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1] ~ 1984년 12월 31일 (향년 65세)
1. 개요
대한민국의 관료, 교육인, 언론인, 기업인이다. 본관은 제주(濟州)[2], 호는 봉래(蓬萊)[3], 창씨명은 오야마 조부(大山丈夫)이다. 아내는 강릉 유씨(江陵 劉氏)다.2. 생애
1919년 3월 1일 경기도 경성부(現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지역)에서 아버지 부인식(夫仁植, 1891. 7. 26 ~ ?)[4]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의 1남 5녀 중 외아들, 2대 독자로 태어났다.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4월 경성제국대학 예과(제13회) 문과 을류에 입학하여 1939년 수료한 뒤 법문학부로 진학하여 1941년 12월 법학과 제1류(사법학전공)를 졸업하였다.조부 부기영(夫驥泳, 1869. 1. 26 ~ 1928. 8. 24)은 1915년 12월 13일 경성부 종로경찰서에서 순사보(巡査補)로 근무하던 중 경기도경무부장으로부터 정근증서를 수여받았으며, 1921년 1월 17일에는 경성부 동대문경찰서에서 도순사(道巡査)로 근무하고 있었다. 부친 부인식은 1910년( 순종 4) 3월 11일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었다가 # 경술국치 직후 함안군 서기를 시작으로 경상남도 내무부 도서기, 경상남도 제1부 도서기, 조선총독부 학무국 학무과 속(屬), 부천군수, 김포군수, 경상남도 내무부 지방과 촉탁, 대구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 경상남도 내무부 지방과 촉탁 등 관료 생활을 했다. #
부완혁 또한 경성제국대학 재학 중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졸업과 함께 경상북도 속(屬)을 시작으로, 1944년 11월 경상북도 선산군수, 경산군수를 지내는 등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총독부 관리로 일했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부교수, 이범석 국무총리 비서관, 비서실장 등을 지냈으며, 1952년에 기획처 물동계획국장( 이사) 및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사무국장을 맡았다. 4.19 혁명 후 조선일보 주필을 지냈고, 금융통화위원회 위원에 선임되기도 했다. 이후 신민당 정책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박정희 정부 출범 후 장준하의 뒤를 이어 사상계 편집 및 발행인을 맡아 경영하던 중, 1970년에 박정희 정권의 부패를 비판한 김지하의 오적으로 인해 사상계가 폐간되었다.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맏사위 신선호(申善浩)[5]가 창립한 율산그룹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4년 12월 31일 새벽 1시 37분 서울특별시 강남구 방배동[6] 산30-1번지 소라아파트[7]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65세. 묘소는 서울특별시 중랑구 망우동에 있다.
일제시대 당시 행적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