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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토(전함)

전함 나가토에서 넘어옴
88함대 계획
전함 戦艦
나가토급 長門型 카가급 加賀型
나가토 長門 무츠 陸奥 카가 加賀 토사 土佐
키이급 紀伊型
키이 紀伊 오와리 尾張 스루가 駿河 오미 近江
순양전함 巡洋戦艦
아마기급 天城型
아마기 天城 아카기 赤城 타카오 高雄 아타고 愛宕'
13호급 十三号型
함명 미정
밑줄: 항공모함으로 개장, 기울임: 건조/개장 도중 해체, 취소선: 계획단계에서 취소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822a31c62465226e612b5ebeb5f98acf.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800px-Japanese_Battleship_Nagato_1944.jpg
1944년 10월,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급 전함
나가토 무츠

1. 개요2. 운용 기록
2.1. 전쟁 전2.2. 전쟁 중2.3. 전쟁 후
3. 미디어 매체4. 잡다한 이야기5. 관련 문서
長門と陸奥は日本の誇り(나가토와 무츠는 일본의 자랑)[발음]

1. 개요

나가토급 전함의 네임쉽이자, 일본군 연합함대의 초대 기함. 제원 등은 해당 함급의 내용 참조.

2. 운용 기록

2.1. 전쟁 전

세계 최초로 16인치 주포를 탑재한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자 일본 해군 최강의 전함이었으므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이러한 인기는 전쟁 중에도 이어졌는데, 야마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 나가토와 무츠를 부각시킨 일본군의 방침이 큰 영향을 끼쳤다.

나가토의 속도는 대외적으로 23노트로 알려져 있었지만, 관동 대지진 당시에 이재민의 구호를 위해 출동했다가 동행했던 영국군 순양함에 의해 실제 속도가 26노트임이 발각되었다. 이재민을 한시라도 빨리 구하기 위해 군사기밀 폭로도 감수하고 최대 속도를 냈다고.[2]

2.2. 전쟁 중

1941년 12월 2일, 연합함대 기함 나가토는 "니이타카 산에 올라라 1208"이라는 코드를 나구모 함대에 보냈다. 이후 나구모 함대가 그 유명한 진주만 공습을 결행함으로써, 일본은 전쟁에 돌입한다.

1942년 2월 12일, 나가토는 야마토급 전함 야마토에게 기함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1942년 6월에 일어난 미드웨이 해전에서는 일단 출격은 했으나, 나구모 함대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실제로 한 일은 없었고, 카가의 생존자를 인수받아 일본에 귀국시킨 게 전부였다. 이후에는 야마토, 후소와 함께 트럭섬으로 진출했지만, 과달카날 전투에서 한 일은 없다. 나가토의 자매함인 무츠가 제2함대의 일원으로 동부 솔로몬 해전에 참전하기는 했는데 너무 느려서 순양함들을 쫓아가지 못하고 낙오되었다. 이후 구축함 3척의 호위를 받으며 트럭으로 돌아간 게 활약상의 전부다.

1943년 8월, 나가토는 전함 야마토, 전함 후소와 함께 구레를 출항하여 항공모함 타이요, 중순양함 2척, 구축함 5척과 합류, 트럭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구레에서 출항한 후 그날 밤에 타이요를 비롯한 호위함대와 만날 때까지, 야마토/후소/나가토를 호위한 것은 하츠카제 한 척 뿐이었다고. 물론 구레는 일본 본토이기 때문에 하루도 다 가기전에 이 전함들이 이동할 거리라 해봤자 얼마 안된다. 현대로 치면 거의 영해 수준. 이후 10월에는 웨이크 섬 근방에 있는 미 함대를 공격하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귀환한다.

1944년 2월 25일, 나가토는 제2함대 제1전대에 배속되었고 5월 4일에는 제1전대의 기함이 나가토에서 야마토로 변경된다.

1944년 6월, 나가토는 야마토와 함께 혼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미군이 사이판 섬을 공격해왔으므로 혼 작전은 취소되고 필리핀 해 해전이 벌어진다. 이 해전에서 나가토는 준요, 히요, 류호로 편성된 B부대의 호위임무를 맡았지만 결과는 위대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었고 히요도 큰 피해를 입었다. 나가토는 대파된 히요를 견인했지만 견인줄이 끊어지면서 예인은 실패하고 히요는 침몰했다.

1944년 10월, 나가토는 구리다 함대의 일원으로 레이테 만 해전에 참전했고, 사마르 해전에서 미 해군과 교전을 벌인다. 상대는 호위항공모함과 구축함, 호위구축함으로 구성된 태피 3이었으므로 구리다 함대의 압승이 예상되었지만, 플레처급 구축함 USS 히어만이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에게 어뢰를 발사하면서 일이 꼬인다. 하루나는 어뢰를 피했지만, 그 뒤에 있던 나가토와 야마토에게 어뢰가 돌진한 것. 어뢰의 코스가 심히 기묘했기에 나가토와 야마토는 어뢰 사이에 끼인 채 16km를 도주해야 했고, 어뢰의 연료가 떨어진 후에야 도주를 멈출 수 있었다. 이후 나가토는 미군 호위항모와 구축함들(특히 USS 히어만)에게 포격을 퍼부었고, 순양함 1척에 타격을 입혔다고 상부에 보고한다. 그런데 태피 3엔 순양함 같은 건 없었고[3], USS 히어만은 집중공격을 당하면서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구리다 함대를 저지했다. 더욱 창피한 점은 사마르 해전에서 야마토가 히어만에게 쫓겨난 사실은 자주 거론되지만, 나가토도 같이 쫓겨났다는 사실은 별로 거론되지 않는다. 무시당한 나가토 지못미 해전이 끝난 후 구리다 함대는 총퇴각에 들어갔고, 미군의 공습을 받은 나가토는 또 피해를 입었지만 살아남는다.

1944년 11월 15일, 제1전대는 해대되고 야마토는 제2함대 기함, 나가토는 제3전대에 편입된다. 그러나 11월 22일, 미군 잠수함 시라이온의 기습공격을 받아 동행하던 공고급 순양전함 공고와 구축함 우라카제가 침몰했다. 원래는 나가토가 얻어터져야 했지만, 나가토를 노렸던 어뢰가 우라카제에게 명중했기에 멀쩡했다고.

1945년 4월 20일, 일본군은 손상과 연료부족을 이유로 잔존 대형함을 제4예비함으로 지정한다.[4] 6월 1일, 나가토는 특수경비함으로 지정되어 부포와 대공포를 철거당하고, 미군의 상륙을 저지할 해상포대가 되었다. 또한 위장 도색을 했으며, 위장을 위해서 굴뚝과 후부 마스트가 철거되었다. 일본군은 나가토와 중순양함 토네 등을 소련에 팔아넘기고 자원을 받으려는 계획도 세웠으나, 실현되진 않았다.

1945년 7월 18일, 미군은 윌리엄 홀시 제독이 이끄는 38기동부대를 동원해 요코스카를 공습한다. 나가토는 폭탄 2발과 로켓탄 1발(일본군은 폭탄으로 기록)에 맞아 피해를 입었지만 침몰하지는 않았고, 미군의 공습에 대비해 배에 물을 채워넣어서 착저한 것처럼 위장했다. 배의 수리는 이뤄지지 못했지만, 결국 일본이 항복한 덕에 더 이상의 공격을 받지 않아, 격침을 면했다.

2.3. 전쟁 후


전후의 나가토. 1945년 7월 18일에 폭격을 맞아 손상을 입었다고 한다.
영상의 30초 부분을 보면 함의 마스트에 성조기가 휘날리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USS Nagato

미 함대가 도쿄 만에 입항할 때 나가토함이 마지막 자살 공격을 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가미카제를 경험한 미군인지라 우려가 드는 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항복은 별 문제 없이 이루어졌고, 해군기를 내리는 것에 대해 약간의 충돌이 있었지만 유혈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병 몇 명이 나가토함의 3번포탑에 포탄을 장전하려다가 함장에게 발각되어 두들겨 맞았다는(...) 기록도 있지만 사실인지는 확인 불가.

일본 해군 전함으로서는 전쟁후 유일한 생존함이었지만[5] 그 때문에 더욱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전후에는 미군에게 압류되었다. 결국 미군의 원폭 실험장 비키니 환초에 끌려나와 최후를 맞는다. 지금도 나가토는 비키니의 수면 아래 잠들어 있고 다이빙을 즐기는 관광객들이 외로움을 달래줄 뿐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Operation_Crossroads_Baker.jpg
2차(베이커) 실험 당시 사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rossroads_Baker_Base_Surge.jpg
확대한 사진. 물기둥 왼쪽 아래에 전함처럼 보이는 게 나가토.

1946년 7월 1일 비키니에서 핵폭탄을 맞았으나 당일 가라앉은건 아니고 몇주일 뒤 2차 실험에서도 침몰하지 않다가 며칠뒤 침수되어 서서히 침몰했다.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자면 첫번째 실험인 에이블 실험(공중 낙하)에서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데미지를 입지 않았고, 두번째 실험인 베이커 실험(수중 폭파)은 알쨜없이 수장되었다. 사실 1차 실험에서 목표였던 전함 네바다를 제대로 맞췄으면 나가토는 끔살확정이었다. 문제는 폭탄이 바람에 실려 목표함인 네바다에서 560m나 빗나가는 바람에 반대방향에 있던 나가토는 거리도 멀고(거의 1000야드 서클에 걸쳐있었다) 함미방향으로 있어서 데미지를 적게 받았다.

1차 실험은 단순히 핵폭발로 배를 가라앉히는 실험이 아니라 핵폭발이 선체와 장비, 그리고 생체에 미치는 방사능 피해를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공중폭발이라 어지간히 가까이 있던 함선외에는 대부분 구조물은 파괴되어도 함체의 데미지는 크지 않아서, 실제로 거의 폭심지의 중심부에 있어 상부 구조물이 죄다 녹아내렸던 경순양함 사카와마저 하루를 버티고서야 가라앉았을 정도였다. 하지만 두번째 실험인 수중폭발에서 나가토는 이 수중폭발 실험도 견뎌냈고,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3일을 더 버틴다. 하지만 2차 실험으로부터 4일이 지난 아침, 조사를 나온 미군 관계자는 나가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았다. 3일째까지만 해도 간신히 떠 있던 나가토가 밤 사이에 가라앉아버린 것. 결국 이 사실이 일본에도 알려지고 극우파들은 '일본은 졌지만 나가토는 지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가라앉는 모습을 미군놈들에게 보이지 않았다'는 식으로 신격화를 했다.

참고로 이 실험을 두고 나가토의 방어력이 세계 제일이라는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렇게 치면 베이커와 에이블을 둘 다 나가토와 비슷한 거리에서 겪고도 침몰하지 않은 미국의 구식 구축함 휴즈(DD-410)가 나가토보다 방어력이 뛰어나다는 말이 되므로 그냥 웃어 넘기면 된다. 이 실험에 투입된 함선 중 다수가 실험 이후 장시간을 버텨내며 다시 정박지에 계류되었다가[6] 3년 뒤 군사훈련에 표적으로 투입되어 각종 미사일과 포탄을 집중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에야 침몰했다. 다만 나가토 역시 다른 생존함들과 마찬가지로 데미지 컨트롤을 받으며 인계되었다면 결국 가라앉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나가토나 새러토가 같은 대형함들은 핵폭발을 견뎌냈음에도 거대한 선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방사능의 완벽한 제거가 어렵다는 이유로 방치되고 가라앉은 것. 어쨌든 애초에 전함으로서의 방어력을 시험하기 위한 실험이 아니었으니 이 실험 결과를 가지고 방어력을 논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어차피 전투중에 핵을 맞는다면 배의 외관은 멀쩡해도 내부의 승무원은 산채로 구워지거나 방사능 때문에 죽어 전투불능이 됨은 물론이요 배 자체도 방사능을 잔뜩 뒤집어 쓰게 되니 따지는거 자체가 의미 없다.[7]

3. 미디어 매체

성능은 현시창이지만 이름값은 있는 군함이라서 태평양 전쟁을 모티브로 한 게임에서는 제법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실제 활약상과 성능보다 부풀려져 나오는 것 역시 많은 건 덤.

4. 잡다한 이야기

5. 관련 문서



[발음] '나가토토 무츠와 니폰노 코리' [2] 일본 내에선 이때 나가토가 갈등중임을 알아차린 영국 순양함 함장이 일부러 자함의 속력을 낮춰 나가토를 먼저 떠나보내는 신사적인 배려로 나가토가 제 속력을 낼 수 있게 해주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퍼져 있다. [3] 애초에 저것부터 정보 조작인게 태피 3는 본문에도 서술되어있다시피 구축함과, 호위구축함, 호위항공모함으로 구성된 소규모 함대였다. [4] 일본군에서 제4예비함은 '조만간 폐함시킬 배'다. 지정된 배는 나가토, 이세급 전함 이세와 휴가, 공고급 순양전함 하루나, 운류급 항공모함 아마기, 히요급 항공모함 준요, 항공모함 호쇼 류호, 아오바급 중순양함 아오바이지만, 진짜로 폐함시키지는 않았고 대공포대나 상륙부대 저지용 해상포대로 전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류호는 진짜로 폐함 취급해서 구레항에 처박아뒀다. [5] 진짜다. 종전 시점에서 일본 해군에게 남은 전함은 순양전함까지 다 합쳐도 나가토가 유일했다. 전노급까지 따지면 미카사가 남긴 하지만 미카사는 패망 당시 기준 20여년 전(1923년)에 퇴역하고 기념함으로 전환된 뒤였기에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6] 이 당시 기록 영상을 보면, 원폭실험 후 살아남은 군함에 수병들이 별다른 방호장비없이 올라타 배를 청소하고 여러 가지 측정을 하는 모습이 나온다. 요즘 기준으로는 말도 안 되는 안이한 모습이지만 원폭시대 초기에는 방사능 피폭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핵 야포 뿐만 아니라 무반동총용 전술 핵포탄이 나올 정도였으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의 방사능이 무인지대를 오래 남기지 않고 일찍 씻겨나간 것도 방사능에 별다른 대비를 안 한 이유였을 것이다. [7] 이와 비슷한 사례가 마찬가지로 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에 인수된 프린츠 오이겐인데, 이쪽도 핵실험에서 바로 침몰이 아니라 함선에 미치는 방사능 농도 실험이기에 한번에 침몰 안 했다고 '독일의 과학력은 세계 제이이이일~!'은 과대평가이다. [8] 연합함대 사령장관이 탑승하던 기함이었다. [9] 이 탓에 화장실을 못 써서 배 안 곳곳 눈에 잘 안띄는 구석진 곳에서 볼일을 보는 수병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아예 변기를 대신할 양동이나 요강을 비치하고 주기적으로 바다에 내버리기도 했다고. 사실 함장은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밥도 따로 먹을 정도로 다른 승조원들과 분리되어 생활하니 전용 변기가 있는 건 당연하고, 높으신 분인 사령장관이나 참모장, 장교들을 챙겨주는 것 역시 이해 못할 일은 아니다. 일본 해군의 결정적인 인사 문제는 (변기 수만 봐도 알 수 있듯) 하사관과 수병의 처우가 엉망이었다는 점과, 숙련된 기술자인 하사관과 일반 수병을 같은 취급하며 소모시켰다는 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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