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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nhard | ||
생몰년도 | 797년경 | |
파비아 | ||
사망지 | 818년 4월 17일 (향년 21세) | |
아헨 | ||
재위 기간 | 812년 ~ 81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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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롤루스 왕조 이탈리아 왕국의 국왕. 피핀 카를로만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지만 루도비쿠스 1세와 내전을 치르다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다.2. 생애
797년경 피핀 카를로만과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여인 사이의 아들로 출생했다. 그가 정식 결혼을 통해 태어났는지, 여러 첩 중 하나에게서 태어난 사생아인지 여부는 기록이 부족해서 불확실하다. 810년 7월 8일 아버지가 베네치아 원정을 치른 직후 갑작스럽게 사망했을 때, 그는 풀다 수도원에 있었다. 할아버지 카롤루스 대제는 그가 2년 더 수도원에 있게 하다가 812년에 이탈리아로 보내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하게 했다. 다만 실질적인 권력은 카롤루스 대제가 행사했다.814년 1월 28일에 카롤루스 대제가 사망한 뒤, 대제의 자식들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도비쿠스 1세가 제관을 물려받았다. 베른하르트와 루도비쿠스 1세는 초기에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816년 11월 루도비쿠스 1세는 공식 문서에서 베른하르트를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dilectus filius noster)"이라고 지칭했다. 그러나 817년 아헨 의회에서 제국의 승계를 규정하기 위해 반포한 제국 상속령 문제로 인해 양자간의 사이가 급격히 악화되었다.
루도비쿠스 1세는 이 조항에서 자신이 대관식을 치른 만큼 다른 형제들의 자손들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했으며, 장남 로타리우스 1세를 명목상 제국 전체의 지배자로 삼고 영토의 중앙 지역을 물려주고, 둘째 아들 피핀에게 아키텐, 툴루즈, 셉티마니아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주고 왕의 칭호를 하사했으며, 셋째아들 루트비히 2세에게 바이에른, 카린티아, 보헤미아 등지에 대한 주권을 행사할 권한을 주고 왕의 칭호를 하사했다. 그러나 베른하르트에 대해서는 한 마디로 언급하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다른 제국의 영토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황제가 적절한 인물을 앉힐 것이라고만 밝혔다.
베른하르트는 루도비쿠스 1세가 자신을 배제하려 한다고 여기고 밀라노 주교 안셀름 1세, 오를레앙의 주교 테오둘포, 시종장 라니에리, 에지디오 백작 등과 함께 반란을 계획했다. 그는 알프스산맥의 서쪽 주요 고개를 봉쇄해 제국군의 총공세를 막아보려 했다. 베로나 주교 라톨도와 브레시아 백작에 의해 이 정보를 전해들은 루도비쿠스 1세는 왕국의 모든 지역에서 군대를 차출해 살롱에 집결시켰다. 베른하르트는 루도비쿠스 1세에게 수많은 병력이 모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의를 급격히 상실하고 충실한 추종자들과 함께 삼촌을 만나기 위해 샬롱으로 가서 평화 협상을 해보려 했다.
그러나 루도비쿠스 1세는 곧바로 베른하르트와 추종자들을 체포한 뒤 818년 봄 아헨에서 재판에 회부했다. 성직자들은 직분을 박탈당하고 추방되거나 수도원으로 보내졌고, 베른하르트와 다른 평신도 공범자들은 사형을 선고받았다. 루도비쿠스 1세는 짐짓 자비를 베풀어주겠다며 사형을 실명형으로 감면했다. 그는 시뻘겋게 달군 단검으로 안구가 짓눌러져 실명된 후 이틀간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818년 4월 17일에 사망했다. 그 후 이탈리아 왕국은 루도비쿠스 1세의 수중에 들어갔다가 장남 로타리우스 1세에게 분배되었다. 822년, 루도비쿠스 1세는 아팅기 수도원에서 자신의 조카를 처참하게 죽인 것을 참회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복형제와 자손들을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맹세했고, 그때까지 투옥 중이던 베른하르트의 추종자들을 석방했다.
그는 생전에 알려지지 않은 여인과의 사이에서 피핀을 낳았다. 피핀은 840년 무렵 세느 강 북쪽으로 이주했고, 북부 페로네와 파리 인근 지역의 백작을 역임했다. 피핀의 후손들은 훗날 베르망두아 백작 가문을 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