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전반기
독일 제국 시대에 바덴 공국의 프폴자임(Pforzheim)에서 태어난 베르너 슈트라이프는 그가 8살이 되던 1918년에 제국이 멸망하고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를 맞게 된다. 아비투어(고교졸업증)를 따고 성년이 되자 은행원으로 얼마간 일하다가 공화국 육군에 입대해 제5보병사단에서 복무하던 중 나치가 정권을 잡고 제3제국이 세워지자 곧바로 루프트바페에 투신했다. 1937년까지 정찰부대에서 관측수로 근무하던 그는 1938년부터는 리히토펜 항공단으로 불리던 JG 132(제132전투항공단)의 제2비행단을 첫 임지로 맞게 되었다. 이 부대는 곧 제1구축전투항공단(ZG1)으로 재편성되면서 소위였던 그는 2차 대전 초기부터 구축전투기 Bf 110의 조종간을 잡고 싸웠다. 슈트라이프가 처음 거둔 전과는 1940년 5월 10일 주간 임무에서 영국 공군의 쌍발 폭격기 브리스톨 블렌헤임을 격추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그가 주간에 세운 유일한 전과이기도 했는데, 이 공로로 2급 철십자장이 주어졌다.2. 야간전투기
1940년 5월부터 독일 공군에 야간전투기 부대가 편성되기 시작되자 구축전투기를 몰고 있던 베르너 슈트라이프도 자연스럽게 제1야간전투항공단으로 소속을 옮겼고, 두 달 후인 7월 20일에는 암스트롱 휘트워스 휘틀리 폭격기를 격추하여 야간 1호 격추 기록을 세웠다. 그는 10월에 루르 공업지대를 목표로 삼고 밤에만 날아오는 영국 폭격기들을 차단하기 위해서 네덜란드의 펠로에 전진 기지를 마련한 제1야간전투항공단(NJG 1) 소속의 비행중대장이 되었다. 10월 6일에는 8번째 격추로 중위로 계급이 오르는 동시에 기사철십자장을 수여받고 이듬해인 1941년 5월까지 26대의 폭격기를 격추한 그는 계속해서 영국의 중폭격기들을 제물로 삼고 있었다. 1943년 2월 26일에 42번째 격추로 소령으로 진급한 그의 목에는 곡엽기사철십자장이 걸리게 된다.같은 해 6월 11일부터 12일까지 심야에 하인켈 He 219의 시제기를 몰고 출격한 그는 겨우 30분간의 공중전에서 무려 5대의 아브로 랭커스터 중폭격기를 격추시켰지만, 기지로 착륙할 때 이 신예기의 비행 특성을 미처 익히지 못한 실수와, 전투기 자체의 사소한 결함으로 인해 기체가 못쓰게 될 정도로 대파되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슈트라이프와 후방 승무원 피셔 상사 둘 다 재빨리 불타는 기체에서 뛰어내려 운좋게 가벼운 부상만을 입고 살아남았다. 어쨌든 이 전공으로 인해 그는 항공전 역사상 처음으로 일일 야간전투기 에이스가 되는 명예를 안았다.
3. 지휘관으로 지상근무
그 후로도 계속 출격에 나선 그는 1944년 3월 11일에 66대째 격추로 히틀러가 직접 그에게 곡엽검 기사철십자장을 걸어주며 악수를 청했다. 3월 23일에 슈트라이프는 야간전투기 부대의 총감으로 임명되어 더 이상의 전투 임무는 나서지 못하게 되었고, 대령 계급으로 요셉 캄후버 장군을 보좌하면서 지휘 통제 임무에만 전념하다가 패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공식 격추기록은 66기였는데, 앞서 밝힌대로 그 중 65기가 야간에 폭격기 상대로 달성한 엄청난 기록이었다.4. 서독 공군 경력
종전 후 민간인으로 돌아간 그는 잡화점을 하며 생계를 꾸리다가 1956년에 서독 공군이 재건되자 곧바로 입대 신청서를 제출했고, 일선에서 F-84를 몰다가 란츠베르크 비행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공군 감찰관 보직과 함께 준장으로 진급한 베르너 슈트라이프는 1966년에 퇴역한 후 1986년 6월 15일에 사망해 뮌헨에 묻혔다.제2차 세계 대전 전투기 에이스 일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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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56b94> ▲ 142~177위 | ||||
순위 | 이름 | 국적 | 격추 수 | 비고 | |
180위 | 빌헬름 헤르게트 | 독일 | 73대 | ||
안톤 린트너 | 독일 | ||||
게르하르트 미칼스키 | 독일 | ||||
오토 슐츠 | 독일 | ||||
184위 | 후쿠모토 시게오 | 일본 | 72대 | ||
빌헬름 밍크 | 독일 | ||||
카를 하인츠 슈넬 | 독일 | ||||
188위 | 한스 푸스 | 독일 | 71대 | ||
알프레트 헤크만 | 독일 | ||||
귄터 셸 | 독일 | ||||
192위 | 스기타 쇼이치[1] | 일본 | 70대 | ||
카를-하인츠 호프만 | 독일 | ||||
헤르만-프리드리히 요핀 | 독일 | ||||
하인츠 랑게 | 독일 | ||||
루디 린츠 | 독일 | ||||
에밀 오메르트 | 독일 | ||||
198위 | 루츠-빌헬름 부르크하르트 | 독일 | 69대 | ||
아르민 쾰러 | 독일 | ||||
에른스트 바이스만 | 독일 | ||||
오이겐-루트비히 츠바이가르트 | 독일 | ||||
202위 | 쿠르트 돔바허 | 독일 | 68대 | ||
발터 회크너 | 독일 | ||||
헤르베르트 후페르츠 | 독일 | ||||
하인리히 융 | 독일 | ||||
헤르베르트 카이저 | 독일 | ||||
리하르트 레플라 | 독일 | ||||
프리츠 로지히카이트 | 독일 | ||||
귄터 프라이헤어 폰 말트찬 | 독일 | ||||
한스 슈트렐로 | 독일 | ||||
에른스트 쥐스 | 독일 | ||||
오토 탕게 | 독일 | ||||
213위 | 프리츠 딩거 | 독일 | 67대 | ||
헤르베르트 핀다이젠 | 독일 | ||||
카를 문츠 | 독일 | ||||
하인리히 퓔그라베 | 독일 | ||||
카를 하멀 | 독일 | ||||
라인홀트 호프만 | 독일 | ||||
에르보 그라프 폰 카게네크 | 독일 | ||||
프란츠 쉬스 | 독일 | ||||
프란츠 슈바이거 | 독일 | ||||
후베르트 슈트라슬 | 독일 | 하루에 15대를 격추 | |||
223위 | 에르빈 플라이크 | 독일 | 66대 | ||
베르너 슈트라이프 | 독일 | 야간 65대 격추 | |||
225위 | 베르톨트 그라스무크 | 독일 | 65대 | ||
카를 켐프 | 독일 | ||||
만프레트 모이러 | 독일 | ||||
228위 | 이반 코제두브 | 소련 | 66대 | 연합군 1위, 소련 1위 | |
▼ 229~304위 |
[1]
단독격투 70대, 협동격추 40대로 일각에선 비공인 격추수까지 포함하면 120대에 이를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343해군항공대에 합류하여 칸노 나오시의 301비행대에서 시덴카이를 타고 활약했으며 45년 4월 1일 기지를 기습한 헬켓들에게 대응하여 이륙하던 중 피격당해 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