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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01 11:50:12

벨버즈드 전투

1. 개요2. 배경3. 양측의 전력
3.1. 세르비아군3.2. 불가리아군
4. 전투 경과5. 결과

1. 개요

서기 1330년 7월 28일 불가리아 제2제국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의 불가리아군과 세르비아 왕국의 군주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의 세르비아군이 벨바즈드 마을 인근(오늘날 불가리아 큐스텐딜주의 주도 큐스텐딜)에서 맞붙은 전투. 세르비아군이 완승을 거뒀다.

2. 배경

서기 13세기경, 동로마 제국은 황제들의 거듭된 실정과 끊임없는 전쟁, 빗발치는 내란, 인구 감소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나날이 쇠약해졌고, 발칸 반도에서의 패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었다. 이 공백을 틈타 발칸 반도에서 강력한 두 국가가 등장하니, 바로 불가리아 제2제국 세르비아 왕국이었다. 불가리아 제2제국은 1185년 터르노보의 지방 귀족이었던 페터르 4세 이반 아센 1세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차르로 즉위한 뒤, 동로마 제국이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멸망한 틈을 타 세력을 급격히 키웠고, 급기야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한 라틴 제국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트라키야의 동로마인을 대거 학살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불가리아 제2제국이 이렇듯 발칸 반도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을 무렵,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의 강한 영향력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초기엔 헝가리의 봉신이었다가, 헝가리가 내란에 휩싸인 틈을 타 독립했지만 이웃의 강대국인 불가리아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기 1230년 세르비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이피로스 전제군주국 데스포티스 테오도로스 콤니노스 두카스 클로코트니차 전투에서 불가리아군에게 대패하여 포로로 붙잡힌 뒤 폐위되었고, 1233년 불가리아의 차르 이반 아센 2세의 딸 벨로슬라바와 결혼한 스테판 블라디슬라프 스테판 라도슬라프를 몰아내고 세르비아의 새 군주로 즉위했다. 이후 블라디슬라프는 불가리아의 간섭을 받아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다가 1241년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세르비아 전역이 초토화되면서 민심이 이반되는 바람에 1243년 동생 스테판 우로시 1세에게 폐위당했다.

하지만 세르비아는 형을 폐위하고 즉위한 스테판 우로시 1세 대부터 강성해졌다. 스테판 우로시 1세는 남쪽의 마케도니아를 병합하고 북쪽의 포두나블레를 공략했으며, 베네치아 공화국이 종주권을 지니고 있던 달마티아의 두브로브니크를 수 차례 공격한 끝에 1268년 매년 자기에게 세금을 바치는 조건하에 자치권을 허용했다. 스테판 우로시 1세가 말년에 헝가리의 지원을 받은 아들 스테판 드라구틴에게 폐위된 뒤, 세르비아는 한동안 분열되었지만 1323년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가 재통합하였다. 이 시기에 불가리아는 봉건제의 강화로 생계가 갈수록 피폐해진 농민들이 이바일로의 난에 대거 가담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고, 세르비아는 이 틈을 타 세력을 급속도로 키워서 스테판 우로시 3세 시기에 불가리아와 동등한 위치까지 성장했다.

세르비아가 이렇듯 부쩍 성장하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2세는 그들과 제휴하여 제국의 안정을 꾀하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딸을 스테판 우로시 3세의 아내로 삼게 했으며, 제국을 침범하지 않는 조건하에 연공금을 매년 바쳤다. 이후 1321년부터 팔레올로고스 내전이 발발하자, 세르비아는 안드로니코스 2세를 지원했고, 불가리아는 안드로니코스 2세의 손자이자 반란 주동자 안드로니코스 3세를 지원했다. 1328년 안드로니코스 3세가 조부를 꺾고 새 황제로 즉위한 후, 동로마 제국은 자연히 세르비아를 적대했다. 안드로니코스 3세는 내전 기간 동안 마케도니아 북부를 장악한 세르비아를 무찌르기로 마음 먹고, 불가리아의 차르 미하일 아센 3세에게 동맹을 제안했다.

당시 미하일 아센 3세는 스테판 우로시 3세의 여동생과 결혼했지만, 동로마 제국과 힘을 합쳐 세르비아를 쳐서 영역을 확장하는 데 관심을 품었다. 그는 곧 아내와 이혼하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여동생과 결혼하였고, 1327년 5월 13일 반 세르비아 연합을 체결했다. 1329년 재차 안드로니코스 3세와 만난 미하일 아센 3세는 세르비아를 협공하여 영토를 나눠먹기로 합의했다. 그는 세르비아가 이전에 정복했던 불가리아 북서부와 남서부를 탈환하길 원했고, 안드로니코스 3세는 마케도니아 북부를 탈환하길 원했다. 이리하여 1330년 초여름, 동로마 제국군이 마케도니아 북부를 침공했다. 그러나 안드로니코스 3세는 세르비아의 영토 깊숙이 진군하지 않았고, 국경 지대의 몇몇 요새를 장악하는 데 만족했다. 그는 불가리아가 행동에 나서기 전에는 위험을 무릅쓸 생각이 없었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사전에 합의한 대로 1330년 7월 19일 수도 터르노보에서 출진하여 비딘으로 진격해 타타르와 왈라키아 용병들과 합세한 뒤, 남쪽으로 진군하여 세르비아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젬린 마을에 이르렀다. 한편, 세르비아 국왕 스테판 우로시 3세는 도브리치코 폴제(현재 세르비아 야블라니차주의 레스코바츠시 인근)에 주둔하여 적군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그는 곧 동로마 제국군이 국경 지대에서 얼쩡거릴 뿐이고, 불가리아군이 남쪽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그는 불가리아군부터 상대하기로 하고, 전군을 이끌고 카메네카 강 서안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과 조우했을 때, 세르비아군의 선봉 만이 간신히 현장에 도착한 상태였다. 이에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시간을 끌기 위해 협상을 제의한 끝에 잠깐 동안 휴전을 맺기로 했다. 불가리아군은 적을 얕잡아보고 있었기에 스테판이 시간을 질질 끄는 걸 방치했다. 또한 장병들은 보급난에 시달렸기 때문에 농촌 약탈에 매진할 뿐 군법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아서, 군대의 기강이 형편없어졌다. 이리하여 7월 28일 새벽까지 시간을 끄는 데 성공한 스테판은 전 병력이 집결하자 벨버즈드 마을 근방에 진을 치고 있는 불가리아군을 새벽에 기습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발칸 반도의 패권을 둘러싼 전투인 벨버즈드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세르비아군

3.2. 불가리아군

4. 전투 경과

7월 28일 새벽, 스테판 우로시 3세 데찬스키는 휴전 약속만 믿고 방심하고 있던 불가리아군 진영으로 몰래 접근했다. 이윽고 적진이 눈앞에 이르자, 아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이끄는 중기병 2,000명이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당시 불가리아군은 여러 곳에 흩어져서 기습에 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군의 갑작스런 기습을 막아낼 도리가 없었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은 불가리아 제국군 깃발을 탈취하는 등 종횡무진하였고, 불가리아군은 이리저리 도망치다가 중기병대에게 살육당했다.

외지에 있던 불가리아군은 본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모였으나, 워낙 다급한 상황인 터라 전열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 이때 스테판 우로시 3세가 이끄는 본대가 그들을 덮쳤고, 불가리아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사방으로 도주했다. 미하일 아센 3세는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세르비아군에 맞서려 했지만, 병사들이 말을 듣지 않자 자기도 도주하다가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낙마하였고, 세르비아군에게 체포된 뒤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7월 31일 낙마로 인한 중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1]

세르비아군은 여세를 몰아 불가리아 잔여 병력이 모인 코냐브스카 산을 향해 진격했지만, 미하일 아센 3세의 동생인 베나르가 병사들을 성공적으로 수습하여 진입로를 차단했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후 불가리아 보야르들이 라도미르 마을 근처에서 스테판 우로시 3세와 만나 평화를 요구했다. 그들은 스테판 우로시 3세의 조카인 이반 스테판[2]이 차기 불가리아 차르로 즉위하게 하겠다고 밝혔고, 니시를 세르비아에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이 조건을 받아들여 불가리아군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걸 막지 않았다. 이리하여 벨버즈드 전투는 세르비아의 압승으로 끝났다.

5. 결과

벨버즈드 전투는 세르비아군의 압승이었다. 불가리아군은 별다른 저항도 못해보고 붕괴되었고, 미하일 아센 3세는 전장에서 죽임을 당했다. 동로마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는 전투 소식을 접하자 즉시 세르비아에 대한 전쟁을 중단하기로 하고, 점령지에 일부 병력만 남겨두고 귀환했다. 이후 그는 목표를 불가리아로 변경하고, 흑해의 불가리아 도시와 마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는 동로마 제국의 이같은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세르비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도 못했다.

세르비아는 벨버즈드 전투의 결과를 잘 활용하여 발칸 반도의 새 패자로 거듭났다. 그들은 동로마 제국에게 빼앗겼던 영역을 탈환한 뒤, 기세를 이어가 마케도니아로 밀고 내려갔다. 하지만 스테판 우로시 3세는 더 이상 동로마 제국과 싸우는 걸 원치 않았고, 안드로니코스 3세와 화해한 후 본국으로 귀환했다. 이에 귀족들은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서 부와 명예를 확보할 기회를 잃어버렸다고 여기고 국왕에게 반감을 품고, 아들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을 꼬드겼다. 아들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게 된 스테판 우로시 3세는 아들의 근거지인 제타로 군대를 보내 스카다르를 약탈했다. 이후 부자는 보야나 강을 두고 대치하다가 극적으로 화해했다.

그러나 3개월 뒤 스테판 우로시 3세가 소환령을 내리자, 스테판 우로슈 4세 두샨은 부친이 자기를 불러다 죽일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판단하고, 자기가 선수를 치기로 결심해 소규모 기병대를 이끌고 부친이 머물고 있던 네로디믈례를 습격했다. 스테판 우로시 3세는 가까스로 도피했으나, 추격대가 따라붙으면서 페트리치에서 사로잡힌 뒤 투옥되었다. 이리하여 1331년 9월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이 새 국왕으로 즉위하였고, 세르비아 왕국은 그의 치세에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한다.


[1] 또다른 기록에는 스테판 두샨이 포로로 잡힌 미하일 아센 3세를 끌어내 손수 쳐죽였다고 하고, 또다른 기록에는 낙마한 직후 세르비아군의 창에 찔려 죽었다고 한다. [2] 미하일 아센 3세와 스테판 우로슈 3세의 여동생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