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몰년도 미상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의 의원.2. 생애
서주 팽성국 출신으로 오보와 함께 화타를 추종해 의술을 배워 화타의 제자가 되었고 침술에 뛰어났다고 한다. 나 그 당시에 의술을 하는 사람들은 등과 가슴 사이에 숨어있는 것에는 침을 놓을 수 없으면서 만약 침을 놓다고 해도 4분을 넘지 못한다고 했지만 번아는 등에 침 1, 2촌을 찌르면서 큰 구멍이나 가슴 부위에는 침을 5, 6촌씩 놓아서 치료했다고 한다.화타에게 일찍이 사람에게 유익한 약을 먹일 수 있도록 얘기했는데, 화타에게서 옻나무 잎과 황지를 이용한 칠엽청점산을 전수받았다. 화타에게서 칠엽청점산은 인체 내의 기생충을 죽이면서 오장을 이롭게 하고 신체를 가볍게 하며, 두 발이 하얗게 되지 않다고 해 이 약을 복용해서 100여살까지 살았다고 한다. 옻나무 잎은 도처에 있고, 청점은 풍현, 패현, 팽성현과 조가현 일대에 서식한다.
화타별전에 따르면 청점(青黏)이라는 것은 지절(地節)이라고 불리며, 또는 황지(黃芝)라고도 불리는데, 다섯가지 장기를 다스리고, 또한 정기를 복돋워준다. 본래 어떤 사람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 신선이 그것을 먹는 것을 보고는 화타에게 이야기했다. 화타도 몸이 건강해지자, 이 이야기를 범아에게 이야기를 했고, 범아는 비법으로 여겼다. 사람들이 번아가 장수하고 기력이 강성한 것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마침내 번아가 먹은 것을 찾아내고자 하였는데 취한 것으로 말미암아 잘못 누설하였다. 방법이 한번 베풀어지자 많은 사람이 복용하였고 모두 큰 효험이 있었다.
조비의 전론에서 극검등의 일을 논하면서 이르길
영천의 극검은 벽곡에 능하여 복령(伏苓:버섯의 일종)을 먹었다. 감릉의 감시 또한 기를 운용하는 것을 잘했는데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습이 어렸다. 여강의
좌자는 보도(補導:도가의 양생술)의 기술을 알았는데 더불어 군리가 되었다. 당초에 극검이 이르렀을 때 시장에 복령을 내다팔았는데 가격이 몇배나 폭등하였다. 의랑 안평사람 이담은 그 벽곡술을 배워 복령을 먹고 차가운 물을 마셨는데 이질에 걸려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이후 감시가 이르자 사람들 중에 그에게 수리처럼 보고 늑대처럼 돌아보는 동작과 호흡을 통한 양생술을 배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모좨주 홍농사람 동분은 이를 지나치게 하다가 기가 막혀 통하지 않아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마침내 깨어났다. 좌자가 이르자 또한 앞다퉈 그 보도의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는데 사인(寺人:환관) 엄준이 오가면서 배웠으나 환관들은 진실로 이 기술을 배워봐야 쓸모가 없었다. 사람들이 소리를 쫓는 것이 마침내 이 정도에 이르렀다.
광화연간에 북해사람 왕화평 또한 도술을 좋아하고 스스로 이로써 신선이 될 수 있다 여겼다. 제남사람 손옹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섬겨 수종하여 경사에 이르렀다. 왕화평이 죽는데 이르러 손옹은 그를 동도에 장사지내고 있는 책 백여권과 약 수 포대를 모두 장송에 사용했다. 이후 제자 하영이 그 시해(尸解: 도사의 영혼이 신선이 되고 신체만 세상에 남는 것)를 말했고 손옹은 지금도 그 보서와 선약을 취하지 못했음을 한스러워 한다. 유향은 홍보(鴻寶:일종의 연금술을 기록한 책)의 설에 미혹되고 군유는 자정(子政:유향의 字)의 말에 현혹되었으니 고금을 통틀어 멍청하고 황당한 사람이 어찌 한 사람 뿐이겠는가!
광화연간에 북해사람 왕화평 또한 도술을 좋아하고 스스로 이로써 신선이 될 수 있다 여겼다. 제남사람 손옹이 어렸을 때부터 그를 섬겨 수종하여 경사에 이르렀다. 왕화평이 죽는데 이르러 손옹은 그를 동도에 장사지내고 있는 책 백여권과 약 수 포대를 모두 장송에 사용했다. 이후 제자 하영이 그 시해(尸解: 도사의 영혼이 신선이 되고 신체만 세상에 남는 것)를 말했고 손옹은 지금도 그 보서와 선약을 취하지 못했음을 한스러워 한다. 유향은 홍보(鴻寶:일종의 연금술을 기록한 책)의 설에 미혹되고 군유는 자정(子政:유향의 字)의 말에 현혹되었으니 고금을 통틀어 멍청하고 황당한 사람이 어찌 한 사람 뿐이겠는가!
조식이 변도론을 지어 이르길
세상의 방사는 우리 왕이 모두 모두 불러모았으니 감릉에는 감시가 있고 여강에는 좌자가 있으며 양성에는 극검이 있었다. 감시는 기운을 움직이는 도인술에 능했으며 좌자는 방중술에 밝았고 극검은 벽곡에 뛰어났는데 모두 300세라고 하였다. 마침내 이들을 위국에 모은 이유는 진실로 이들의 무리가 간교한 이들과 합하여 군중을 속이고 요사하고 가식적인 술수를 부려 백성들을 미혹시킬까 해서이니 어찌 다시 영주에서 신선을 보고 해도에서 안기(安期:봉래산에 산다고 알려진 전설속의 신선)를 구하며 금로를 풀고 구름수레를 밟으며 육기를 버리고 비룡을 아름답게 여기겠는가? (금로, 육기는 황제가 타는 수레와 그 수레를 끄는 6마라의 말로서 속세의 부귀를 상징함) 우리 왕과 태자,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이를 비웃고 믿지 않는다. 그런즉 감시 등은 높여주는 것은 한도가 있고 받드는 것이 불과 일개 군리에 불과하며 공로가 없는데 상이 더해지지 않는 것과 바다위의 섬을 얻어 유람하는 것이 어렵고 인수를 얻어 차는 것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서는 끝내 감히 허탄한 말을 올리거나 상도에서 벗어나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내가 일찍이 시험삼아 극검으로 하여금 100일 동안 곡기를 끊게 하고는 더불어 생활을 같이하였는데 그가 돌아다니거나 기거하는 것이 태연자약하였다. 무릇 사람은 7일 동안 먹지 않으면 죽는데 극검이 곧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런즉 반드시 수명을 늘릴 수 없다하여도 가히 질병을 치료하고 기근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
좌자는 방중술을 잘 수련하여 천수를 누릴 수 있었는데 뜻이 있어 지극히 정밀하지 못하다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감시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용모가 어렸는데 이로부터 나머지 술사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감시는 말이 많고 실질이 적으며 괴언이 파다하게 있었다. 내가 일찍이 좌우를 물리고 홀로 그와 이야기하면서 그의 행동에관해 물었는데 온화한 얼굴과 아름다운 말로 유인하자 감시가 나에게 말하길 "제 본래 스승은 성이 한씨이고 자가 세웅인데 일찍이 저와 더불어 남해에서 금을 만들려고 전후로 수차례 금을 수 만근이나 바다에 던졌습니다."라 하였다. 또 말하길 "대개 양(梁)나라 시기 서역의 이민족이 향계(香罽), 요대(腰帶), 할옥도(割玉刀)를 헌상해 왔는데 그때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잉어 5촌짜리 한 쌍을 잡아서 그 중 하나에는 약을 물려서 함께 끓는 기름에 던져 놓으면 약을 먹은 것은 꼬리를 흔들고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헤엄치는 것이 마치 연못 속에 있는것과 같은데 다른 한 마리는 이미 익어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당시에 묻길 "말한 바를 대체로 시험해볼 수 있는가?"라 하니 대답하길 "이 약은 여기서 만 리를 넘고 변경을 나가야 하는데 제가 직접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으나 사뭇 다 싣기가 어려워 크게 기괴한 것만 대충 들은 것이다. 감시가 만약 진시황, 한무제를 만났다면 곧 다시 서시, 난대의 무리가 됐을 것이다.
좌자는 방중술을 잘 수련하여 천수를 누릴 수 있었는데 뜻이 있어 지극히 정밀하지 못하다면 행할 수 없는 것이다. 감시는 나이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용모가 어렸는데 이로부터 나머지 술사들이 모두 그에게 귀의하였다. 그러나 감시는 말이 많고 실질이 적으며 괴언이 파다하게 있었다. 내가 일찍이 좌우를 물리고 홀로 그와 이야기하면서 그의 행동에관해 물었는데 온화한 얼굴과 아름다운 말로 유인하자 감시가 나에게 말하길 "제 본래 스승은 성이 한씨이고 자가 세웅인데 일찍이 저와 더불어 남해에서 금을 만들려고 전후로 수차례 금을 수 만근이나 바다에 던졌습니다."라 하였다. 또 말하길 "대개 양(梁)나라 시기 서역의 이민족이 향계(香罽), 요대(腰帶), 할옥도(割玉刀)를 헌상해 왔는데 그때 가지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잉어 5촌짜리 한 쌍을 잡아서 그 중 하나에는 약을 물려서 함께 끓는 기름에 던져 놓으면 약을 먹은 것은 꼬리를 흔들고 아가미를 뻐끔거리며 올라갔다 내려갔다 헤엄치는 것이 마치 연못 속에 있는것과 같은데 다른 한 마리는 이미 익어 먹을 수 있다."고 하였다. 내가 당시에 묻길 "말한 바를 대체로 시험해볼 수 있는가?"라 하니 대답하길 "이 약은 여기서 만 리를 넘고 변경을 나가야 하는데 제가 직접가지 않으면 얻을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말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으나 사뭇 다 싣기가 어려워 크게 기괴한 것만 대충 들은 것이다. 감시가 만약 진시황, 한무제를 만났다면 곧 다시 서시, 난대의 무리가 됐을 것이다.
일설에 따르면 화타가 살해될 때 화타의 수급을 팽성으로 옮겨 안장했다는 얘기가 있으며, 저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창천항로에서는 형주 공방전 때 조조가 사신으로 온 제갈근을 접견하다가 쓰러지자 신하가 번아님을 불러오라는 것으로 언급된다.
3. 관련 자료
- 위서 화타전
- 의부전록 의술명류열전
- 의설
4. 창작물에서
소설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조충, 조표, 조림 등이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 등 다섯 가지 동물의 형태와 자세를 흉내낸 체조인 오금희를 따라하다가 조조가 화를 냈는데, 조충이 약탕기를 바라보면서 역경을 인용해 아버님(조조)가 승상에 오르는 날이라 온 집안이 원만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길한 기운이 더 들어올 것이라면서 중재하려고 했다.그러자 번아는 솔직한 성격이라 조충의 말이 잘못된 점이 있다고 지적하다가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면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