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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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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차재정
車載貞
파일:차재정.png
이명 차창수(車昌壽), 차륜(車輪)
출생 1903년 12월 29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황금정[1]
사망 1963년 1월 31일 (향년 59세)
충청남도 천안시
본관 연안 차씨
가족 아버지 차남철, 어머니 채씨
형 차재원, 차재형
남동생 차재순
여동생 차재구
학력 강경보통학교 (졸업)
인천상업학교 (졸업)
정칙영어학교 (졸업)
주요
경력
전진회 집행위원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조선청년총동맹 상무위원
조선학생전위동맹 책임비서관
조선공산당 대표상무행정위원
대동민우회 이사
배영동지회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위원장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
비고 친일파 708인 명단 등재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 활동2.2. 독립운동2.3. 친일 행적2.4. 해방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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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 공산주의자, 친일반민족행위자.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2.1. 초기 활동

1903년 12월 29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읍 황금정에서 부친 차남철(車南徹)과 모친 채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에겐 첫째형 차재원(車載元), 둘째형 차재형(車載亨), 남동생 차재순(車載淳), 누이동생 차재구(車載九)가 있었다. 그는 14살 때 강경보통학교(江景普通學校)를 졸업했고, 이후엔 인천상업학교(仁川商業學校)에 재학하여 1917년 3월에 졸업했다. 1918년 3월엔 남원은행원으로 발탁되었고 그 해 8월 전주지점으로 옮겼다가 1919년 10월 경성 본점으로 옮겼고, 다시 안주 지점으로 옮겼다가 1922년에 사직했다. 이후엔 일본으로 유학가서 1922년 6월 도쿄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에 입학했으며, 졸업 후에는 명치대학(明治大學)에서 1년간 공부했다.

1923년 7월 조선에 돌아온 그는 사립학교 교원이 되었고, 1924년 7월 팔천대생명(八千代生命) 경성지점에 입사했으며, 후에 명치생명(明治生命) 경성지점으로 옮겼다. 1925년 김현제(金賢濟)가 경영하던 조선여자학원(朝鮮女子學院) 교사가 되었다. 일제 정보 기록에 따르면, 차재정은 1925년 4월 김현제의 남편 강택진(姜宅鎭)이 협박 사건으로 투옥된 후에는 김현제와 불륜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2.2. 독립운동

그러다가 1925년 사회주의 청년 단체인 서울청년회에 가입한 후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10월 전진회(前進會)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1926년 4월 조선사회단체중앙협의회 창립준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7년 조선청년총동맹 중앙집행위원 겸 상무위원을 역임했으며 1929년 4월 조선학생전위동맹 책임비서관으로 선임되었다. 1929년 12월 강석원, 장석천, 장재성 등과 함께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서울에도 확대하기 위한 거사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항일 궐기를 촉진하는 격문 2만장을 비밀리에 인쇄해 전국에 발송했다.
파일:차재정2.png
1930년 12월 13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그는 모진 고문을 받은 뒤 1931년 4월 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35년 8월 비밀 결사 조직 혐의로 다시 체포되었다가 옥중에서 사상 전향 선언을 발표한 뒤 석방되었다.

2.3. 친일 행적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그는 1936년 내선일체에 의한 동아주의(東亞主義)를 표방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이사를 역임했으며, 1938년 대동민우회 간부들과 함께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을 예방했다. 또한 그는 잡지 <삼천리>에 <좌익 제우(諸友)들에게 고함-「自然(자연)의 길」>이란 제목의 글을 발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펼치기 · 접기 ]
>내가 공산주의 민족주의 及 기타 일체의 반국가적 사상 계열에 대하야 배격해야 되겠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표명한 지도 발서 3년이 되여 온다.
그것을 표명할 당시 얼마 동안은 좌익 청년들의 脅迫狀도 날러 드러왔고 옛날의 좌익 동지였든 우인들의 간곡한 충고도 있었고 더러는 나를 面罵하는 용감 기특한 투사도 있었다. 그것도 잠시에 불과했었고 于今 2년 반 여를 통하야 반대다운 반대에도 봉착하지 못했었다. 깃것 있었대야 지극히 저열한 개인에 대한 讒誣中傷이 고작이었다. 그런 것으로 보아 조선내 좌익의 殘滓란 허잘 것 없는 무기력한 것이라고 하겠으나 나는 그렇게도 보지 안는다. 그들의 지속하는 침묵과 관망에는 정당한 방면이 있다는 것을 긍정하며 그들에게 일편의 존경의 念까지도 가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실상을 말하자면 나로서는 좀 더 강력한 반대를 기대하였었으며 도전을 바라고 있었다.

그들의 나에게 준 바 협박 중상, 唾罵, 충고 등등 가운데서 특히 대표적인 것을 기록해 보면 첫재로 협박 중상 부류에 속한 것으로는 판에 박은 듯한 저급한 것이다. 계급의 裏切リモノ, 민족의 裏切リモノ, 背敎者, 제국주의의 스파이, 제국주의자에게 매수된 자 죽인다. 등등 한아도 경청할 만한 것도 없고 소위 부족 掛齒의 類에 불과하나 여기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조선의 과거 공산주의자 及 그들의 판 가운데에 이 레벨에서 지나치는 부류가 과연 幾許나 될지 나는 의심한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공산주의가 한 종교 형식으로써 드러백혀 있는 것이다. 村夫 村女의 愚氓들에게 耶蘇敎나 불교의 비판 眼이 없어 그저 맹신 맹종에 긋치는 것과 같이 공산주의 운동에 있어서도 의식이 분명치 못한 대중 층에는 그것이 종교나 다름없을 것도 당연한 일이며 운동 그 자체가 그것을 요구하는 점도 있을 것이다.
나는 과거에 있어서나 공산주의의 신도는 아니었다. 나는 공산주의를 조선 민중의 향상과 발전의 길로 인식하고서 그것을 실천코저 노력하였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목적과 배치되는 한 공산주의는 발서 무용한 것이다. 과거 10년 동안의 조선에 있어서서의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적 及 실천적 결과는 완전히 파산하고 말었다. 이것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他日의 기회가 있으려니와 간단히 주요한 멫 가지를 擧示하자면 첫재 조선의 민족적 개성과 역사 전통 及 現下 실정은 공산주의의 실천을 전면적으로 용납하지 안는 것, 둘재로 콤민테룬의 국제 푸로레타리아에 대한 죄악적 지도는 조선 민중 운동의 정당한 발달과 향상을 파괴하는 것 셋재로 과거 4반세기 동안의 조선 민중의 고투의 존귀한 체험과 東亞史 발전의 신 방향은 主客 양 조건의 완전히 조선 민중에게 「자연의 길」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야 준 것 등이다.
그러나 如上의 멫 가지는 원래로 맹종적인 공산 교도의 인식할 바 아니다. 그들은 조선 민중의 이익과 발전보담 오즉 공산주의의 活字에 충실하기를 원하는 輩이며 민중의 복리보담은 관념의 法悅에 독선적 만족에 포만하려는 자들이다. 과거 조선 공산주의 진영에는 이러한 수준의 인물들이 비단 대중층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당의 지도층 인문에서도 차저볼 수 있었든 것이다. 조선의 민중은 과학의 법의를 입은 經文의 活字를 요구치 안는다. 생생한 현실의 완전한 개선을 요구한다.

둘재로는 怒髮 沖天해서 唾罵하는 부류이다. 이들의 直情에는 실로 정에 늣기워진다. 었던 老 지사는 여러 가지로 나를 面罵한 나머지 「내 비록 먹을 것은 없지만 먹을 것이 없으면 내가 어떻게든지 멕여주마... 나는 네가 그럴 줄이야-」하며 거짓 없는 揮淚를 하는 것을 보았다. 이와 동형의 옛날 동지도 상당히 많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내가 간 뒤에 조용히 혼자서 비판해다고」하고는 갈렸었다.
이들은 대개가 실천과 경험을 주로 하는 10년 20년의 역사를 가진 옛날의 투사들이다. 이들은 오즉 절조로써 모든 것을 비판하는 척도를 삼는 좀 頑冥한 편에 속한 사람들이나 나는 이들에게 은근히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공산주의에 대한 정당한 비판을 가지고 현실에 대한 명확한 분석을 가진다면 그들을 국가주의에의 과감한 전향을 할 수 있는 直情 勁行의 인물들이다.

셋재로 충고파이다. 이들은 가히 더부러 의론해 볼만한 부류이다. 첫재 그들은 우리의 주장하는 국가주의의 조선에 있어서의 여부와 국가주의에 의한 조선 민중의 장래의 운명을 먼저 고려하려는 태도를 가진다. 그들의 그러한 태도는 가장 당연한 태도이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가 일본 국내의 현실 분석에 있어서 자유주의적 요소의 힘과 공산주의 세력의 역량을 과대 평가하는 데서 또는 소련과 중국 쏘벹 세력에 대한 同樣의 지나친 평가에서 우리들의 국가주의를 반대한다. 그들의 이러한 비판이 失當한 점은 첫재 그들의 비판이 근본적이 아니고 너무나 정책적인 것과 또 보담 더 중요한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없는 것과 콤민테룬에 대한 역시 근본적인 비판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국내의 대부분의 민중은 강력적인 대륙 정책를 이해치 못하며 그리고 2, 26 사건과 같은 국내 혁신을 반대한다고 그래서 일본에 팟쇼정치가 수립되리라는 것은 예상할 수 없다는 논거에서 조선에서 국가주의 운동을 전개한다는 것은 至難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들의 그러한 인식이 정당치 안타는 것은 그 후의 모든 정세의 변화에 의하야 여실히 증명된 것이나 2년 전에 나에게 그러한 논거에서 국가주의 운동의 전개를 至難한 일이라 하야 그 중지를 권하든 그들 공산주의 진영의 留守 부대도 이제는 현저하게 그 인식이 정정되였을 줄 아다.
이상에서 나는 2년 數ケ월 전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국가주의 운동의 신 전개에 대한 반대의 경향을 타진 보고하였거니와 이것은 당시의 조선 좌익 운동의 동향을 측정할 수 있는 척도도 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인식이 잘못되였었다는 점을 드러 공격만을 삼고저 하지는 안는다. 그들이 나 개인에 대하야 여하한 박해를 가한다 하드래도 그것은 원래로 문제가 아니다. 내가 우리 몇몇 동지들로 더부러 조선에서 반공 운동을 전개하고 국가주의 운동을 이르키고저 한 동기는 좌익 운동의 결함과 조선의 특이성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의연히 좌익 진영을 고수하고저 하는 좌익 요소들 가운데도 우리와 동일한 인식 과정에 도달된 때에는 반드시 우리들의 국가주의 진영에로 기입하리라고 생각한다. 왜 그러냐? 진실한 민중의 지도자는 한 사상 체계에 충실하기 위하야 민중의 운명을 그르치지 안을 양심과 의무가 잇기 때문이다.
국가주의는 공산주의 배격의 조건 아래서만 성립된다. 그러므로 과거의 공산주의자로서 국가주의에의 이행은 그다지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것은 종래의 그들이 생활하고 잇든 세계에 대하야 절연하고 더 나아가 총구를 드리대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장 약한 인테리에게는 원래로 요구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국가주의 진영의 진실로 精銳로운 지도자는 그들 중에서만 구해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문제될 것은 昨今의 소위 「전향」이다.
이 전향이란 표현은 원래는 지극히 단순한 의미로서 좌익 운동에서 탈각하야 선량한 국민이 된다는 것을 지칭하는 것 같이 해석 되였었으나 나의 생각하는 바로는 국가의 법률이 그들 공산주의자에 요구하는 전향은 그것만으로 족할는지 모르나 그들 공산주의의 영향하에 노여있든 민중에게 대하야 그렇게 독선적인 전향행위만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심한 轉向型에 이르러서 官警에게 대하야 깍드시 전향을 약속하고도 외부 대중에게 대해서는 의연히 모호한 좌익적 口吩을 弄하는지 극히 비겁한 前 좌익들도 있다.
그런 型의 前 좌익들이 금후 여하히 발전될 것인가는 매우 흥미 있는 거리이나, 그러한 태도는 퍽 유감스러운 일이다. 민중지도의 책무가 있는 자는 전향 후라도 그들의 대중에게는 동일하게 책무가 남아있다. 자기의 한 일에 대해서는 자기가 책임을 저야 한다, 는 간단한 이유다. 그러나 현명한 대중은 그들의 지도자가 전향하기 전에 발서 앞질러 자기의 갈 길을 택해서 견실한 보조를 내 드듸고 있다. 그것은 곳 조선 민중의 개성과 전통 及 현실이 지시하는 「자연의 길」이다.

昨今 수년 來의 특히 사변 이후의 조선 민심의 동향을 살펴보건댄 그것은 한 새로운 民衆 理想의 樞軸을 형성하려는 노력의 표징이라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심 경향이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며 일시적 인공 소산이 아니라는 것은 그들의 바치는 노력의 가지가지에 엉뚱할 진지성이 숨어있고 그 개개의 노력 자체가 이믜 한 힘을 구성하여 있기 때문이다.
조선 민중이 사변을 통하야 현저하여진 일본 국민으로서의 자각적 표현과 亞細亞 우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이번 사변에 밧치는 모든 의무는 비록 자연생장적인 일면으로 엿볼 수 있다 하겠으나 그러케 됨에는 여러 자지로 과거 생활에서 축적된 정치적 사상적 자각이 크게 힘입어있다고 보겠다.
즉 今般 사변을 통하야 본 조선 민심동향의 특징은 그것이 놀날만치 현실 귀의적인 것이라는 것과 동시에 일본을 사랑한다는 점이다. 今般 사변을 통하야 볼 수 있는 조선 민심의 현실 귀의의 특징은 그들의 과거 4 반세기 동안의 이상 추구의 생활이 결정해 준 자각이다. 그들이 일본을 사랑하는 대단한 표현을 하게된 것도 동일한 경로이다.
과거의 그들의 생활이 無理想한 凡凡한 생활이었든들 금일과 같은 이러한 비약적 현상은 기대키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은 XX운동에서 공산주의 운동에서 실로 존귀한 체험을 싼 것이다. 이상 추구의 공허를 만끽하는 일면 역사와 현실이 결정하야 주는 자기의 개성을 충분히 자각한 것이다. 이러한 자각이 있었음으로만 비로소 과거에 대한 하등의 顧念 집착도 없이 솔직 대담한 국민 행진을 감행할 수 있었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진심으로 일본의 번영을 바라고 일본의 興隆을 염원하게 되는 것은 「밝아오는 새 일본」을 동경의 표적으로 삼은 까닭이다. 今次 사변에 나타나는 신 일본의 포부와 이상이 그들로 하야금 과거를 一擲케하였든 것이다. 2, 26 사건 이후의 혁신 조류와 이것의 유력한 실천 표현으로서의 대륙 정책의 강행 - 支那 사변 등등 신 亞細亞 행진의 대규모의 소음은 조선 민중을 그들의 長夢에서 불러 깨인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과거의 조선의 좌익적 諸 운동은 功罪相半이다. 엇던 논자와 같이 더펴노코 과거는 불살너 버릴 것이라고 할 것은 아니다. 조선 민중 근대적으로 자각시켜 그 의식 수준을 세계 수준에 노아준 것은 분명히 좌익의 공이다. 맑스주의 - 공산주의 그것에 대하야도 역시 同樣의 발언을 할 수 있다. 現下의 사회는 무수히 匡正해야 할 결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결함을 극명, 면밀하게 세계적 규모에서 지적하고 그 匡正의 방법에까지 부분적으로 지시하야 준 것은 분명히 맑스주의의 공로이다. 우리는 맑스주의의 정당한 부분까지도 거부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부분은 우리의 피가 되고 살이 될 수 있는 영양소이다. 원래로 맑스주의는 추상적인 사상 체계이다.
그러한 추상적 공식이 무조건하고 전적으로 해당될 구체적 사회란 현실 세계에는 어데나 존재치 안을 것이다. 그러한 것을 세계의 맑스주의의 포교사들은 그것을 그대로 현실하는 천국을 몽상하였든 것이다. 공산주의가 범한 죄악은 그 책임이 맑스 자신에 있는 것은 아니며 그 후의 해석자, 포교사들에게 있는 것이다. 원래로 개개의 구체적 사회에 대한 변혁이란 멫 개의 공식에 의해 될 것이 아니니 이것은 맑스주의 자신이 거부하는 바일 것이다.

더구나 콤민테룬과 같은 우상적 조직을 두뇌로 한 각 국 각 민족의 운동이 當該 국민 사회의 개성과 전통에 일치될 수 없을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콤민테룬의 세계정책의 실패는 곧 각개 국민사회의 승리이다. 한 민족 사회의 樞軸은 과학이 아니라, 개성이며 전통이라는 것을 우리는 맑스주의의 세계적 규모의 실천에서 배운 것이다. 이러한 고귀한 교훈을 조선 민중은 今次의 사변을 통하야 전면적으로 실천해 옴긴 것이다.
過般의 長鼓峯 사건을 통해 볼 때에도 조선 민심은 추호의 동요도 없었다.
2, 26 사건을 목도하고 그 후의 혁신 조류를 보고 또 今次의 사변을 통하야 나타난 일본의 이상과 포부를 듯고도 오히려 일본의 제국주의 운운을 말할 자는 크렘린의 과대 몽상광 환자들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행여 불행하게도 조선에도 있다면 그것은 이미 塚中의 腐瀾屍나 다름없는 태양에 등진 사람들일 것이다.
나는 이상에서 一應, 과거 좌익 운동의 정당한 방면을 드러 辯解하였으나 그러나 나날이 발전하는 일본의 국가적 興隆과 아울러 조선 민중의 신생활 목표는 공산주의적 殘滓의 일호일지라도 용납될 수 없다.

조선 내에만 수천의 前 좌익이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昨今의 조선 민중의 새로운 애국적 국민적 경향을 대할 때에 가벼운 불유쾌를 늣길 것이며 묵묵한 가운데 사변의 발전이 엇지될 것인가를 주시하는 동시에 사변의 장기화에 반하는 민심의 해이에 컴컴한 기대를 붙일넌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 민중은 과거 4 반세기 동안 하늘의 별을 따는 곡예를 해 온 경험이 있는 민중이다. 그러한 空漠한 희망에도 수십 년의 고초를 사양치 안은 민중이려든 하물며 한 고개 넘으면 녹야의 복지가 있을 것을 알면서도 소소한 총후의 부자유를 거부 회피할 이유는 없다. 타산에 현명한 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일뿐더러 또 타산을 떠난 관찰로라도 조선 민중의 세계사적 운명이 이미 일본 전체의 운명과 동일한지는 오래다. 이제 새삼스러히 일본 전체의 운명과 殊異한 독자의 운명이 있을 것은 아니다.
과거 4 반세기 동안의 우리의 공허한 노력이 그것을 여실이 증명하고 남음이 있다. 차라리 우리는 과거 4 반세기의 노력의 결과에서 조선 민중의 독자의 운명을 발견키는커녕 그와 반대의 명제를 추출하지 안었는가. 그 동안의 다각적 노력은 더욱 더욱 양 민족의 일체 不可離를 거듭 확인케 되였을 분 아니라. 객관적으로 볼 때에 그 동안의 상극 반목은 도리혀 양 민족의 차별면과 障害部面을 완전히 磨滅식힌 결과로 낱아나지 않았는가. 이것은 커- 다란 역사의 숙명이며 세계사의 配劑이다. 이제 그러한 愚蒙을 되푸리하려는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의 반역자이며 태양에 등진 우울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극동 諸 민족의 변혁 이상을 검토해 볼 때 現下 진행되여 있는 일본의 대륙 이상 이외의 여하한 우수한 이상도 발견하기 어렵다. 문화, 전통, 지리, 언어, 族系 등의 연원을 같이한 和鮮滿支의 諸 민족이 그들의 자유와 행복을 향유하면서 東亞적 대국가 계통을 수립하야 歐米에 병립하야 東亞인의 東亞를 건설하려는 포부는 일호의 무리도 부자연도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길이다. 더구나 이러한 東亞史 창조의 큰 임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內鮮兩 族이 일체가 되여 그 중추 핵심을 구성하여 爾余의 諸 민족에 대하여 지도적 지위를 확보하는 데 있어서는 손톱 만한 불명예와 불행도 조선 민중에게 없을 것은 제 3자의 공명을 기다리지 않드래도 자명한 일이다.
정치적으로 사상적으로 훈련 있고 교양 있는 조선의 민중은 이미 이것을 이해하고 남음이 있다. 사변 중 일본 내지를 여행한 자가 조선의 총후 국민의 의기를 내지의 그것과 비교하여 조선이 오히려 일보 전진한 감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부의 대륙 정책의 심원한 이상을 이해하는 점은 조선 민중이 훨신 심각할 것이라고 나도 생각한다. 일본 내지에는 자유주의 계열이 조선에 비하여 근거 깊고 또 2, 26 이전까지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이 廟政의 중심이 되였을 뿐 아니라 유신 후 70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그러한 자유주의 계열에 있었든 만치 대륙 정책, 기타 국내 문제에 있어서 조선의 그것과 같이 단순치는 않다. 그러한 諸 점에서 조선이 일보 전진했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는 奇說이다. 그럼으로 역사는 기이한 것이다. 여하튼 조선의 금후는 국가주의 이외의 여하한 사회 이상도 성장할 조건은 완전히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나의 이러한 신 일본의 이상을 대변함에 대하야 멧 가지 반문을 하는 것이 통례이다.
첫재 內鮮一體라 하는데 그것은 가능할 수 있느냐는 무름이다. 이러한 반문은 대개 민족주의 계열에서 발하는 의문인데 과연 민족주의자들의 식견에서 볼 때에 그것은 커다란 의문임에 틀림없다.
그들의 이해하는 한의 민족이란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민족이란 결코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한 역사적인 것이니 생성, 발달 몰락할 수 있는 역사적 범주이다. 그럼으로 현존 민족의 구성을 상세히 검토해 볼 때에 純正 단일민족이란 잇지 안타. 가장 純正을 말할 수 있는 현재의 일본민족일지라도 조선을 除하고서도 北海道, 琉球, 기타 수세기 내지 수십세기 전의 조선 민족의 이주 등의 사실을 열거할 수 있으니 況 기타는 말할 것도 었다.
그럼으로 內鮮兩族은 민족으로서 일체가 될 수 있다는 원리를 거부할 논거는 없는 것이며 이러한 근본 문제 이외에 정책적 의문이 있으나 그것은 누구나 한 번은 의심할 만한 문제이다.
한아는 內鮮 일체는 조선 민족의 XX을 의미하지 않는가 하는 것인바 內鮮 일체는 조선 민족의 XX이 아니라 조선 민족의 발전이다. 발전도 XX으로 해석하면 논리의 유희로는 가능한 형식이다. 팽창하지 못하는 민족은 멸망하는 것이다. 이러한 愚問은 고루 편협한 견해의 일종이며, 그 다음은 통치 當路者 밋 내지인 일반이 조선인을 동일 민족으로서 무차별하게 취급할 아량과 용의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것은 비교적 현명한 층에 속한 사람들 중에서도 우발되는 질문인 바 과거 30년 동안 來鮮 내지인의 실정을 잘 아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의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말한다. 「조선에 와서 조선인을 상대로 해 온 과거의 來鮮인은 과거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발서 새 일본의 추진력이 될 수 없고 그들은 한 수년 지나면 죽어버린다」라고 과연 조선의 來鮮인은 조선을 개발하는 데 큰 공로도 있었으나 그들의 30년 來 변함 없는 頑冥한 생각은 조선 통치에 장해되는 일면도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극히 사소한 문제로서 원래로 대세를 결정할 것이 아니다.
內鮮兩族이 同祖同根을 구두로 문서로 가장 열심으로 일본 전 국민에게 웨치는 사람은 동경 등지에 浪人들이 있고 그리고 현 南총독이다. 그는 內鮮一體를 신념화식혀있다. 南총독의 內鮮一體론이 일본 전 국민에게 무조건으로 납득될 리는 없다 하드래도 그 대세를 지도할 만한 힘이 있는 것은 無疑의 사실이라 하겠으니 내지인 일반에게는 대세적으로 동일 민족으로서 조선인을 처우하는 데 이론이 없을 것을 용이히 추단할 수 있다.
특히 今般 사변이래 조선을 통과한 출정 壯士는 실로 감격하야 조선 민중의 好인상을 각자 향리에 통신하여 일반의 조선인에 대한 인식은 급격히 깊어젔다 한다.
萬條의 정책보담도 內鮮一體의 가장 첩경은 內鮮兩族의 완전한 이해의 일치이다. 內鮮兩族은 이미 천칭의 각 일방에 달려있으니 역사시간의 진전은 이것을 스사로 해결할 것이다.

이에 수반한 것으로는 언어 풍속 습관 등이나 이것은 원래로 문제시할 것이 아니다. 인위 强作이 아니고서도 이것은 시일의 경과를 따라 실생활의 편의에 따라 消長이 결정될 문제이니 억측을 불허할 바이다. 그것의 유력 실례로 수일 전의 南 총독은 면회석상에서 「조선의 부인복을 內鮮을 물론하고 착용케 하고 십다는」 의견을 말한 것으로 보아 총독 정치의 저의가 조선 풍속 습관을 强作적으로 철폐할 의사가 없는 것은 명확하지 안는가.
그 다음으로 조선의 인텔리들이 가장 중요한 관심을 갖이고서 우리에게 발문하는 것은 「명일의 일본, 새 일본을 말하자면 명일의 일본은 대체 어데로 갈 것인가」하는 지극히 중대한 設問이다. 그럴 때마닥 간단한 답변을 試한다. 「2, 26 사건 이전의 자유주의의 정권은 - 한 계급의 정권이었으나, 그 이후의 정권은 전 국민의 정권이며 정부이다」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2, 26 사건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비난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반역죄로서 治罪된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일본 전 국민에게 준 정신적 충격이란 실로 막대한 바이 있으니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일본 전 민족의 전통의 자량은 다시 사라낫고 일본 민족의 갖이고 잇는 「민족의 피」는 다시금 鼓動키 비롯한 것이다. 이 사건은 일본의 전 민족을 外化의 타락에서 구하였고 고유한 일본 정신을 환기한 것이다. 그럼으로 한 범죄가 사회적으로 및어주는 객관적 효과는 법률과는 별 문제인 것이다.

이상의 나의 간단한 답변은 소위 「명일의 일본」을 窺知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이다. 이제로부터의 일본은 자기의 가고저 하는 「자연의 길」을 일본 민족의 역사적 사명의 명하는 바에 의하여 세계사의 결정하여 주는 방면으로 향하여 묵묵히 驀進할 뿐이다. 일본 정신적 사회가 완성 - 근대적으로 완성되는 곳에는 계급도 없고 착취도 없다. 이민족에 대한 박해도 식민지적 지배도 거기에는 존재치 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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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이후 1939년 7월 12일 배영동지회 평의원으로 선임되었고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상무위원장, 1945년 6월 조선언론보국회 평의원으로 각각 선임되었다. 그리고 1945년 7월 20일 조선언론보국회 주최로 열린 '본토결전과 국민의용대 강연회'에서 함경북도 지역 연사로 활동했다.

2.4. 해방 이후

8.15 광복 후에는 천안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한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체포 대상자 명단에 포함되었지만 반민특위가 조기에 해산되면서 체포를 모면했다. 1963년 1월 31일에 사망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 논산이랑 천안 아산쪽이 연안 차씨가 많은 차씨의 집성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