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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 Landkreis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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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딜 Lahn-Dill ( 베츨라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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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행정 구역| 헤센의 현 |
베츨라어 Wetzl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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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장 | |||||
베츨라어의 위치 | |||||
행정 | |||||
국가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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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대 | (UTC+1/+2) | ||||
주 | 헤센 | ||||
현 | 기센 현 | ||||
군 | 란딜 군 | ||||
인문환경 | |||||
면적 | 75.65km² | ||||
인구 | 54,625명(2023년 12월) | ||||
인구밀도 | 722명/km² | ||||
홈페이지 | |||||
정치 | |||||
시장 | 만프레드 바그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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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헤센 주에 있는 도시이다. 란강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란강과 함께 란딜 군을 이루는 딜(Dill)강이 시내를 가로지르고 있다.철도시설로 인해 2차대전때 파괴되었던 이웃 대학도시 기센과는 달리 올드시티가 건재하다. 올드시티의 중앙에는 베츨라어 교회(Wetzlarer Dom)가 있는데, 증축을 하다가 도시가 파산하는 바람에 증축이 중단되어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이 외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히로인인 샤를로테의 생가가 있다.
Wetzlar는 어말의 r는 '어'로 표기하는 표기법에 따라 '베츨라어'로 표기해야 하나, 실제 발음은 맨 뒤에 '어'가 전혀 붙지 않는다. 실제로는 '벳츨라-'에 가깝다 (앞의 ㅂ는 이때 영어의 V발음을 내고, 맨 뒤에 r발음을 굴리는지는 지역에 따라 다르다). 이 때문에 인터넷에는 '베츨라어', '베츨라르', '베츨라', '벳츨라' 등 여러 표기가 혼재하고 있다.
2. 역사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증거가 있으며, 유럽 철기시대인 라텐(La Tène)문화때 이곳에서 철을 캐낸 흔적이 있다. 베츨라어(Wetzlar)라는 이름에 붙은 -lar 는 이곳이 켈트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무역로로 쓰이던 란과 딜 강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쾰른과 프랑크푸르트를 잇는 무역로의 중간에 있었던 베츨라어는 중세 상업도시로 발전하여 12세기 말 경 신성 로마 제국의 자유도시의 지위를 얻어 해당 지역에서 프랑크푸르트 다음으로 큰 도시가 되었다. 하지만 13세기때 일어난 화재와 14세기때의 페스트로 피해를 입었고, 이웃 도시의 솔름스(Solms) 공과의 불화로 전쟁도 치루며 기세가 약화되었다. 재정난을 타파하고자 종신정기금 증서를 발행했다가 이를 갚지 못해 동업조합인(Zunft)들의 봉기를 겪고, 결국 나사우 가문의 보호를 받게 되어 제국 직속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돈을 갚지 못해 제국추방령의 위협을 겪고, 한때 6,000명의 인구로 해당 지역의 프랑크푸르트 다음가는 대도시였던 베츨라어는 인구가 2,000으로 줄며 파산의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다만 명분상으로는 아직도 자유도시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9년 전쟁의 여파로 슈파이어에 소재하던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대법원이 파괴되자, 1698년 제국대법원이 이곳에 위치하게 되어 관련 관리들이 이주해 오고 이들의 생활을 위한 인프라가 발달하며 다시금 인구수가 오르기 시작하였다. 이때 법학을 배운 괴테가 이곳에서 일을 하기 위해 채류했다가 법관의 둘째딸인 샤를로테와 사랑에 빠져, 이를 모티브로 하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나폴레옹 전쟁 후 빈 회의로 프로이센 왕국령 라인란트에 속했고, 19 ~ 20세기의 늦은 산업발전을 거치며 지금의 도시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