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021F70 0%,#021F70 30%, #021F70 70%, #021F70)"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초대 | 제2대 | 제3대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
제4대 | 제5대 | 제6대 | |
후지와라노 요리츠네 | 후지와라노 요리츠구 | 무네타카 친왕 | |
제7대 | 제8대 | 제9대 | |
고레야스 친왕 | 히사아키 친왕 | 모리쿠니 친왕 | |
쇼군 (
미야쇼군 계보) ·
싯켄 섭관 · 원정 · 헤이케 · 가마쿠라 · 무로마치 오다 · 도요토미 · 에도 · 내무경 · 총리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bgcolor=#BD0029> 조정 | |||
<bgcolor=#021F70> 가마쿠라 막부 | |||
<rowcolor=#FFF><nopad> 초대 | 제2대 | 제3대 | |
<rowcolor=#FFF><nopad> 제4대 | 제5대 | 제6대 | |
<rowcolor=#FFF><nopad> 제7대 | 제8대 | 제9대 | |
<bgcolor=#BD0029> 겐무 신정 | |||
<bgcolor=#BD0029> 남조 | |||
<bgcolor=#000> 무로마치 막부 | |||
<rowcolor=#FFF><nopad> 초대 | 제2대 | 제3대 | |
<rowcolor=#FFF><nopad> 제4대 | 제5대 | 제6대 | |
<rowcolor=#FFF><nopad> 제7대 | 제8대 | 제9대 | |
<rowcolor=#FFF><nopad>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rowcolor=#FFF><nopad>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bgcolor=#003400> 에도 막부 | |||
<rowcolor=#FFF><nopad> 초대 | 제2대 | 제3대 | |
<rowcolor=#FFF><nopad> 제4대 | 제5대 | 제6대 | |
<rowcolor=#FFF><nopad> 제7대 | 제8대 | 제9대 | |
<rowcolor=#FFF><nopad>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rowcolor=#FFF><nopad> 제13대 | 제14대 | 제15대 | |
}}}}}}}}}}}} |
가마쿠라 막부 제2대 정이대장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源賴家 |
|
|
|
출생 | 1182년 9월 11일 |
사망 | 1204년 8월 14일 (향년 21세) |
재임기간 | 제2대 정이대장군 |
1202년 ~ 1203년 |
[clearfix]
1. 개요
가마쿠라 막부의 제2대 쇼군.부친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롤모델로 삼아 강력한 쇼군 권력을 행사하려고 했으나, 유력 고케닌들의 반발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203년에 이르러 쇼군 자리에서 내쫓기고 슈젠지에 유폐되었다. 이듬해 외삼촌들이 보낸 자객들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어린 시절부터 차기 쇼군으로서의 엘리트 교육을 받은 요리이에는 시종일관 강력한 쇼군으로 군림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1180년대의 내란기를 거치며 잔뼈가 굵어진 유력 고케닌(어가인)[1]들은 혈기왕성한 청년 쇼군의 독주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 호조 도키마사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 13인은 요리이에가 가장권인 가독을 승계한 후 불과 몇 개월 만에 쇼군의 독재를 부정하는 합의제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이를 13인의 합의제[2]라고 한다.이에 대해 요리이에는
"오가사와라 나가츠네(小笠原長経), 히키 무네카즈(比企宗員), 히키 토키카즈(比企時員), 나카노 요시나리(中野能成) 등의 무리가 가마쿠라에서 만약 행패를 벌였다고 하더라도 갑을인(甲乙人)이 감히 적대하지 말 것이며, 만약 위법한 일을 한 무리에게는 죄과를 묻기 위해 필시 교명(交名)을 검사하여 제출하도록 촌리(村里)에 알려라. 이 5명 외에 특별한 명령이 없다면 섣불리 [장군을] 찾아뵈지 못하도록 한다."
라는 명령을 내렸다. 학계는 이 명령이 요리이에가 13인 합의체에 대항해 측근정치를 시도하고자 한 것으로 본다.[3] 막부가 기존의 고케닌들과 요리이에의 측근으로 나뉘게 된 것이다.그러던 중, 두 세력 간의 균형이 무너지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원인은 다름아닌 요리이에 자신에게 있었는데, 요리이에는 유력 고케닌이었던 아다치 모리나가의 첩과 바람을(...) 피웠다. 아다치가 이를 알게 되면서 크게 분노하자, 요리이에는 오히려 아다치를 죽이려고 들었다. 이에 가마쿠라에서 양측 군대가 충돌하는 사태까지 갈 뻔했으나 호조 마사코가 아다치의 편을 들며 요리이에를 질책함으로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 사태로 인해 아다치 가문이 돌아서게 되었고, 싸움을 중재한 마사코의 입지가 강화되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것에 대해 남녀관계에 놀랄만큼 자유로웠던 교토의 귀족문화와, 그렇지 못했던 간토 지역 사이의 문화 차이로 이해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얼마 후에는 설상가상으로 카지와라 카게토키가 유키 토모미츠를 참언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쇼군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카지와라는 선대 요리토모의 시대부터 많은 공을 세우고 쇼군을 보필하는 중신이었는데, 그의 직위는 다름아닌 인물들을 감시하는 역할이었다. 유키 토모미츠가 쇼군과 고케닌들 사이에 갈등이 커져가는 것에 대해 한탄하며 '충신은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한 것에 대해 카지와라가 쇼군에 대한 모독이라고 몰아세우며 규탄하자 이에 격분한 유키는 주변 귀족들을 모아 쇼군 요리이에에게 카지와라에 대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에 어쩔수 없이 요리이에가 카지와라에게 해명을 요구했는데, 카지와라는 해명하지 않고 영지로 내려가 버렸다. 결국 카지와라가 얼마 후 교토에 상경하던 도중 모반 혐의로 토벌당하면서 요리이에는 중요한 측근 한 명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요리이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설임 없이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갔다. 무엇보다도, 토지조사 문제가 관건이었다. 요리이에는 고케닌들의 토지를 조사하여 일정한 크기 이상의 토지는 몰수해 경제적으로 궁핍한 무사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케닌들이 이를 순순히 용납할 리 없었고, 요리토모 시대부터 막부를 위해 싸워온 자신들을 모욕하는 처사로 느꼈다. 결국 토지조사는 시행이 연기되고 말았다.
그러자 요리이에의 최대 지지자였던 히키 가문이 특단의 조치를 취해, 요리이에의 동생인 센만(훗날 제3대 쇼군이 된 미나모토노 사네토모)과 그 후견인이었던 아노 젠죠[4]를 반역죄로 체포하고는 호조 가문에 찾아가 젠죠의 아내이자 호조 도키마사의 딸이었던 아와츠보네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호조 마사코가 아와츠보네의 무죄를 강변함으로서 호조 가문이 반역죄에 말려드는 것을 막았다. 그러나 이 일로 아노 젠죠와 그 아들은 처형되었다.
그러던 중 1203년, 요리이에는 돌연 중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막부 내에서는 요리이에가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 생각해 미리 쇼군 가문의 외척인 호조 가문과 히키 가문을 중심으로 쇼군 가독의 승계와 가산의 분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히키 가문의 피를 이어받은 요리이에의 적자인 이치만이 가독 및 쇼군직, 동국 28개국에 대한 지두직을 승계하고, 요리이에의 친동생인 센만이 서국 38개국에 대한 지두직을 승계함으로서 천하를 양분하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호조 도키마사는 히키 가문을 제거하기로 결심한 뒤, 유력 고케닌과 막부 관료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며 사실상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 결과 히키씨 일문이 사실상 멸문당하고, 히키씨가 차기 쇼군으로 내정한 이치만은 어머니와 함께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얼마안가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이후 호조 가문은 교토로 사절을 보내 쇼군이 죽었다고 알리며, 센만을 새로운 쇼군에 봉해 달라고 요청했다. 여기까지 가면 호조 가문이 순조롭게 차기 쇼군직을 둔 싸움에서 승리하나 했지만...얼마 안가 요리이에가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왔다. 호조 가문의 쿠데타 소식을 접한 요리이에는 와다 요시모리 등에게 진압을 명령했지만, 쇼군으로서의 권력과 권위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라 요리이에는 쇼군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으며, 이윽고 슈젠지(修禪寺)에 유폐되었다가 1204년 호조 요시토키에 의해 살해되었다. 호조 가문으로서는 자신들의 핏줄인 센만을 제3대 쇼군으로 세우기 위해 쿠데타를 벌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또다른 핏줄인 요리이에를 죽이게 된 셈이었다.
3. 사후
요리이에에게는 후지와라노 요리츠네[5]에게 시집간 딸인 다케노 고쇼(竹御所)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난산으로 세상을 떠났다.요리이에의 아들이었지만 승려로 출가했던 구교는 그의 숙부인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센만)를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킨 뒤 처형당했고[6] 사네토모에게도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사네토모를 끝으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직계 후손은 단절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