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D7E0E6><colcolor=#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바덴의 체칠리에 Cäcilie von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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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독일어 |
체칠리에 아우구스테 (Cäcilie Auguste) |
러시아어 |
올가 표도로브나 (Ольга Фёдоровн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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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39년 9월 20일 | |
바덴 대공국 카를스루에 | ||
사망 | 1891년 4월 12일 (향년 51세) | |
러시아 제국 하르키우 | ||
배우자 | 러시아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 (1857년 결혼) | |
자녀 | 니콜라이, 아나스타샤, 미하일, 게오르기, 알렉산드르, 세르게이, 알렉세이 | |
아버지 | 바덴 대공 레오폴트 | |
어머니 |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 |
형제 | 알렉산드리네, 루트비히, 루트비히 2세, 프리드리히 1세, 빌헬름, 카를, 마리 | |
종교 | 루터교회 → 러시아 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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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제국의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의 아내.2. 생애
2.1. 출생과 스캔들
바덴의 대공 레오폴트와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의 셋째딸이자 막내로 1839년에 태어났다.체칠리에의 집안 배경에 대해선 이야기가 많다. 일단 체칠리에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원래 귀천상혼으로 태어나서 바덴 대공가를 상속받을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레오폴트의 이복형인 루트비히 1세를 마지막으로 체링겐 가문의 적자가 자녀를 남기지 못하게 되면서 바덴 대공국이 바이에른 왕국에 합병될 위기에 처하자, 이를 막기 위해서 레오폴트를 후계자로 인정했고 그렇게 1830년 레오폴트는 바덴의 대공이 되었다. 이후 레오폴트는 독일의 자유주의 개혁에 참여한 최초의 독일 통치자로 여겨졌다.
어머니인 스웨덴의 소피아 공주는 스웨덴의 구스타프 4세 아돌프와 바덴의 프리데리케의 장녀였다. 소피아는 아버지가 스웨덴의 왕위에서 쫓겨난 뒤 외가인 바덴에서 머물게 되었고, 바덴 대공가에서는 레오폴트의 지위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서 소피아와 결혼시켰다. 남편과 달리 소피아는 보수적인 정책을 지지했으며 카스파 하우저의 등장으로 소란이 일어나자 1833년에 하우저의 암살을 명령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로 인해 부부 사이가 나빠졌고 소피아는 바람을 피운 것으로 알려졌다. 체칠리에의 아버지는 하버라는 이름의 유대인 은행가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 주장을 확인할만한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관두껑 열고 친자검사를 해볼수도 없고.(...)
1848-49년 혁명으로 바덴의 대공 가문은 카를스루에에서 코블렌츠로 피신했다. 1852년 체칠리아가 12살 때 아버지 레오폴트가 사망했다.
체칠리에는 스파르타식 교육을 받았으며 부모님과의 관계는 형식적이었고 나중에 자녀들을 키우는데에도 자신이 받았던 교육과 같은 원칙을 적용했다. 또한 체칠리에는 말주변이 좋고 재치있으며 교양 있는 소녀로 성장했는데, 특히 광대뼈가 높고 눈이 비스듬한 인상적인 유라시아계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2.2. 결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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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올가 표도로브나 대공비 |
1857년 니콜라이 1세와 프로이센의 샤를로테의 4남 4녀 중 4남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과 결혼했다. 결혼과 함께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 체칠리에는 러시아식 이름인 올가 표도로브나로 불리게 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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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일 대공부부와 장남 니콜라이와 장녀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여대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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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이 체칠리에, 오른쪽이 아나스타샤 |
2.3. 코카서스 총독 부인 시절
1862년에 남편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이 큰형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 코카서스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이에 체칠리에 역시 남편과 함께 티플리스로 이사했다. 당시 미하일과 체칠리에 부부는 이미 세 자녀를 낳은 상태였는데, 코카서스에서 네 명의 자녀를 더 낳았으며 거의 20년 가까이 그곳에서 거주했다.체칠리에는 총독의 아내로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귀부인들과의 사교생활에 전념했으며 사회 산업에도 열성적이었다. 특히 여성 교육과 병원 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표하며 여성을 위한 학교를 만들고 후원했으며, 무료 구호를 위한 병원을 짓기도 했고 이외에도 많은 자선 단체를 지원했다. 또한 공식 임무 외에도 코카서스 지역에서 황제의 자유 개혁 실행을 감독한 남편 미하일을 지지했다.
2.4. 말년
체칠리에는 재치 있고 기가 세고 독한 성격을 가졌다. 하지만 손윗동서인 헤센의 마리 공녀를 경멸했다. 나중에는 시조카 알렉산드르 3세가 황족들의 지위 개편으로 황제의 손자녀들만 대공과 여대공의 칭호를 쓸 수 있도록 제한하자 매우 분개하며 반발했다.미하일 대공은 1881년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되면서 코카서스 총독직에서 물러났다. 러시아의 새로운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재위하는 동안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대공은 제국의회 의장을 역임했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갔다. 체칠리에를 좋아하지 않았던 알렉산드르 3세는 때때로 그녀를 등 뒤에서 하버 아줌마라고 불렀다. 유대인 친자 관계에 대한 소문은 체칠리에를 평생 따라다녔다. 남편 미하일 대공은 이러한 아내를 보호했다. 러시아 제국은 가장 대표적인 반유대주의국가였고 황실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체칠리에는 성격도 지랄맞아서 인기있는 황실 구성원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더욱 조롱당했다.
알렉산드르 3세의 재위기간 동안 국무장관이었던 알렉산드르 폴로브초프 역시 체칠리에에 대한 냉담한 묘사를 남겼다. 폴로브초프는 체칠리에가 영리하다고 인정했지만 네바 강둑에 있는 궁전에 앉아 창문을 통해, 걷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불쾌한 말을 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신랄하고 다투기 좋아하는 게으른 여자라고 묘사했다.
2.5. 사망
체칠리에는 1891년 2월 26일 산레모에서 차남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이 귀천상혼으로 결혼하자[2] 큰 충격을 받고 건강이 안좋아졌다. 담당 진단의사의 주장에 따라 그녀는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크림반도로 출발했다.1891년 4월 9일 정오경 체칠리에가 타고 있던 급행열차가 하리코프를 통과했다. 오후에 심장 마비를 겪었다. 카리코프는 가장 큰 인근 도시이기 때문에 오후 7시경 기차가 그리로 왔다. 카리코프에서 여러 의사가 그녀의 기차 칸에 왔고, 의사들은 그녀의 질병을 폐렴으로 진단했다. 체칠리에는 당시 혼자 여행하는 동안 남편과 자녀는 함께 있지 않았다. 체칠리에는 3일 후인 1891년 4월 12일 향년 51세의 나이로 기차역에서 사망했다. 사후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의 예배당에 묻혔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바덴의 체칠리에 (Cecili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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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 대공 레오폴트 (Leopold, Grand Duk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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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 (Charles Frederick, Grand Duk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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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두를라흐의 공세자 프리드리히 (Friedrich, Hereditary Prince of Baden-Durlac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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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우디츠의 아멜리 (Princess Amalia of Nassau-Dietz)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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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흐베르크의 루이제 카롤리네 여백작 (Countess Louise Caroline of Hoch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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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어스베르크의 가이어 남작 루트비히 하인리히 (Ludwig Heinrich, Baron Geyer of Geyersber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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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포네크의 막시밀리아나 크리스티아네 여백작 (Countess Maximiliana Christiane of Spone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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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소피아 공주 (Princess Sophie of Swe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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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4세 아돌프 (Gustav IV Adol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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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3세 (Gustav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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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소피 마그달레네 공주 (Princess Sophia Magdalena of Den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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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프리데리케 공녀 (Princess Frederica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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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덴의 공세자 카를 루트비히 (Karl Ludwig, Hereditary Prince of Ba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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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센다름슈타트의 아말리 (Princess Amalie of Hesse-Darmstadt) |
3.2.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1남 |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Nicholas Mikhailovich) |
1859년 4월 26일 | 1919년 1월 28일[3] | |
1녀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비 아나스타샤 미하일로브나 (Anastasia Michailowna, Grand Duchess of Mecklenburg-Schwerin) |
1860년 7월 28일 | 1922년 3월 11일 |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3세 슬하 1남 2녀[4] |
2남 |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Michael Mikhailovich) |
1861년 10월 16일 | 1929년 4월 26일 |
메렌베르크의 조피 여백작[5] 슬하 1남 2녀 |
3남 |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George Mikhailovich) |
1863년 8월 23일 | 1919년 1월 28일 |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아 공주[6] 슬하 2녀 |
4남 |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ander Mikhailovich) |
1866년 4월 13일 | 1933년 2월 26일 |
러시아의 크세니야 알렉산드로브나 여대공[7] 슬하 6남 1녀[8] |
5남 |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Sergei Mikhailovich) |
1869년 10월 7일 | 1918년 7월 18일 | [9] |
6남 |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대공 (Grand Duke Alexei Mikhailovich) |
1875년 12월 28일 | 1895년 3월 2일 |
4. 여담
- 손윗동서인 헤센의 마리 공녀와 공통점이 많다. 둘 다 독일 내 대공국의 막내딸이였고, 출생 당시 이러저러한 스캔들이 있었고, 유이하게 아들을 6명을 낳았으며,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정작 체칠리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마리를 경멸했다.
- 반대로 어머니가 유대인 정부와의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라는 소문이 돌았고, 배우자와 금슬이 매우 좋았으며, 자녀도 많이 낳았다는 점에서는 영국의 앨버트 공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앨버트는 자녀들에게 다정한 반면 체칠리에는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했으며, 황실 내 평판도 시조카 알렉산드르 3세에게까지 까였던 체칠리에와는 달리 앨버트가 더 낫다는 평.
- 알렉산드르 1세의 황후였던 바덴의 루이제는 체칠리에와 사촌관계이다.
- 고명딸 아나스타샤의 차녀인 독일 제국의 체칠리에 황태자비의 이름의 유래이다. 아나스타샤의 장녀인 덴마크의 알렉산드리네 왕비는 첫째 언니인 바덴의 알렉산드리네[10]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후 체칠리에 황태자비는 두 딸의 이름을 알렉산드리네와 체칠리에로 지었다.
[1]
참고로 넷째 올케 마리야가 남편 미하일 대공의 첫째 누나
마리야 여대공의 장녀로 남편의 외조카다.
[2]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대공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손녀인 메렌베르크의 조피와
귀천상혼으로 결혼했다. 이로 인해 미하일과 조피의 자녀들은 러시아의 정식 황족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토르비 여백작이었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토르비 백작/백작 영애의 작위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중 미하일과 조피의 차녀가
조지 마운트배튼의 아내 나데이나 미하일로브나 데 토르비다.
[3]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함.
[4]
덴마크의 왕비 알렉산드리네,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 프리드리히 프란츠 4세,
독일제국의 황태자비 체칠리에
[5]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외손녀다.
[6]
요르요스 1세와
올가 왕비의 차녀이다. 올가 왕비가 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대공의 친사촌이므로, 게오르기 대공과 마리아 공주는 5촌 숙부와 조카끼리 결혼한 것이다. 게오르기는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당했다.
[7]
알렉산드르 3세의 장녀.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의 친사촌이니 이쪽도 5촌 숙부와 조카끼리 결혼한 것이다.
[8]
펠릭스 유스포프 공비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 등.
[9]
러시아 혁명 당시 볼셰비키에 의해 처형 당함
[10]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2세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