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 대전의 일본군 군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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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원
배수량 | 19,372톤 |
전장 | 146.9m |
전폭 | 25.5m |
흘수 | 8.4m |
기관 | 17,300마력 |
속력 | 18노트(33km/h) |
항속거리 | 10노트로 9,100해리 |
승무원 | 800~940명 |
무장 | EOC 12인치(305mm) 2연장포 2문 , 빅커스 10인치 2연장포 6문 |
장갑 |
현측 장갑벨트 4~9인치(102~229mm) 갑판 2~3인치(51~76mm) 포탑 7~9인치(178~229mm) 함교 6인치(152mm) |
1. 개요
세미 드레드노트급 전함으로써 1910년 일본군 해군을 위해 건조되었으며, 사쓰마, 아키 총 2척이 건조되었다. 명칭은 사쓰마의 경우 일본 해군의 근간이 된 사쓰마국(사쓰마노쿠니, 薩摩, 살마국)에서 유래했고[1] 아키는 오늘날 히로시마 현 서부를 부르던 아키국(아키노쿠니, 安芸, 안예국)에서 유래했다. 준노급으로는 초기함이었고 일본에서 건조된 최초의 전함이다.2. 상세
1904년에 사쓰마의 설계에 들어갔을때 단일거포주의가 장래의 전함 무장의 주류가 될 것이라고 예상한 일부 사람들에 의하여 12인치포 8문을 연장 포탑 4기에 선체 중심선에 배치하는 혁신적인 개념안이 제출되었었다. 만약 이 설계 개념안대로 기공이 되었다면 일본 해군은 미국과 거의 동일한 시기에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보유할 수 있었을 것이고, 최고 6척 정도의 12인치포 드레드노트형 전함을 국산으로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도 포탑을 중심선에만 몰아넣고 적층식으로 배열한 선구자로서.초기 개념안대로 사쓰마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는 시안 그림을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배부-적층식 주포탑 배치야 당시 일본의 기술적 한계로 인해 이루어 질 수 없었다지만[2], 주포탑의 바벳을 지나치게 가까이 배치하는 바람에 2번과 3번 주포탑의 주포들이 전후방으로 고각 배치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경우 해당 포탑에 의한 전후방 직접 조준 사격이 불가능한 것은 물론 전후방 측각 사격에도 상당한 곤란이 예상되었다. 게다가, 15cm 연장 부포탑을 주포 바벳 앞에 배치하였는데 주/부포간 사격 교란 가능성은 물론 이로 인해 해당 부포탑이 없었을 경우 약간 모험을 한다면 배부식 주포 배치가 가능해질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부포탑의 전후방 중심선 배치라는 발상은 좋았지만 탁상공론에 가까웠다. 그러나 일본은 부포탑을 중심선에 배치한다는 개념 자체는 잊지 않았고, 결국 수십년 뒤 야마토급 전함에 써먹게 된다.
따라서, 최초 시안대로 성립되었을 경우 일본 최초의 드레드노트형 전함이라는 타이틀을 쥐었을 사쓰마는 주포와 중간포가 혼재된 어정쩡한 전함으로 머무르고 말았다. 1번함 사쓰마 2번함 아키
비록 1914년 태평양에 있는 여러개의 독일 식민지를 점령한 소함대를 이끌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22년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에 따라 1922년에서 1924년동안 무장을 해제하고 사쓰마는 나가토와 무츠, 아키는 공고와 이세의 표적함으로써 가라앉았다.
[1]
메이지 유신의 주역인 3개 번이 정관군의 주축이 되었는데
조슈는 기병대를 중심으로 한 육군을,
사쓰마는 사이고 츠구미치를 중심으로 하여 해군을 만드는데 이바지하였다.
[2]
적층식 포탑 배치가 어려운 이유는 간단하다. 바벳을 올려서 뒤쪽 포탑을 앞쪽 포탑보다 높여야 하는데, 바벳을 올리면 포탄을 올리는 송탄 장치 등의 설계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의
테게토프급 전함이 이걸로 죽을 쒔고, 러시아는 바벳 올리기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함체에 골고루 포탑을 배분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 문제는 소련의
소비에츠키 소유즈급 전함에 가서나 없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