐하며 고등법원이 루이를 무능력자로 만들도록 획책했다고도 한다. 졸지에 프랑스 사회에 왕비를 유혹하려는 시도는 죄가 안 된다는 인식을 심어 준 데다 스트라부스 조폐국에선 루이 금화를 주조하며 당시 오쟁이를 진 남편의 상징으로 초상화에 뿔을 달아 놓는 등 왕실 권위의 추락은 겉잡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출처]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며 원흉인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조연인 로잘리의 이복 언니 잔느로 각색되어 나온다. 물론 사건의 결말은 작가의 오리지널로 끝났지만 실제 역사처럼 이 사건을 기점으로 갈수록 추락하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 왕실의 평판은 더이상 손쓸 도리가 없이 완전히 나락으로 치닫고 끝내 프랑스 혁명의 토대가 되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도 자신의 여론이 안 좋다는 걸 깨닫는 중요한 에피소드로 다뤄진다.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도 이 사건이 모티브로 보이는 에피소드가 있다. 루이 13세의 왕비가 버킹엄 공작에게 12개의 다이아몬드가 달려 있는 브로치를 주는데 리슐리외와 붙은 밀라디가 음모를 꾸며 브로치의 다이아몬드 2개를 자르고 왕이 왕비에게 브로치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도록 한다. 이거 때문에 삼총사와 달타냥은 서둘러서 런던으로 달려가 공작에게 브로치를 받고 모자란 다이아몬드도 급하게 다시 만들어 달아서 수습한다는 이야기다.
제5인격의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티브로 만든 캐릭터 블러디 퀸의 스토리에서도 이 사건에서 따 온 이야기가 언급된다. 작중에서는 다이아몬드가 아닌 루비 목걸이로 나온다.
또, 영화 속 마리 앙투아네트를 맡은 여배우 조엘리 리처드슨[8]은 정말 초상화 속 마리 앙투아네트가 현실로 나타난 수준으로 높은 싱크로율과 품위있는 모습으로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
모리스 르블랑의 대표작인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도 주요 소재 중 하나로 언급되었다. 초기작 < 여왕의 목걸이>의 소재로, 아르센 뤼팽(당시 이름은 라울 당드레지)이 6살 때 생애 첫 도둑질을 했던 물건이라고.
대체역사소설 < 프랑스 왕가의 천재가 되었다>에서는 주인공인 루이 크리스티앙의 개입으로 루이 15세가 천연두로 사망하지 않아 목걸이가 원래대로 뒤바리 부인에게 갈 예정이었는데 오를레앙 공이 주인공을 견제하기 위해 목걸이 주문에 한숟가락 걸쳐서 사기 사건을 일으키려 했으나 주인공이 영국과의 전쟁 준비 및 목걸이의 디자인을 이유로 주문을 미루는 게 좋다고 설득해서 목걸이 주문이 취소되고, 오를레앙 공의 보석상을 통한 뒤바리 부인과의 접촉 시도도 뒤바리가 오를레앙 공의 초대를 거절하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오를레앙 공은 라모트 백작부인을 통해 뵈머와 로앙을 이용해 원 역사와 비슷하게 사기 사건을 일으켜 마리 앙투아네트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고 했으나 주인공이 수를 써서 라모트에게 줄 예정이었던 목걸이를 가짜로 바꿔치고 도주한 라모트는 영국에 도착하자마자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가뜩이나 크리스티앙 암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해 주범으로 지목받던 오를레앙 공은 궁지에 몰렸다.
마리 앙투아네트(뮤지컬)에서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몰락을 부른다. 오를레앙 공작 등이 마그리드 아르노를 마리의 모습으로 분장히킨 후 대역으로 세워 목걸이 사건을 일으킨다.
[1]
크로뮴과
크리스탈 큐빅으로 복원했다.
[2]
실제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시는 당연하고, 지금봐도 세련되고 아름다운 로코코 패션과 예술의 아이콘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기본적으로 마리의 패션은 화려함보다는 우아하고 은은한 스타일이다.
[3]
영화 '어페어 오브 더 넥클리스' 에서는 아예 정색까지 하며 구매를 거절하기까지 했다.
[4]
라 모트 백작부인은 비록 서출이기는 해도 일단 후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백작 작위는 사칭.
[5]
잡혀들어간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단 그가 로앙 추기경의 손님으로 파리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로앙 추기경이 성직자라는 직업에 걸맞지 않게 화려하고 난잡한 삶을 즐겼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그렇고그런(...)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노명식 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출처]
노명식 저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8]
101 달마시안 실사판의 히로인 아니타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