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박명줄(朴明茁) |
이명 | 박중조(朴重朝) |
생몰 | 1903년 10월 11일 ~ ? |
출생지 |
경상북도 대구군 달서면 내당동 (현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 |
사망지 | 미상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1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2. 생애
박명줄은 1903년 10월 11일 경상북도 대구군 달서면(현 대구광역시 서구) 내당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대구관립고등보통학교 2학년까지 재학하다 중퇴했고, 이후 담배공장 노동자, 변호사 사무원, 사법대서인 등 여러 직업에서 종사했다. 1925년 10월 대구청년연맹 발기회의 준비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1927년 7월 24일 대구지역 청년단체가 연합하여 대구청년동맹(大邱靑年同盟)이 조직될 때 그 집행위원 및 조사부원(調査部員)으로 선정되어 활동했다. 그리고 그해 8월 7일 대구청년동맹 주최로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 등 11개 단체가 모여 일본군 제80연대 소속 육군대위 세카와 마사오(賴川正雄)의 만행사건에 대한 대책을 논의할 때, 조사위원으로서 사건의 진상을 보고하고 격문 배포와 시민대회 개최 등을 주도하는 실행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후 실행위원으로서 제80연대장을 면담하여 시민대회에 보고하는 면담위원으로도 선정되어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신간회(新幹會) 대구지회가 결성된 후 9월부터 서기로 활동했다.1928년 2월 20일 의열단원 김지섭이 치바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이후 2월 27일 김지섭의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군 풍복면 오미동에 유해가 안장될 때, 박명줄은 대표로 안동까지 시신을 운구했다. 그해 3월 경상북도 김천의 금릉학원이 폐쇄되자, 그는 대구청년동맹에서 반대성명서를 발표하고 폐쇄명령 철회를 요구했으며 도 당국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5월 13일에는 대구청년동맹 정기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다가, 7월 4일 사임한 후 검사부장(檢査部長) 등으로 활동했다. 1929년 12월 15일 류연술(柳淵述)등과 함께 대구경찰서(大邱警察署)에 검속되었다가, 29일 풀려났다. 이후 1929년 11월에 발발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그는 12월에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 문학봉(文學奉) 등을 통해 대구지역에서도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운동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 일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1930년 1월 12일 문학봉 등 학생들이 검거되었고, 박명줄도 14일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 3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대구형무소에서 구류 29일 처분을 받고 2월 19일에 풀려났다.
박명줄은 신간회 대구지회 상무위원으로 활동했고, 1930년 4월 19일에 개최된 임시대회에서는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해 3월 중순경 신간회 대구지회 간부 정윤(鄭潤)과 함께 또 다시 검거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당시 종로경찰서에서 취조 중이던 차재정·임윤재(任允宰) 등의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그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심문받다가 3월 27일 불기소처분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그해 7월, 박명줄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에서 허호일(許鎬逸)·박인환(朴寅煥) 등의 도움으로 조선일보 의성지국을 경영하며 농민운동에 투신했다. 또한 1932년 7월부터는 동아일보 안계지국장을 맡기도 했다. 안계로 이주한 그는 먼저 그 일대의 청년 박근주(朴根疇) 등을 동지로 규합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안계면과 단북면(丹北面) 내 각 마을의 농민 집회소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친목회 성격의 ‘농민계(農民契)’를 조직하고 300여 명의 회원을 모집했다. 1931년에는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문자보급운동을 계기로 문자보급단체를 13개소에 조직했다.
박명줄은 비합법적·혁명적 농민조합을 조직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성군 내 각 지역 농민들과의 회합에서는 소작농에 대한 지주의 불합리한 착취, 농민의 각성과 단결 촉구, 농민조합 결성의 필요성 등을 역설하였다. 예컨대 1931년 2월 상순경 자신이 거주하고 있던 안계면 토매동(土梅洞)을 중심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안계면에서 안계농민조합(安溪農民組合)을 결성하였다. 당시 안계면의 흥산계(興産契)의 단원 수만 339명에 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인근의 단북면 등으로 조직을 확대하여 5개 면에 조직을 꾸려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의 일환으로 군(郡) 단위의 의성농민조합(義誠農民組合)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그러던 중 흥산계(興産契)가 의성경찰서의 탄압을 받자, 그는 이에 맞서 흥산계 탄압 반대시위를 주도했다. 계농민조합원들은 ‘농민조합 만세!’라고 쓴 깃발 수십 개를 만들어 안계면과 의성읍을 오가며 탄압 반대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의성독서회(義誠讀書會) 사건’에서 단서를 얻은 일본 경찰은 1933년 10월 4일부터 대대적인 검거를 개시하여 900여 명을 체포해 취조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박명줄은 12월 17일 안계농민조합 간부 5명과 함께 검찰로 송치되었고, 27일 다른 간부들은 모두 석방되었지만 그만 예심에 회부되어 1934년 11월 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에 불복하여 공소를 제기했지만 1935년 3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이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1936년 7월 23일 형 집행 만기로 출옥했고, 대구에서 신문사 기자 등으로 활동했다. 8.15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에 참여했으며, 1946년에 개최된 민주주의 민족전선 결성대회 때 경상북도 대표로 참석했다. 그러나 우익 단체와 미군정의 탄압이 심해지자 잠적했고, 이후로 그가 언제, 어느 곳에서 사망했는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8년 박명줄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