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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0 03:35:10

부례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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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夫禮郞

신라 중대 효소왕 재위기의 화랑이자 국선.

2. 생애

692년 9월 7일 효소왕의 명으로 국선이 되었는데, 왕가의 자손이라는 언급이나 진골 출신이라는 언급이 없지만, 부친의 관직이 사찬 또는 아찬으로 기록되어 있기에 6두품 이상 출신이다. 그를 따르는 낭도가 휘하에 1천명이나 있었다고 하며, 그 중 안상(安常)[1]이 부례랑과 특히 친했다고 전해진다.

693년 3월에 부례랑은 낭도를 거느리고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군)으로 유람을 떠났는데, 3월 11일 북명(北溟, 원산시 일대로 추정)에서 부례랑이 적적(狄賊)에게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적적의 실체는 몇몇 설이 있는데, 아직 발해가 건국(698년)되기 전이므로 말갈족 혹은 신라 국경선 바깥의 잔존 고구려 세력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혹은 나당전쟁 당시 대양성 전투, 도림성 전투 등 강원도 북부- 함경도 남부 지역도 전장이 되면서 기존 고구려인들이 빠져나가고 공백지가 되다시피한 이 지역에 새로 유입된 말갈 부족들이 이 적적의 실체라는 설도 있다.[2] 아무튼 지휘관 화랑이 납치되자 부례랑을 따르던 낭도들은 어쩔 줄 몰라하던 중에 안상만이 홀로 추격했다.

한편 국선이 납치되었단 소식이 서라벌에도 전해져 효소왕이 당황해하던 찰나 상서로운 구름이 천존고(天尊庫) 창고를 뒤덮었고, 놀라 조사해보니 그 안에 있던 보물 만파식적이 사라져 있었다.
짐이 복이 없어 어제는 국선을 잃었고, 또 오늘은 가야금과 피리까지 잃었단 말인가?

효소왕은 창고를 관리하던 김정고(金貞高) 등 5명을 감옥에 가두고, 4월에 백성들에게 "만파식적을 찾아오는 자에게 1년 조세를 상으로 주겠다"고 말하였다.

한편 부례랑의 부모는 백률사라는 관음보살상 앞에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빌며 저녁마다 기도를 드리고 있었는데, 5월 15일 부례랑과 안상 두 사람이 불상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 사연을 물어보니 부례랑은 납치된 후 대도구라(大都仇羅)라는 자의 집에서 목동이 되어 대오라니(大烏羅尼)라는 들판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한 스님이 나타나 부례랑을 바닷가로 데려갔고, 거기서 안상을 만나 스님은 들고 있던 피리( 만파식적)을 둘로 쪼개 두 사람에게 하나씩 타게 하고, 자신은 거문고를 타고서는 서라벌의 백률사까지 금방 날아왔다는 것이다. 이에 효소왕은 많은 공물을 백률사에 바치고 만파식적을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으로 높여 부르게 했다고 한다. 물론 김정고 등 5명도 풀어주고 위로 차원에서 5급 벼슬도 내려주었다. 또한 효소왕은 부례랑을 대각간, 그의 부친을 태대각간, 모친을 사량부 경정궁주, 그리고 안상을 대통에 봉하였다고 한다. #

화랑이었던 부례랑이 북쪽 국경지대로 유람을 갔다가 북방의 이민족에게 납치당하고 그 낭도 중 안상이 우여곡절 끝에 그를 구출해 돌아왔다는 대략적인 이야기는 사건의 진행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써 있을 정도로 꽤 상세한 탓에, 설화적인 부분만 제외하면 사실일 가능성이 높지만, 삼국유사의 일화답게 이야기에 설화적 색채가 짙은 편이다. 그 외에 고구려 멸망과 발해 건국 중간기의 잔여 세력의 존재가 나타나있기도 하고, 낭도가 1천 명이나 됐는데 안상 외에는 화랑을 구하러 제대로 뛰어든 자가 없이 다들 겁을 먹었다는 점에서,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가 시작되면서 화랑도 역시 상당히 문약해진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다만 화랑 자체가 과거에는 전문 무사집단으로 해석하기도 했지만 현대에는 청·소년층 집단교육 풍습이 국가기관화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는데, 통일전쟁 당시는 워낙에 나라의 국방이 위태롭다보니까 이런 청소년들도 '우리도 싸우겠다'고 황산벌 전투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학도병처럼 특별히 나선 것이지 원래 본업이 전쟁인 신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통일전쟁이 끝나고 20년 가까이 지나 평화로운 시대밖에 겪어보지 못한 대부분 일반 청소년에 불과한 낭도들이 겁을 먹고 이민족과의 싸움에 목숨 걸고 나서지 못한 것은 사실 당연한 것이다.


[1] 신라사선 중 한 명으로도 여겨진다. [2] 이에 따르면 이들이 이후 잠깐 발해의 간접 지배권에 들었다가 신라 후기에 '흑수국'으로 자립, 후삼국시대에 호족 윤선을 따른 '흑수번중'을 거쳐서 고려시대 함경도 여진족으로 이어지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