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쾌남이다. 어렸을 때부터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잘 놀고 잘 뛰고 잘 웃고 잘 먹었다.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믿음직하고 재미있는 리더였고, 여학생들에겐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윤지원에게는 달랐다.
일곱 살, 골목대장 자리를 윤지원에게 뺏긴 걸 시작으로 초등학교 때 저보다 살짝 커버린 윤지원에게 달리기를 지면서 큰 시름에 빠졌으며 키가 훌쩍 커버린 중학교 때부터는 더 이상 싸움이나 달리기에선 적수가 안 됐지만, 곧잘 전교 1등 자리를 내주었다. 야무지게 얄미운 기집애. 그 애 앞에선 어쩐지 덜렁대고 당황하고 멍해지는 날들이 많았다. 이 울렁거림이 대체 무엇인지 석지원은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급식실에서,
여느 때처럼 윤지원과 성적으로 시비가 붙었던 그날 불쑥 말해버린 것이다. 이번 기말고사에서 내가 너 이기면, 너 나랑 사귀자고.
중간고사 성적은 윤지원이 전교 1등 석지원은 전교 6등이었다. 희던 귓바퀴가 빨개지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웃던 윤지원은 지나치게 예뻤다. 기말고사가 지나고, 석지원은 내내 자신을 흔들던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히 깨달았고 둘은 열여덟의 여름을 앞두고 뜨겁게 사랑에 빠졌었다.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게. 가을의 시작과 함께, 집안끼리의 반목과 운명의 장난으로 둘은 지독한 오해 속 아픈 이별을 했고 18년 후, 독목고의 이사장이 되어 윤지원과 재회한다.
고등학교 시절 ‘독목고 미친개’라는, 주로 교사에게 주어지는 별명을 입학 3개월 만에 거머쥔 소녀였다. 강자에게 강하고 물정 모르는 약자에도 강하고 불의는 1초도 못 참고 편협한 정의를 혐오하며 악습과 불합리는 따지고 고쳐야 직성이 풀리는 고삐 풀린 야생마 같던.
학생회에 들어가 툭하면 대자보를 붙이고 선생님들과 자주 싸웠으며 학생들과도 가끔 싸웠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다 맞는 말인 데다 그야말로 미친개처럼 덤벼들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녀를 크게 어쩌지는 못했고 사실 언제나 당당한 윤지원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았다. 티 나지 않는 세심함으로 약자를 도왔고, 음치임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축제 무대에 올라 노래를 불렀으며 체육대회 계주에선 마지막 주자로 나서 번번이 역전을 이뤄내 영웅이 되곤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럽게 웃던, 반짝이는 청춘이었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들어간 회사에서 동료의 성추행 문제에 총대를 메고 나섰다가 거하게 뒤통수를 맞았다. 내부고발자를 향한 차가운 시선과 오랜 소송, 믿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에 설상가상 부모의 죽음까지 겹치며 윤지원은 바닥의 바닥까지 무너졌다.
겨우 정신을 차려 다시 공부를 하고 할아버지 윤재호가 이사장으로 있는 독목고의 체육 교사가 되면서 윤지원은 정의니, 신념이니 하는 것들을 제 안에서 완전히 지웠다. 그냥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서 누구와도 대립하지 않고 조용히, 고요한 연못처럼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석지원이 재단을 사들이고 뻔뻔하게 이사장으로 제 앞에 나타나기 전까지는.
석지원은 윤지원이 처음 빠진 사랑이었고, 최초의 죄책감이자 좌절이었다. 석지원의 집안이 자신의 할아버지 때문에 몰락한 후, 마치 그 여름의 사랑이 모두 환상이었던가 싶게, 그녀 앞에서 매몰차게 사라진 석지원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죽을 만큼 그리웠고 그만큼 미워했다.
물론 그 또한 어릴 때 이야기다. 석지원과 재회했을 때 18년이나 지난 짧고 어렸던 연애를 가지고 치사하게 굴고 싶은 마음 따윈 없었고, 남은 감정 역시 없다고 생각했는데.
치명적인 부상 후 수영계를 떠나 교직으로 마음을 돌렸고 독목고 체육과 교생으로 실습을 나왔다. 길을 걸으면 알아보는 사람이 소싯적 열 명 중 열한 명이었는데 지금은 열 명 중 서넛 정도다. 그것도 마음먹고 아주 번화한 곳을 꽤 돌아다녀야. 그게 다 머리를 기른 후 지나치게 잘생겨진 내 탓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사실 오래전 공문수는 윤지원에게 제 바닥을 보여주고 그녀의 바닥 또한 보았던 적이 있다. 병원에서 부상으로 수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선고를 받고 옥상에 올랐을 때, 별도 달도 없이 깜깜하기만 하던 그 밤에 윤지원이 있었다. 부모를 잃은 윤지원과 수영을 잃은 공문수는 같은 이유로 옥상에 올랐던 터였다.
그날 공문수는 윤지원 때문에 목숨을 건졌고, 홀연히 사라진 그녀가 오래 궁금했다. 궁금함은 그리움이 되었고 독목고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아마도, 사랑이 되었던 것 같다.
윤과 석의 어린 시절 친구. 맨날 싸워대는 윤지원과 석지원을 보며 혀를 차던 어른스럽고 조용한 아이였다. 특히 윤지원과는 늘 붙어 다니며 친하게 지냈는데 그런 윤지원에게도 말하지 못한 그녀의 비밀은 오랫동안 석지원을 혼자 좋아했던 것이다. 고등 2학년이 되어 윤지원과 석지원, 둘과 같은 반이 되었고, 마음은 무럭무럭 자랐다. 하지만 모두의 사랑과 동경을 받는 석지원에게 마음을 고백하기는 쉽지 않았다.
꼭 같은 대학에 들어가서 고백해야지.
지혜의 목표는 그것이었다.
그러나 고2 가을에, 석지원네가 쫓기듯 마을을 떠난 후 앓아누운 윤지원을 찾았다가 차지혜는 아무도 몰랐던 두 사람의 연애를 알게 되고, 참을 수 없는 비참함과 분노를 느낀다.
젊은 시절 윤지원의 할아버지 윤재호와 석지원의 할아버지 석반희에게 동시 구애를 받으며 온 마을이 떠들썩하게 연애를 했었더랬다. 석반희를 택했고 결혼을 하고 그가 먼저 세상을 뜬 후에,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석씨 집안의 어른으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막무가내인 석경태가 유일하게 꼼짝 못 하는 상대다.
윤지원 아버지인 윤호석의 친구이자 동업자였다. 어린 시절 부모를 잃은 그를 윤재호가 데려와 아들처럼 키웠다. 그래서 친구인 윤지원 아버지의 죽음 이후, 쇠약해진 윤재호와 윤지원을 물심양면 보필하며 무너져가는 학교 살림을 맡고 있다. 두 사람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꼼꼼하고 치밀하다.
공부 빼고는 모든 걸 잘하는 만능 재주꾼. 운동 노래 악기 개그, 못 하는 게 없고 모든 걸 기꺼이 즐기며 바쁘게 산다. 모두가 기석을 좋아하는데, 유일하게 해수만이 자신을 미워하고 그 사실을 숨기지도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러라지, 저 역시 공부밖에 모르는 따분한 고해수 따위 딱 질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