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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6-30 17:39:00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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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제국 정치인, 외교관. 카를 6세, 마리아 테레지아,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4대를 모시며 오스트리아의 외교 정책을 주도했다.

2. 일생

2.1. 초기 경력

카우니츠는 1711년 2월 2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본래 보헤미아 왕국 출신 귀족이었다가 모라비아로 이주했고(벤첼이란 이름부터가 원래 독일어 이름이 아니라 서슬라브 쪽 이름이다), 아버지는 제3대 카우니츠 백작 막시밀리안 울리히이며, 카우니츠는 19명의 자식들 중 차남이었다. 아버지는 카우니츠를 성직자로 삼고 싶어했고, 그는 아버지의 의향에 따라 1724년 뮌스터에서 성당 참사회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형이 죽자, 그는 형을 대신해 빈, 라이프치히, 레이던에서 법과 외교학 교육을 받았고 영국 이탈리아 반도를 여행했다.

1735년, 카우니츠는 신성 로마 제국 자문회의 의원이 되었고 1736년 5월 6일 마리아 에르네스틴 폰 스테헨베르크와 결혼했으며, 1739년에는 라티스본의 독일 영방 회의에서 제국 관료 중 하나로 배속했다.그러던 1740년 카를 6세가 붕어하고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새 군주로 즉위한 뒤 주변 국가들이 이를 빌미로 신성 로마 제국에 속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인 오스트리아 대공국 보헤미아 왕국을 침략할 야욕을 드러내면서, 카우니츠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진가를 발휘할 무대에 들어선다.

2.2.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1741년 3월, 카우니츠는 토스카나 대공국 피렌체, 교황령 로마,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를 연이어 방문하며 이탈리아 반도에서 친오스트리아 여론을 형성하는 비밀 임무를 시작했다. 그 후 1742년 8월부터 1744년까지 토리노에서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고 1744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총독인 로트링겐 공자 카를 알렉산더[1]와 함께 브뤼셀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1746년 2월 20일 브뤼셀은 3주간의 공성전 끝에 프랑스군 원수 모리스 드 삭스에게 항복했고, 카우니츠는 도시를 떠나 안트베르펜, 아헨으로 피신해야 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곤경을 연이어 호소한 끝에 6월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1748년, 카우니츠는 오스트리아의 대표로서 엑스라샤펠 조약에 서명했다. 당시 프랑스는 브뤼셀을 포함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는 특유의 언변과 끈기를 발휘해 프랑스 대표를 설득한 끝에 프랑스가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에게 돌려주게 했다. 또한 그는 프로이센 왕국 슐레지엔을 점유하는 걸 인정하고 스페인에게 파르마 공국을 양도하는 대가로 "여성에게도 왕위 계승이 허용된다"는 국사조칙이 모든 국가에게 승인되게 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 그는 이러한 성과로 오스트리아의 명 외교관으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내준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 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향에 따라 프로이센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

2.3. 동맹의 역전 7년 전쟁

1749년,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문관들을 모아놓고 날로 강성해지는 프로이센을 막기 위해 어떤 외교 정책을 실시해야 할 지를 문의했다. 그녀의 남편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란츠 1세를 비롯한 대다수 자문관들은 오랜 동맹인 영국과 네덜란드와의 결속을 굳건히 다져야 한다고 진언했다. 그러나 카우니츠는 정반대로 신교도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가 역시 신교 국가인 프로이센에 대항하는 동맹에 전력을 다하지 않을 것이며, 이는 지난 전쟁에서도 여실히 드러났으니 더이상 동맹을 유지할 까닭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랜 앙숙인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하고 그들과 손을 잡아 프로이센을 협공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이 문제에 관해 전권을 맡기기로 했다.

1750년 9월 프랑스 대사로 파견된 카우니츠는 1752년까지 대사 직을 역임하면서 프랑스와 동맹 관계를 체결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다. 1753년 오스트리아로 소환된 그는 제국 국무장관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프란츠 1세는 이에 반대했으나 아내의 뜻이 확고하자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이후 카우니츠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 퐁파두르 부인을 설득했고, 마침내 프랑스는 1756년 5월 1일 오스트리아와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해 방어 동맹을 결성했다.

이후 1757년 2월 2일,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프로이센에 대한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고 그해 5월에 프랑스와 재협상을 벌인 끝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게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넘겨주는 대가로 공격 동맹을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여기에 스웨덴 역시 1757년 3월 21일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함께 독일의 자유를 보장하는 군사 행동을 벌이기로 합의하면서. 프로이센은 사방이 적인 상황에 직면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대왕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당시 적대 관계였던 영국, 네덜란드, 헤센카셀과 연합하기로 하면서 동맹의 역전이 실현되었다.

이후 벌어진 7년 전쟁에서, 슐레지엔을 되찾고 프로이센을 결정적으로 굴복시키려 했던 카우니츠의 야망은 실현되는 듯했다. 전쟁 초반에 로스바흐 전투, 로이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프리드리히 대왕은 이후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의 맹공에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급기야 쿠네르스도르프 전투에서 사상 최악의 대패를 당한 뒤 독약을 품 속에 넣고 다닐 정도로 절망했으며,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은 러시아, 오스트리아 경기병대에게 수차례나 점령되었다. 이제 조금만 더 밀어붙인다면 프로이센은 패망하고 슐레지엔은 다시 오스트리아의 품에 들어갈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카우니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우선 프랑스는 로스바흐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대패한 뒤에도 매년 독일 서부 일대를 침공했지만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에게 가로막혀 크레펠트 전투, 민덴 전투, 바르부르크 전투, 빌링하우젠 전투, 빌헴스타흘 전투 등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패해 프로이센에 별다른 위협을 주지 못했다. 또한 러시아는 본국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진 전선에 투입된 군대의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몇개월 동안 전투를 치른 뒤에 철수해야만 했고. 그나마도 황태자 표트르의 노골적인 친프로이센 성향에 눈치를 보는 장성들이 많았다.

한편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 다운 백작 레오폴트 요제프는 프리드리히 대왕을 상대로 대단히 잘 싸웠지만 사람됨이 신중하다 못해 소극적인 성품이어서 과감한 공세를 감행하는 걸 기피하고 반드시 러시아 제국군과 합세해 합동 공세를 펼치는 걸 희망했다. 카우니츠는 이런 그를 답답하게 여겨 과감한 공세를 추구하는 라우돈 남작 에른스트 기데온을 총사령관으로 삼을 것을 촉구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다운 백작의 공로를 봐서 그럴 수는 없다며 거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라우돈 남작이 리그니츠 전투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이끄는 프로이센군에게 습격당해 고전하고 있을 때 전장 근처까지 이른 다운 백작이 이미 늦었다며 철수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결국 전투에서 패한 라우돈 남작은 자신이 수많은 병사들을 희생시켜가며 적과 맞서 싸웠거늘 8만이나 되는 대군을 이끌고 전장에 도착해놓고 철수해버린 것에 분노해 다운 백작을 성토했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 내부에서는 다운 백작을 지지하는 세력과 라우돈 남작을 지지하는 세력간의 알력 다툼이 벌어졌다.

그래도 1761년 프로이센군이 약화되면서 수비에 급급하는 모습을 보였고, 러시아 제국군이 콜베르크 요새를 함락시킨 후 1762년 봄에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프로이센을 협공하기로 결의하면서 전쟁은 오스트리아가 원하는 방향으로 종결되는 듯했다. 그런데 1762년 1월 새 황제가 된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에게 러시아군이 점령했던 영토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돌려주고 전쟁 배상금도 물리지 않는 내용의 평화 협약을 체결하고 스웨덴을 전쟁에서 이탈시킨 뒤 2만에 달하는 병력을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보내주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에 카우니츠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1763년 2월 프로이센과 후베르투스부르크 평화 협약을 체결해 프로이센이 슐레지엔을 점유하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2.4. 프랑스와의 결혼 동맹

7년 전쟁이 끝난 뒤, 카우니츠는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오스트리아 해군 창설에 몰두했다. 또한 그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더욱 굳건히 다지기 위해 부르봉 가문과의 대대적인 결혼 동맹을 진행하기로 했다. 사실 당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체결한 후 7년 전쟁을 벌였으나 영국에게 북미 식민지를 모조리 상실했을 뿐 얻은 건 아무것도 없는 것에 매우 실망해 결혼 동맹을 예정대로 진행하는 걸 망설였다. 하지만 카우니츠는 필사적으로 프랑스 정부를 설득했고, 결국 루이 15세는 예정대로 결혼 동맹을 진행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의 차남 레오폴트 왕자 스페인 보르본 왕조의 마리아 루도비카와 결혼했고, 1768년에는 마리아 카롤리나 공주가 스페인 보르본 왕조 나폴리- 시칠리아 왕국 페르디난도 4세[2]와 결혼했으며, 1769년 마리아 아말리아 공주가 스페인 부르봉 왕조 파르마 공국의 페르디난도 1세와 결혼했고, 1770년에는 도팽 루이 오귀스트 마리아 안토니아 공주와 결혼했다.

2.5. 요제프 2세 시기

카우니츠는 1764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성향이 비슷했다. 그는 교육과 예술을 후원하는 정책을 추진한 요제프 2세를 열렬히 지지했고 브뤼셀 왕립 아카데미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세금 면제와 영지를 전통적으로 소유하는 수도원들을 국가에 귀속시키는 정책에도 찬성했다. 이렇듯 그는 요제프 2세의 계몽주의 성향에 지지를 표했고 마리아 테레지아는 반대했지만 요제프 2세는 찬성한 폴란드 분할 문제에 대해서 요제프 2세를 지지했다.

그러나 문제는 요제프 2세의 개혁 정책이 카우니츠의 기대를 지나치게 벗어날 정도로 급진적이었다는 데 있었다. 카우니츠는 바이에른 계승 전쟁을 벌이면서까지 지나친 확장 정책을 추구하려는 요제프 2세를 저지하려 안간힘을 썼고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제프 2세간의 마찰을 조정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다행히 바이에른 왕위 계승 전쟁은 큰 유혈 충돌 없이 마무리 되었고, 카우니츠는 1779년 테센 조약을 주도해 바이에른의 인피어텔 지방을 오스트리아 대공국으로 귀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카우니츠는 1788년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벌이려드는 요제프 2세를 만류하려 했지만, 요제프 2세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러시아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공격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은 뜻밖에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요제프 2세는 전쟁이 한창이던 1790년 2월 20일에 붕어했다.

2.6. 몰락

카우니츠는 요제프 2세가 붕어한 뒤 새 군주가 된 레오폴트 2세 치하에서도 재상을 맡았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급기야 1792년 9월 루이 16세가 처형되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감옥에 수감되어 버리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의 권력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결국 카우니츠는 재상 직에서 물러나 정계를 은퇴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94년 6월 27일, 그는 빈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83세. 카우니츠가 사망하고 1년 뒤 그의 외손녀와 결혼한 사람이 바로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이다.
[1]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츠 슈테판의 친동생. [2] 나폴리 왕국 국왕으로서 페르디난도 4세이며, 시칠리아 왕국 국왕으로서는 피르디난두 2세이다. 1816년 양시칠리아 왕국 초대 국왕 페르디난도 1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