퉁구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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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
다수 거주지 | 만주 | 청더 | 차부차얼 시보 자치현 | 러시아 극동 | 시베리아 | |
해당 지리적 인종 | 동아시아인 | 시베리아 원주민 | |
언어 및 문화·사상 | ||
언어 | 퉁구스어족 | |
사상 | 만주 민족주의 | |
신화 | 만주 신화 | 샤머니즘 | }}}}}}}}} |
1. 개요
6세기 말갈 분포도 |
2. 상세
말갈족은 크게 세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속말말갈 그리고 이 백산말갈처럼 예맥계 비중이 높은 말갈 부족과, 흑수말갈로 대표되는 퉁구스족 비중이 높은 말갈 그리고 퉁구스계 비중이 높았는지 예맥계 비중이 높았는지 확답할 수 없는 나머지 말갈 7부 중 4개 부족이다. 다만 확실히 고구려에게 거의 동화되지 않고 독자성을 지킨 퉁구스계 말갈은 흑수말갈 뿐이며[1], 나머지 여섯 말갈 부족은 고구려가 확고하게 지배하고 있었고 속말말갈 일부 부족 외엔 고구려에게 끝까지 충성을 바쳤다.게다가 여섯 말갈 부족 중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은 예맥계 비중이 확실히 높았고 백산말갈은 아예 고고학 계통으로 봐도 처음부터 끝까지 북옥저 계통이었으므로 '말갈'전체를 퉁쳐서 예맥 아닌 퉁구스계로만 보는 견해는 다시 생각함이 마땅하다.
백산말갈의 시원은 그리고 어디까지나 부여인들과 그 뿌리가 같은 북옥저인들인 올가 문화인들이며[2], 관구검 침공 후 큰 타격을 받은 이후 말갈인들이 침투하여 약간 수렵채집민적 요소는 강해졌을 망정, 고고학적 문화의 근간은 여전히 올가 문화(=예맥 북옥저 계통)의 강력한 연속성이 확인되는데 이는 설령 관구검 침공 이래로 고구려의 동북한 통제력이 십수 년 동안 마비 상태가 된 상황에서도 오히려 이 일대로 들어온 말갈'족'이 예맥화되어버렸을 강력한 개연성을 시사한다.
이는 토기를 비롯한 각종 생활 도구는 여전히 올가문화의 연속선상에 있고, 고구려가 인위적으로 부여인들을 백산말갈인들이 사는 지역에 사민하고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거치면서 고구려 문화와도 상당히 상호작용을 주고 받은 게 발견되었음에서 다시 입증된다.
그러므로 백산말갈은 주로 북옥저 계통 예맥인, 부여인으로 구성된 부류며, 관구검 침공 이후로 읍루인들이 들어와서 그전 농사 기반 문화보다 수렵채집민적 요소가 강해졌을 망정 이 읍루인들조차 전부 문화적으로 동화시켜버렸을 정도로 고구려 정체성이 강했던 부류임이 분명하다. 옛 부여인의 후손인 대조영이 소속된 속말말갈조차 워낙에 퉁구스계 말갈들의 인구 비중이 높아 퉁구스계와 대조영이 속한 예맥계가 서로 교류는 할망정 완전히 통합되지 않고 잡거했던 속말말갈 지역과는 완전히 궤가 다른 것이다.[3][4]
즉 백산말갈은, 종족 계보 자체가 예맥과는 거리가 먼데다 정체성도 고구려화 정도로 봤을 때 고구려인이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심스러운 흑수말갈과는 완전히 경우와 종류가 다를 뿐더러 오히려 속말말갈보다도 고구려 및 예맥계와의 일체성이 강하다는 것이다.
3.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에 동화된 백산말갈인들은 속말말갈을 비롯한 고구려인들과 함께 대거 당나라 영주 근처로 끌려갔다가, 이후 대조영의 고구려부흥운동 당시 속말말갈을 비롯한 고구려인들과 함께 고구려의 옛 땅으로 탈주하게 된다. 다만 끝까지 당나라에 대한 철저항전을 외치며 옛 부여의 고토로 들어간 속말말갈과는 달리, 백산말갈 중 다수는 요동 방면에서 그들과 헤어진 후 고구려인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고 신라의 영향력 또한 건재하면서도 자치력은 유지할 수 있는 패서 지역, 즉 오늘날의 황해도로 돌아가는 걸 선택하게 된다.[5]향후 이들은 황해도 일대에 남아 있는 옛 고구려인들과 융화한 후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서 고구려인으로서 정체성을 유지하여, 통일신라-후삼국시대의 패서 호족을 이루게 된다.[6] 한편 백산말갈의 또 다른 일부는 고구려에게 망하기 전에 원래 거주하던 곳으로 귀환하기도 하였다.[7]
4. 연구
- 강인욱, 고고자료로 본 백산말갈과 고구려의 책성, 동북아역사논총 61호 발간
- 임금표, 2022.3.2. 개제된 박사학위 논문 보장왕의 고구려 부흥운동과 영주말갈
- 신형식, 통일신라사
[1]
여진족이 되어
금나라를 건국하고 훗날에는
만주족으로
청나라를 세워 중국 최후의 왕조로 군림하게 된다.
[2]
고구려 핵심지 사람들이 이들과 처음에 어느 정도 이질적이었던 건, 초기 고구려가 대다수 피지배층은 고조선인, 소수 지배층은 부여인들로 구성되어 오히려 주민 구성상으로는 부여보다 고조선과 훨씬 연속성이 강했던 데 있다.
[3]
여말선초 함경도가 바로 이런 상황이었다. 이성계 혹은 이자춘 때부터 강력한 리더십을 자랑하며 여진인들을 조선화시켜가는 흐름을 만들어 세종대왕 때까지 박차를 가해서 함경도가 조선화된 것이지, 전주 이씨와 조선 건국이란 변수가 없었다면 과연 함경도가 한반도라는 범주로 들어올 수 있었을지는 미지수다.
[4]
고로 이 결론을 부정하고자 한다면 자의적으로 소수학설과 주류학설을 근거 없이 규정할 것이 아니라, 해당 고고학적 성과를 부정할 다른 고고학적 결론이 실린 논문이나 저서를 근거로 들어야 할 것이다.
[5]
한편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백산말갈의 일부는 영주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이정기 일가의 제나라 건국에 참여한 정황도 보인다.
[6]
이는 유독 패서 일대에 백산이란 호칭이 들어가는 지명이 많은 점, 이정기의 제나라가 지배하던 영주 일대에도 백산이란 호칭이 들어간 지명이 많은 점에서 유력하게 추측된다.
[7]
연변대학출판사 1993년 발간 발해사연구 제1집 연변지구 발해시기 옛 성터에 대한 고찰 중 발췌: 발해국이 성립된후 연변지구의 성터는 급속하게 증가된것을 볼 수 있다. 발해국이 성립됨에 따라 영주 지방에서 근 30년 이상 거주했던 원 백산말갈인들이 귀향했고 고구려인들도 천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