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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9 07:54:03

블라디미르 레닌/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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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 배우자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사건 러시아 혁명 · 러시아 내전 · 신경제정책
관련 정치인 니콜라이 2세 ·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 레프 트로츠키 ·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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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긍정1.2. 비판

1. 개요

블라디미르 레닌의 평가를 작성한 문서

1.1. 긍정

여러 문제를 떠나서 레닌이 세계 역사와 여러 사상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걸 결코 부인할 순 없으며, 역사에서 그를 빼놓고 말하기 힘들 정도이다.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이오시프 스탈린은 격하운동이 벌어졌으나, 반대로 레닌에 대해서는 우상화가 유지됐다. 레닌에 대해 흠이 될만한 과오는 모두 숨겨졌으며, 이러한 숭상은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유지되었다. 그로 인해 우상숭배가 끝난 오늘날까지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레닌 묘역에는 많은 참배객이 모여들며, 레닌은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당시 시대상황에선 필요했던, 대체로 훌륭했던 위인으로 평해진다.

러시아뿐 아니라 다른 공산권 몇몇 국가들, 특히 구 소련 공화국인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이나 과거 공산권 국가였던 몽골에서는 영웅을 도와 악인을 무찌르는 산신령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주로 공민전쟁 시기 백군 압제자에 대항하여 맞서던 각국의 민족 영웅들이 고생하다 모스크바로 가서 레닌을 만나 공산주의 교육을 받고, 적군과 함께 돌아와 압제자를 몰아내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거나 혹은 그냥 레닌이 와서 압제자를 몰아내고 고통받던 인민들을 해방시켜준다는 내용이다.

종종 러시아 바깥의 반러주의자 중에서도 레닌에는 우호적인 사람도 있다.[1] 특히 스탈린 이전 초창기 레닌시대의 소련은 러시아 민족국가를 초월해 세계 혁명의 전진기지이자 전세계 혁명가의 공통 조국의 성격이 있었고, 알려진 레닌 개인의 성향도 러시아 민족에 국한된 것과는 한참 거리가 있었다.

실제 레닌의 경우 중앙아시아 등지의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폐지했고, 소련은 러시아계만을 위한 국가가 아니라며 러시아어를 법적 공용어로 지정하는 데 반대했다. 그 외에도 실질적 측면에서 인종 차별과 평등 문제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정책적 성과 역시 상당했다. 이는 실제 레닌 집권 시기 소련을 방문했던 미국의 흑인 시인 랭스턴 휴즈가 직접 목격하고, 인증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적 페미니즘을 바탕으로 한 여성 해방론을 필두로 성차별 타파와 제도적 성평등에도 관심을 많이 기울였는데, 1919~1921년 편지와 연설문 등지에서 가족, 노동, 정치적 영역에서의 법적 평등권, 가사와 양육의 사회화를 기반으로 한 여성의 노동자화, 그리고 남성의 봉건적 의식 변화와 매춘 폐지 및 매춘부의 노동자화 등을 역설했다. 이에 10월 혁명 이후로는 낙태와 동성애가 비범죄화되었으며 가사노동의 공공화가 추진되었고 사생아에게도 친자와 동일한 권리가 주어졌다. 이러한 성적 자유화에 힘입어 성소수자 인권도 담론화되었는데, 1918년 외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된 게오르기 치체린은 커밍아웃한 게이였으며, 1923년 모스크바 사회보건원 원장인 그리고리 밧키스 박사는 "특정 개인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는 한 성생활 문제에 대해 국가와 사회는 절대 개입하지 않는다. 유럽 국가들의 법은 동성애 등 다양한 성적 만족의 형태들을 공공도덕에 대한 범죄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법은 이것들을 소위 자연스러운 성교와 동등하게 취급한다."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다양성에 대한 소련의 사회적 여유는 스탈린 시대에 급격하게 냉각되었고, 그래서 반스탈린, 반러적이면서도 레닌은 괜찮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훗날의 러시아 중심적인 경직되고 폐쇄적인 소련은 전부 스탈린 때문이라고 깐다.[2]

반면 서방 세계에서 레닌은 원조 빨갱이, 빨갱이 교주로 불리며 악명을 떨쳤다. 아무래도 소련의 수립에 가장 커다란 역할을 했던 사람인 만큼 냉전기 프로파간다로 가루가 되게 까이는 사람이다. 그 혁명이라는 것을 이룩하기 위해 니콜라이 2세 황제 일가의 몰살 및 체카의 수립, 반대파 숙청과 숱한 인민재판 등 도덕적인 면에 있어 끔찍한 패악이 벌어지곤 했으나, 공산정권을 수립하고 볼셰비키가 살아남기 위해 필수적으로 벌인 악행이었다는 점에서 이를 이해해 볼 필요가 있다.

예컨대, 정권교체 과정에서 이전 왕조가 잔혹하게 근절되는 것은 조선의 왕씨 몰살과 같이 전근대 왕조 교체에서는 자주 나타났던 현상으로, 이전 세력의 구성원은 항상 새로운 집권에 반대하는 세력의 구심점 및 명분으로써 작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또 러시아는 제정시대 오흐라나로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비밀경찰의 전통이 있었으며, 레닌은 내전기 및 그 이후 시기에 벌어진 수많은 반혁명 세력과의 싸움에서 이러한 정보전 및 비밀경찰을 제대로 활용했다. 도덕적인 관점에서는 용서할 수는 없는 행위이나, 적어도 혁명의 수립 및 그 수호를 목적으로 움직이는 혁명가로서 황족의 영향력을 근절시키거나 비밀경찰을 활용하는 등의 행위는 현실과의 타협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는 것. 한편 레닌은 이러한 억압 도구를 새롭게 수립된 노동자 권력을 안정궤도에 올려놓기 위한 한시적 필요에 의한 조치로 생각했고 권위주의적 통치기구의 활용 역시 극도로 유의하여 활용해야 한다고 여긴 반면, 스탈린의 경우는 그러한 통치기구를 오남용하여 통제와 폭력 자체가 일상화되고, 평범한 노동인민들까지도 감시하고 통제하는 체제로 만들어 버린 것이 주요한 차이점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레닌의 언행이나 정책의 측면에서, 자신에 내세웠던 사회주의적,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이상을 공공연히 배신한 혐의는 보이지 않는다.[3] 내전이 발생하기 전까지 볼셰비키의 사회정책은 노동자-농민의 권익의 향상 및 일반적인 복지, 여성의 권리보장, 사회의 신분적, 계급적 관계의 철폐 등등 여러 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한 것들이 많이 있다. 어디까지나 20세기 초의 열악한 세계환경 기준이지만. 예컨대 선거권이라든가.

문제는 1918년 내전과 함께 전시공산주의라는 비상상황이 벌어지면서 그 모든 것이 틀어져버린 것. 이를 계기로 정부와 농민의 관계는 극한으로 꼬이기 시작했으며, 입안된 수많은 정책들은 비상사태의 선포와 함께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내전이 종식된 상황에서 혁명은 고립되어 레닌이 죽고 트로츠키는 쫓겨나는 상황에서 권위주의적 통치기구가 스탈린 관료집단의 수중에 넘어간 결과 스탈린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혁명 이후의 정치적 행적에 대해서는 엇갈린 평가가 있을지언정, 혁명활동 자체에 능력에 대해서는 자타공인 본좌.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감지해내고, 현재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기반으로 대중과 동조하여 그들의 힘을 통해 일련의 목적을 수행해가는 면모는 가히 천재적이라는 평. 공산주의에서 마르크스가 혁명의 당위성을 이론적으로 세웠다면, 레닌은 그 혁명을 어떻게 잘 해낼 것인가, 마르크스의 저작에서는 거의 빠져있던 부분을 스스로 만들어 채워넣은 존재다. 공산주의가 괜히 교조를 기려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말을 쓰는 것이 아니다. 애초에 10월 혁명 직전에 볼셰비키 내부에서도 "야 이거 했다가 우리 다 죽는 거 아니야?" 하고 벌벌 떠는 사람이 대부분이었고, 멘셰비키나 사회혁명당, 입헌민주당은 여전히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승전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닌은 민중들이 원하는 것은 평화라는 것을 잘 캐치하고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혁명에서의 지지를 확보한 것. 주변인들은 죄다 우려한 그 10월 혁명도 결국 성공시키는 위엄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난세의 간웅이며, 한 나라의 건국자 자리를 꿰어차기에 손색이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레닌 살아생전에 프롤레타리아트 민주주의가 부정된 적은 없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와해된 것도 공산당이 탄압해서가 아니고, 전시공산주의 때 페트로그라드에 식량이 부족해지며 소비에트에 참가하던 노동자계급이 식량을 찾아 농촌으로 떠나버린 것이 결정타였다.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해산되기는 했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공산당에 입당해서 의견개진을 할 수 있었으며, 레닌이 살아있을 때에는 프라우다 지에 공산당 내의 토론 내용과 각 저명인사의 정치적 의견이 공공연히 실렸었다. 그 악명높은 분파금지령 이후에도 분파는 공식적으로 없어졌을 뿐 고스란히 남았을 정도.[4]

공산당 내에서도 레닌은 당수가 아닌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가장 저명인사로 남았으며, 인민위원평의회 주석이긴 했으나 레닌 본인이 자신의 입으로 행정부와 당이 분리되었으면 한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수상으로써의 권위로 당내 의사개진을 막은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레닌의 후계자 선정인데, 실제로 그나마 인민참여적 민주주의, 즉 원리 그대로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긍정적이었으며 실제로 실천할 의지도 있었던 인물은 레닌의 후계자급 인물 중에서는 트로츠키밖에 없었으며, 레닌이 죽고 바로 권력을 잡은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 스탈린은 레닌을 신격화하며 가장 먼저 저지른 짓이 프라우다에 정치적 의견이 실리는 것을 막은 것이었고 부하린도 이를 도와주었다. 레닌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그것이 설령 자유민주주의와는 엄연히 달랐을지언정 레닌이 더 오래 살았다면 소련이 민주적으로 흘러갔을 것이다가 아주 거짓말은 아닌 셈이다.

또한 러시아의 체제 전환 등을 이야기 하지만 오히려 레닌은 의견개진 및 민주적 토론을 중시하였기 때문에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명목상 국가원수였던 야코프 스베르들로프 중앙집행위원회 주석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가 레닌이 주장한 사회혁명당원 및 멘셰비키 당원의 사형을 막고, 오히려 대부분의 당원을 사면시켜버렸을 때에도 막지 않았다. 이렇게 사면된 이들 중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항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살려두었다면 엄청난 후환이었을 당대 사회혁명당의 지도자이자 저명한 혁명인사인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도 있었다. 1919년 이후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나 비 볼셰비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이런 식으로 복권되었으며 그중 많은 이들은 공산당에 입당하여 정치활동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들을 죽인 것은 스탈린이지, 레닌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레닌 집권기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체제 전환 과정의 사회악 일소의 과정이었으며, 비록 외형적이고 방법론적인 유사성은 있었고,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을지언정 그 자체로 청산 대상이 되어버린 스탈린 집권기의 전체주의적 관료 독재와는 그 주체나 목적 면에서 본질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 당시로서는 그것이 왕도였다는 것이 반스탈린계 레닌주의자들이 내세우는 레닌에 대한 옹호론의 핵심이다. 따라서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를 반대하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조차도 용납할 수 없고, 권위주의적 통치 자체는 필요하지만 본래의 목적에 어긋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입장에서라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긍정하게 된다. '권위주의적 통치는 절대악인가?'에 대한 가치판단은 각자 알아서 할 문제이다. 비판론은 '그렇다. 절대악이다'라는 관점을 전제했다.

1.2. 비판

레닌의 생부는 그의 아들이 장차 경멸하게 될 전형적인 자유주의 신사였다. 레닌의 귀족적인 출생 배경은 레닌의 소련 전기 작가에게는 곤란한 요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군림하려드는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힌트를 준다. 그것은 하급자로부터의 비판을 참지 못하는 성격이나, 대중을 그저 그의 혁명적 계획을 위해 필요한 인간 재료로 보는 그의 성향에서도 엿보인다.[5] 1917년 막심 고리키가 썼듯이, "레닌은 지도자인 동시에 러시아 귀족이었다. 그에게는 이 멸종된 계급의 어떤 심리적 특성이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는 러시아 국민에게 이미 실패할 운명이 예정되어 있는 하나의 잔인한 실험을 실행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생각했다."[6]
올랜도 파이지스. 『혁명의 러시아 1891~1991』
그러나 실상 1917년 12월 체카의 창설 이래로 비밀경찰의 탄압 수위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고 해산 일정 같은 건 전혀 잡혀 있지 않았다. 또한 소련은 여성과 소수민족 등이 투표권을 획득한 국가 가운데 하나지만, 자유선거가 보장되지 않는 한 얼마 못 가 별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했다. 다른 여러 권익도 마찬가지다. 소련 건국 직후에는 그런 권익은 분명히 높은 평가를 받을만한 것이었고, 파시즘의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유럽국가들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열악했으나,[7] 스탈린의 대숙청 시대를 거치고 1980년대까지 소련과 다른 나라의 자유, 권리 수준 차이가 점점 커졌던 것이다.

내전 이전에도 볼셰비키는 자신들이 겨우 전체 득표의 24%[8]를 얻은 의회를 얼마안가 해산시키고[9] 공산주의를 따르지 않은 조직들을 정치적으로 탄압했다.[10] 이에 대해 당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보통 이를 비판하면 비판했지 지지를 보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카를 카우츠키는 볼셰비키의 행동은 발칸반도식 독재이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고 선을 그었으며, 로자 룩셈부르크 역시 볼셰비키의 이런 행동에 의구심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11] 레닌이 쫓아낸 멘셰비키들조차도 가혹한 독재정권을 주장하진 않았고 멘셰비키가 건국한 조지아 민주공화국은 사회혁명당과 그외 좌파정당이 연합한 다당제 민주공화국이었다. 조지아 민주공화국 역시 볼셰비키에 의해 멸망하였다. 멸망 후에도 1924년 8월 봉기가 일어났는데, 8월 봉기로 1만여 명이 죽고 2만여 명이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 사막으로 강제이주 당했다.

이런 이유로 마르크스 계열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레닌을 비판하는 경우가 꽤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명명하는 통념과는 상반되는데, 이런 경우는 대부분 마르크스 본인의 주된 목적이 인간 소외 현상을 비판하는 것에 있었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이들에 따르면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소수의 직업적인 혁명가들을 기반으로 하는 사상으로 탈바꿈시키고 대중주의를 배제하면서부터 치명적인 왜곡이 시작됐다고 보는데 이러한 전문화와 대중주의의 배제로 인해 종래에는 인간 소외에 대한 담론이 더 이상 중요하게 다루어질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에선 마르크스주의가 갈수록 온건 개혁 성향의 서구 사상가들에게서 매력을 잃어가던 것과 20세기 자유 진영에서 공산주의의 반댓말은 민주주의라는 왜곡된 사고가 형성된 것 모두 그 원흉은 레닌에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레닌주의는 그 주의가 태동하면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사민주의자들은 레닌주의를 국가를 절대화시킨 권위주의적 공산주의라고 비판하였다. 당장 사민주의자들은 생산수단의 자유와 억압당하지 않을 자유를 주장했으나 레닌주의에선 경제적 평등을 기초로 정치, 사회, 문화적인 면에서 모든 평등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전 국민적으로 자유가 침해되며, 사상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 한마디로 레닌주의는 기존 마르크스주의가 국가를 억압의 대상으로 본 것과 달리 국가라는 체제를 절대화했다라는 것.[반론]

레닌주의와 후에 악명을 떨치게 되는 스탈린주의의 연계성에 대해서 레닌주의자들은 스탈린 체제 후 스탈린주의가 레닌주의식 민주주의를 많이 후퇴시켰고, 스탈린은 항상 자신의 비민주적인 사상을 레닌주의와 동일시하려고 했기 때문에 레닌주의는 현재 스탈린주의와 동일시되어 왜곡된다라고 주장하였다. 대표적으로 슬라보예 지젝 같은 사람은 '레닌의 시대에 일어났던 공공연한 폭력과 스탈린 시대에 벌어졌던 은폐된 폭력을 구별하고, 스탈린 시대에 자행된 폭력이 가진 은폐되고 비밀스러운 속성 때문에 밀고자와 방관자, 비겁한 수동적 협력자들이 사회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분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른 사회주의 진영인 좌파공산주의 진영, 사민주의 진영 그리고 아나키즘 진영에선 레닌주의는 큰 비판을 받았으며 근본적으로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의 토대에 의해 진행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레닌주의는 중앙의 의견이 우선시되고 소수의 의견이 무시되거나 억압되고 있으며 구조적으로 비민주적이고 전례에 없던 권위주의를 새로 만들어낸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무비판적이며 권위주의를 앞세운 덕에 중앙에 뜻에 맞지 않은 자들은 무자비하게 숙청될 수밖에 없는 체제였고 스탈린뿐만 아니라 레닌 역시도 그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스탈린은 의외로 레닌의 가장 충실한 계승자였을 수 있다.

실제로 체카는 반혁명세력의 축출이라는 명목으로 수만명을 고문하거나 처형했고 레닌은 체카의 처형방식을 정당하다고 인식했다. 그는 1920년 1월 12일의 연설에서 "우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수천 명을 쏘았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라고 말하며 체카의 숙청을 옹호했다. 또한 1921년 5월 14일 레닌이 주도하고 있던 당 정치국은 체카의 즉결처분권을 확대하는 조치를 통과시켰다.

옹호론 항목을 보면 레닌이 정적의 살해에서 가장 강경하였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수뇌부가 오히려 사면을 강행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쪽이든 레닌이 단순한 숙청을 넘어 정적을 살해하고 망명시키는 것을 주된 활동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 셈이고 다르게 말하면 다른 혁명 동지들이 레닌을 막을 정도로 레닌의 정적제거가 가혹하고 심했다는 의미가 된다.

실제로 이때 살아남은 인사들을 보자면 반혁명 인사였던 코르닐로프는 처형할 경우 카자크 기병대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으며 사회혁명당 세력들은 지방에서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었으며 아나키스트들은 서유럽 사회주의쪽에서의 의견이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아나키스트들은 2월 혁명 직후부터 볼셰비키와 협력해서 임시정부를 붕괴하는데 공헌했음에도 정권 장악 직후부터 태도를 전환하여 러시아 전역에서 불법체포와 즉결처분을 저질렀다. 이에 볼셰비키를 피한 아나키스트들은 말살을 피해 볼셰비키와 협력하거나 아나키스트가 장악하고 있던 남동부 우크라이나로 이동했으나 볼셰비키들은 그곳까지 추격해 와서 20만명의 농민들을 학살하는 적색테러를 자행했다. 이후 아나키스트 민병대를 이끌던 네스토르 마흐노에게 두 차례 자객을 보내 암살시도를 하고 그가 망명을 하자 망명대상국인 루마니아와 폴란드에 지속적으로 송환요구를 한 것은 덤이었다. 여담으로 마흐노는 파리로 망명을 가서 영양실조로 인한 폐결핵으로 죽었으며, 그의 딸은 나치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고 전쟁이 끝나 대신 NKVD에게 끌려간다. 마흐노와 함께하던 아나키스트 볼린은 내전 중 볼셰비키에 의해 죽을 뻔했다. 아나키스트 역사가 표트르 아르시노프는 볼셰비키로 전향하였으나 대숙청 시기에 아나키즘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내전 시기 아나키스트 연맹 나바트(Nabat) 설립에 참여한 파냐 바론은 하르키우에서 체카에게 체포된 후 구타당했고, 랴잔 감옥에서 모스크바로 탈출, 거리에서 살다가 옘마 골드만과 알렉산더 버크만에게 발견되었는데, 똑같이 체카에게 붙잡혀 갇힌 남편–아론 바론을 탈옥시킬 계획이었으나 체카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이후 루블화 위조, 강도질, 테러를 포함한 여러 체카에 의해 날조된 범죄 행위로 기소되어 처형당했다. 골드만은 항의하려 했지만, 친구들이 만류하여 결국 러시아 혁명에 완전히 환멸을 느끼고 떠나고 말았다. 표트르 크로포트킨으로 말하자면, 그가 죽은 1921년의 말 그와 아나키스트들의 저작이 완전히 금지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체카에 몇몇 인사가 참여할 만큼[13] 볼셰비키에 협조적이었으나, 모조리 배신당했다. 10월 혁명 2주 후의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은 37%의 득표율을 얻으며 전국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정당임이 입증되었다. 볼셰비키는 1918년 1월 의회를 해산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레닌의 반대자들이 양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조약 과정에서 그는 대단히 독단적인 모습을 보였다. 물론 러시아인들은 평화를 원했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인구의 34%, 탄전의 90%를 요구하면서 분노로 변했다. 레닌을 제외한 거의 모든 러시아인이 베르사유 조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굴종적 조약에 분개했다. 트로츠키는 조약에 반대했고, 부하린은 아예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안드레이 부브노프, 카를 라데크 등과 함께 당내 분파까지 조직해가며 조약에 극력 반대했다. 스탈린은 처음엔 조약 반대파였으나 레닌의 의중을 알고 조약에 찬성했다. 두 명의 사회혁명당 체카 요원은 주러 독일 대사 빌헬름 미르바흐 백작을 암살했다. 1918년 7월, 농민 강제 징발을 지속적으로 비난하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볼셰비키가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알고 봉기를 일으켰다. 그들은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억류했고, 좌파 사회혁명당원 적군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심비르스크를 점령했다. 하지만 봉기에서 사회혁명당원들은 볼셰비키를 너무 자비롭게 대하였고 중앙위원회로 진격하길 주저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봉기는 라트비아 소총병의 도움으로 진압당했으며 무라비요프는 전사하였다. 재판 없이, 사회혁명당–즉 SR의 체카 요원 13명이 즉각 처형당했으며 소비에트에서 SR이 완전히 추방당했다. 살아남은 SR은 우크라이나에서 마흐노우슈치나와 합류하여 영향력을 얻었고, 그곳에서 반 백군 운동과 자유 소비에트 건설을 위해 아나키스트들과 긴밀히 협력했다. 발틱 함대 선원 출신으로 SR에 입당해 봉기에서 살아남은 드미트리 포포프는 마흐노우슈치나와 적군이 안톤 데니킨 남러시아 정부에 대항하여 동맹했을 때 볼셰비키와 협상하는 대표단으로서 협상을 수행하였다. 데니킨이 파멸하자, 1920년 마흐노파 대표단 전체가 모스크바로 추방되어 제르진스키의 명령에 의해 총살당했다. 농민을 잔인하게 탄압한 지주 루제놉스키를 암살한 것으로 명망을 얻었던 좌파 SR 지도자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브레스트 조약을 찬성할 만큼 레닌의 관용을 얻기 위해 노력했으나, 봉기에서 군사적 이점을 활용하지 않고 이미 지쳐버린 대중의 자발적 봉기를 기대하는 등 너무 ‘혁명가답게’ 행동한 죄로 실패하였다. 많은 SR 지도부가 모스크바에 수감되었고, 스피리도노바 자신에 따르자면, 200명 이상의 당원들이 즉각 총살되었다. 그 후 그녀는 평생 감옥 안에서 살며 심문에 시달렸고, 독일의 소련 침공 3개월 후 다른 정치범들과 함께 메드베데프 삼림 학살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제는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하는, 노동자 반대파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노동자 반대파는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나타나고 있던 지나친 관료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공산당 내 분파였다. 주로 노동자 출신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산업 행정가들로 구성된 그들은 경제를 노동자들이 자유롭게 관리하길 원했고,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를 원했다.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14], 세르게이 메드베데프,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유리 루토비노프 등을 포함하는 이 분파는 러시아 공산당 제 9차 대회에서 빛났다. 루토비노프는 그의 연설에서 노동자 민주주의의 즉각적 구현을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회의에서 ‘당내 파벌 분쟁’ 을 막는 임무를 맡은 통제위원회를 신설했다.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반대파들의 투쟁은 점점 더 빈번해졌으며 중앙위원회의 결정과의 모순이 지역과 중앙에서 심화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상류층과 하류층 문제를 다루었던 노동자 반대파들은 노동자 당원들 사이에서 실질적 지지를 형성하였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화이트 칼라, 블루 칼라 노동자들이 수직적 위계질서의 대표자를 직접 선출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런 대표자들은 민주적으로 선출되어야 할 것이며, 구성원들에게 책임을 가지기에, 구성원들이 원할 때 소환되어야 할 것이었다. 1920년 말과 1921년 초에 대두되었던 소비에트 러시아에서의 노동조합의 역할에 대한 논쟁은 러시아 공산당 제 10차 대회에서 노동자 반대파의 견해가 거부당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레닌은 노동조합을 자발적으로 구성된 기구가 아닌 그저 공산당 산하의, 당의 명령이나 받는 종속적 행정기구로 격하시켰다. 레닌은 이를 다수결을 통해서 통과시켰다. 다수결을 통해서 정책을 통과시킬 거면 제헌의회 해산이나 농민 징발도 다수결을 통해서 민주적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의문이 드는 부분이다.

노조 토론으로 끝장난 노동자 반대파들은 이후 NEP의 시행 상태를 비판하며 견해를 이어나갔다. 예를 들어, 콜론타이는 코민테른 제 3차 대회에 참석하여 NEP가 노동자들을 환멸에 빠지게 하고, 자본주의를 강화한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노동자 반대파가 정치적으로 점점 더 주변화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실랴프니코프, 메드베데프, 콜론타이는 1922년 러시아 공산당 제 11차 대회로 공산당에서 제명당했다. 실랴프니코프와 메드베데프는 일명 "노동자 반대파"라고 불리는 반혁명 그룹에 가담하고 "반혁명적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 테러리스트 블록"과 연계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1937년 그들은 처형당했다.

한마디로 볼셰비키의 관용이란 몇몇 이용가치가 있던 대상에 한정되었을 뿐 기본적으로는 정적의 물리적 제거가 당연시되었고, 레닌은 이보다도 더 심해서 다른 볼셰비키 동지[15]들이 레닌을 막아설 정도로 잔혹했다. 나아가 기존의 기득권 세력에 대해서도 당연히 잔혹하고 강경하였고, 정교회에 대한 탄압도 종교인 탄압을 위한 무신론자 단체까지 따로 만들 정도로 강경했다. 카를 마르크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라는 발언을 읽고 흥분한 많은 사회주의자들처럼 레닌 또한 소련 초기에는 종교를 존중하는 듯 하다가 결국 암묵적으로 종교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편 적백내전으로 인한 경제사정 악화와 볼셰비키의 권력독점화가 결정적으로 굳어질때쯤인 1921년 10월 혁명의 주력세력이었던 크론슈타트에 있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들의 명분은 바로 레닌의 초기 슬로건과 동일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 그러나 레닌과 볼셰비키들은 콜론타이 같은 극소수 반대파의 의견을 묵살해가며 이 봉기가 외국 세력의 선동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반란을 진압한 직후 뻔뻔하게 파리 코뮌 50주년 기념행사를 열었다.

또한 레닌을 띄우기 위해 스탈린을 끌어내려 레닌이 하려는 혁명은 인민을 위한 것이었는데, 패륜아 스탈린이 숭고한 레닌의 혁명정신을 왜곡해 망가뜨렸다라고 종종 주장되기도 하는데, 사실 스탈린이 강대국 소련을 건설해 내지 않았다면 과연 레닌의 이름이 세계사에 그토록 크게 기억되기나 했을지도 의문이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한계가 뚜렷한 정책이었고 무자비한 스탈린의 13년에 걸친 1, 2, 3차 경제개발 5개년이 바로 소련을 당대 최강의 공업국가중 하나로 만든 정책이었다. 이런 스탈린이 자신의 독재정권을 공고히 하고, 다른 지도자 후보들보다 강하지 못했던 자신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레닌의 이름을 줄창 팔아먹었기에 레닌의 명성이 더욱 높아진 것이다.

추가로 레닌은 미국을 포함한 다른 국가의 다양한 민주주의 체제에 일관되게 부정적이었다. 대통령제는 나폴레옹 3세나 만드는 독재체제이고, 의회민주주의는 국회의원에게 투표할 때만 주권이 있는 노예들의 체제이고, 아나키즘은 그냥 폭력이며, 룩셈부르크의 평의회 민주주의는 러시아처럼 노동계급의 활동이 길지 않은 국가에서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소비에트 러시아 국내에서 사회혁명당이 왜 소비에트가 아닌 공산당과 인민위원평의회가 권력을 쥐고 있느냐고 항의하여도 무시하였으며,[16] 크로포트킨은 뒷방 늙은이로 무시했고, 멘셰비키가 세운 노동계급 정당의 자유로운 정치참여가 보장되어 있던[17] 조지아 또한 붉은 군대를 이끌고 가 박살내 버렸다. 8월 봉기에서 멘셰비키는 종말을 맞이했다. 바로 위에 언급된 크론시타트 반란 이후에는 마르토프의 멘셰비키, 스피리도노바와 체르노프의 사회혁명당 좌우파, 실랴프니코프의 노동조합을 공평하게 탄압했다. 이러한 레닌의 권력 독점적인 정책에 콜론타이, 스베르들로프, 심지어는 트로츠키조차도 반대를 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 레닌의 결정을 거스르지 못했다.
트로츠키처럼 “혁명의 배반” 운운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 또는 유물론적 개념뿐만이 아니라 보다 평범한 상식에서조차 벗어난 “설명”이다.
이 “배반”은 어떻게 가능했으며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혁명의 승리 이후의 시대란 어떻게 발생했는가?
그것이 진짜 문제인 것이다.
상황을 면밀하게 검토해 보면 이 계획된 “배반”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혁명이 취해 온 방식 그 자체에서 파생된 “물적(物的)”이자 엄밀히 논리적인 귀결이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러시아혁명의 부정적 결과는 단지 특정한 과정에서 귀결된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정권은 레닌 및 트로츠키에 의하여 수행된 방책의 불가피한 귀결에 불과했다. 트로츠키가 “배반”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잘못된 방법으로 인해 조금씩 진행되어 온 타락의 피치 못할 결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부와 국가의 절차가 “배반”으로, 즉 오늘날의 “배반”을 허용하는, 파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열어놓았다. “배반”은 이 파산의 두드러진 한 측면일 뿐이다. 다른 절차들은 다른 가능성을 초래했을 수도 있다.
트로츠키는 맹목적인 편견에서 (혹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위선으로) 용서할 수 없는 가장 명백한 혼란을 범하고 있다. 그는 원인과 결과를 뒤바꿔놓고 있는 것이다.
그는 조잡하게 자신을 기만하여 (또는 자신을 속인 것처럼 꾸며 놓고, 자신의 이론을 방어할 수단을 발견하지 못하고서) 원인에서 결과(= 스탈린에 의한 배반)를 도출하고 있다. 무엇이 “스탈린주의”를 가능하게 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트로츠키가 간과한 것은 오류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교묘한 수법인 것이다.
“스탈린은 혁명을 배반했다.” 간단하다. 하지만 너무도 간단해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그럼에도 설명은 간단하다. “스탈린주의”는 진정한 혁명에 대한 파산의 당연한 결과지 그 반대가 아니다. 다시 추론해 보면, 혁명의 파산은 볼셰비즘이 취한 잘못된 과정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다시 말해서, 좌절하고 실패한 혁명의 타락이 스탈린을 이끌어간 것이지, 스탈린이 혁명을 타락시킨 것이 아니다.
이 병마(病魔)에 공격받았을 때, 혁명적 유기체는 대중의 자유로운 행동을 통해 의기양양하게 저항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과 트로츠키 자신이 이끄는 볼셰비키는 대중으로부터 악에 대한 모든 자기방어 수단을 빼앗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병마가 유기체를 침범하여 죽이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노동대중이 “배반”의 준비에도, 그 달성에도 반항하지 않았기에 “배반”은 가능했다. 그리고 대중은 그들의 새 주인에 완전히 복속되어 진정한 혁명의 의미와 모든 주도 정신, 자유로운 행동과 그 반응의 의미를 빠르게 상실했기에 그에 대하여 저항하지 않았다. 그들은 속박되고, 복속되고, 지배당하고 있었기에 모든 저항이 헛되고 쓸모가 없다고 느꼈다. 트로츠키는 대중 사이에서 맹목적인 복종 정신을 깨우고, “상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둔감한 무관심을 되살리는 데 직접 참여했다. 대중이 패배한 채 오랜 시간이 지나갔다. 그 이래로 어떠한 “배반”도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에 비추어, 우리는 독자들이 볼셰비키의 “성과”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기를 권한다.
볼린,《알려지지 않은 혁명 1917~1921》


[1] 단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로마이단 이후 레닌 동상들이 파괴된 사례를 보았을 때, 이 쪽은 아니다. [2] 다만 스탈린주의가 소련 국내 정치에 집중하면서 대외 팽창을 자제하는 폐쇄적인 방침이었긴 했지만 스탈린이 딱히 민족주의자였던건 아니다. 소련이 민족주의적, 러시아적인 성향을 띄게 된건 2차대전에서 독일의 맹공에서 밀리면서 국민들의 집결과 선전을 위한 조치였지 그 전에는 범민족적인 기조를 따르고 있었다. [3] 다만 전시공산주의가 끝나고 경제성장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신경제정책이라는 자본주의화 정책을 밀어붙이면서, 이에 반대하는 이상주의적 공산주의자들을 좌익소아병이라고 까고 탄압한 적은 있다. NEP는 원래부터 현실적 필요에 의한 한시적 정책으로 추진된 것이다. [4] 볼셰비키의 의회 전복 같은 사건은 상황 자체의 맥락 파악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 당시 러시아 농민들의 평균 교육 수준은 정말 말 그대로 처참했는데, 일례로 착한 볼셰비키가 우리에게 토지를 나눠줬는데 나쁜 공산당이 다시 빼앗았다는 생각이 러시아 농민들에게 전반적으로 팽배해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내부에서는 우파와 좌파로 첨예하게 나뉘었고, 집권 사회혁명당 우파들은 기존의 러시아 지주들, 자본가들, 귀족 등 기득권과 단합하는 행보를 보였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혁명당 우파들이 당내 주요직을 거의 다 차지했다는 것. 정작 농민들이 좋아하고 지지하던 건 사회혁명당 좌파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사회혁명당 우파들은 백색테러를 몰래 지원하고 조장하녔다. 결국 이러한 레닌의 의회 전복에는 사회혁명당 좌파들이 대거 동참하였고, 이후 사회혁명당 좌파와 볼셰비키가 대립하기 시작한 것은 브레스트 조약 체결 이후의 이야기다. [5] 기근 시기에 그는 혁명의 발발 가능성을 높여주기 때문에 농민들에게 원조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6] (책 속 주석)M. Gorky, Untimely Thoughts: Essays on Revolution, Culture and the Bolsheviks, 1917-1918 (New Haven, 1995), p. 88. [7] 영국, 프랑스과는 비교 불가능하지만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대부분의 다른 국가는 파시즘 독재를 시행했다. [8] 다만 지역정당을 포함해 정당들이 하도 많이 난립한지라 24%도 적은 득표수는 아니다. 애초에 도시에서는 볼셰비키가 휩쓸었으니.. [9] 다만 제헌의회 해산에 대해 레닌과 공산당이 책임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아나키스트들의 역할도 상당했으며, 의회에 대해 레닌은 의회 선거 따위 필요 있느냐는 당내 극좌파를 논박해 제헌의회의 한시적 필요성을 역설하는 쪽이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헌의회 해산은 보통 아는 것처럼 선거 지니 수틀려서 해산한 것으로 바라보기엔 복잡한 사건이다. [10] 소수파들이 망명 간 다음에는 자금을 대주기도 했다. [11] 1919년 1월에 사망해서 직접적인 저술은 부족하다. [반론] 여기에 대해서는 레닌 자신보다는 레닌의 후계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견해가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제기된 바 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자본의 사회화의 과정으로서 자본의 국유화를 추진했는데, 레닌의 후계자들은 자본의 사회화=자본의 국유화로 생각했고 이 때문에 국가를 절대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는 이오시프 스탈린, 레프 트로츠키, 니콜라이 부하린 등 여러 후계자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13] 야코프 블룸킨이 대표적이다. [14] 레닌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망명간 사이 러시아 제국 국내에서 당을 사실상 이끈 진짜 노동계급 출신의 지도자였다. 노동조합원들로 구성된 ‘노동자 반대파’ 들은 만년 야당 신세를 변변치 못하다가 결국 사라졌다. 실랴프니코프는 연합 정부를 지지했으나, 1933년 공산당에서 제명되었고 1937년 처형당했다. [15] 특히 사회혁명당 수뇌부의 사형을 막은 야코프 스베르들로프나 크론시타트 수병반란의 무력진압에 반대한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등. [16] 다시 말하지만 러시아 혁명의 슬로건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였다. [17] 다만 이는 어폐가 있는것이, 당시 조지아는 다당제 의회민주주의 국가는 맞으나 멘셰비키의 사회민주당이 압도적인 다수를 점해 의회와 내각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소수민족을 탄압하거나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이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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