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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타람 왕국(Mataram Kingdom)은 716년–1016년에 있었던 자바 힌두교- 불교 왕국이다. 16세기 말 건국된 마타람 술탄국과는 다른 나라이다. 마타람 왕국은 초반에 중앙 자바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나중에는 동 자바에 기반을 두었다. 동 자바에 기반을 둘 때는 므당(Medang) 왕국이라고도 한다. 산자야 왕에 의해 세워진 이 왕국은 샤일렌드라 왕조와 이샤나 왕조에 의해 통치되었다. 대부분의 역사 동안 왕국은 농업, 특히 대규모 쌀 농사에 크게 의존해 왔고, 나중에 해상 무역의 혜택을 누려왔다.외국의 자료와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왕국은 인구가 많고 꽤 번영한 것으로 보인다. 왕국은 복잡한 사회를 발전시켰고, 문화가 발달했으며, 어느 정도의 정교함과 세련된 문명을 이루었다.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중반 사이에 왕국은 고전 자바 예술과 건축이 꽃을 피웠고, 이는 사원 건축의 급속한 성장에 반영되었다2. 역사
인도네시아에서 가장 거대한 섬인 자바 섬에서 제일 먼저 등장한 왕국은 타루마 왕국이었다.[1] 300년대 중후반에 세워진 타루마 왕국은 나름 큼직한 항구를 짓고 관개 사업을 실시하는 등 기초적인 국가의 모습을 꾸려나갔다. 하지만 7세기 경 들어서 타루마 왕국도 점점 약화되더니 나중에는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으로 분열된다. 타루마의 정통 후계는 순다 왕국이었지만 타루마 왕국의 또다른 봉신이 불만을 품고 갈루 왕국을 세워 떨어져 나갔던 것. 다만 본래 하나의 나라였기에 순다 왕국과 갈루 왕국은 서로 치고받으며 결합과 분리를 반복했고, 순다의 국왕이 갈루의 국왕을 겸하기도 하는 등 섞여 살기도 했다.이 시대에 등장한 사람이 ' 산자야'라는 인물이었다. 순다 왕국의 왕자로 태어나 순다 왕위를 물려받았고, 이후 갈루 왕국을 공격해 갈루의 왕위를 겸할 정도의 나름 영웅이었다. 산자야는 8세기 초엽 즈음에 므라피산(Gunung Merapi)의 사면을 흐르는 오팍강(Sungai Opak) 유역의 크우 평원(Dataran Kewu)[2] 지역에 마타람 왕국[3]을 세웠다. 마타람 왕국은 자바 섬 중부를 기반으로 영토를 확장하며 나중에는 자바 상당수를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프람바난 사원, 보로부두르, 칼라산 사원, 세우 사원, 플라오산 사원 등 수많은 힌두, 불교 사원들을 세우며 그 문화의 꽃을 피웠다. 이처럼 8세기에서 10세기 초까지 자바에서 힌두교 및 불교 사원 건축은 전성기를 맞았는데, 이후에도 이슬람화 전까지 많은 사원이 세워졌지만 14세기 마자파힛 제국의 전성기를 제외하면 이 마타람 왕국에 비할 정도로 위풍당당하고 정교한 사원 건축을 찾기는 어렵다.
초기 마타람 왕국 내에는 종교를 기반으로 대립하는 두 세력(불교, 힌두교)이 있었다. 불교계 세력은 사일렌드라 왕가[4]를 중심으로 뭉쳤으며, 시바파 힌두계 세력은 마타람 왕국의 초대 왕 산자야가 개창한 산자야 왕가를 중심으로 뭉쳤다[5]. 이 두 세력은 엎치락뒤치락했는데, 불교 세력이 강성할 때는 마타람 왕국의 왕가가 사일렌드라 왕가로 바뀌기도 했다. 초대 왕 산자야 사후 즉위한 마타람의 제2대 왕 파낭카란(Panangkaran)은 사일렌드라 왕가의 대승불교도로서, 마타람의 왕은 한동안 사일렌드라 왕가에서 배출되었다. 775년부터는 마타람 왕국의 다라닌드라 왕이 수마트라섬의 스리위자야 국왕을 겸하는 연합왕국이 형성되어[6] 3대를 이어지기까지 했다.[7] 허나 사일렌드라 왕가 출신의 사마라퉁가 왕이 838년 사망하자 마타람 왕위는 산자야 왕가의 부마 라카이 피카칸에게 넘어갔지만, 수마트라에서는 여전히 사일렌드라 왕가가 기반을 잡고 있었다. 수마트라에서는 사마라퉁가 왕의 아들 발라푸트라 왕자(Balaputra)가 사마라퉁가 사후 라카이 피카탄의 왕위 승계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대로 스리위자야의 왕으로 즉위해 떨어져나갔다.
시바 신을 신봉하는 힌두교 세력의 중심이던 '산자야 왕조' 출신 라카이 피카탄과 그 후계자들은 나름 평화로운 시대를 구가했다. 물론 중간중간 수마트라 섬에 잔존한 사일렌드라 왕조의 추종세력과 반란세력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세월을 보냈던 것. 그러던 중 929년, 음푸 신독(Mpu Sindok, 재위 929?–947)의 치세에 마타람 왕국의 중심지가 자바 중부 마타람 지방에서 오늘날의 좀방(Jombang)현과 마디운 인근에 해당하는 자바 동부로 옮겨졌고, 이로써 기존의 '산자야 왕조'가 끝나고 '이샤나 왕조'(Wangsa Isyana)가 시작된다. 왜 굳이 천도를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당대 자바 중부의 빈번한 화산 활동을 피하기 위해, 또는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세력의 침입에 대비하여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수행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자바 섬으로 천도한 이후의 마타람 왕국은 세력 중심만 바뀌었을 뿐 실상은 같은 국가였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중부 자바가 중심인 시대(732-929)에는 이 왕국을 '마타람 왕국'으로 부르고, 동부 자바가 중심인 시대(929-1016)에는 이 왕국을 '므당 왕국'(Kerajaan Medang)으로 구분해서 부르기도 한다.[8] 므당 왕국 시대부터는 자바에서 마타람 왕국 시대에 절정기를 맞은 대규모 사원 건축이 뜸해지고, 사원 건축에서 인도적인 모티브의 직접 차용보다는 자바의 토착 요소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마타람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국과 왕가가 분리된 이후 자연스레 스리위자야 왕국과 정치, 경제적 경쟁 구도를 형성할 수 밖에 없는 구도였다. 이후 마타람 왕국과 스리위자야는 200년 가까이 서로 티격태격하며 세력을 겨루게 된다.[9] 990년에는 마타람의 왕 다르마왕사(Dharmawangsa, 재위 990-1016)는 사일렌드라 왕조 스리위자야 왕국의 팔렘방을 공격하여 도시와 궁성을 약탈하고 점령을 시도했지만, 스리위자야 왕국이 꿋꿋이 힘을 모아 반격하자 1006년에 물러나며 실패했다.[10] 이후 스리위자야 왕국은 르와람(Lwaram)의 영주 우라와리(Wurawari)의 반란을 부추겼다. 우라와리의 반란군은 1016년 마타람의 수도 와투갈루(Watugaluh)로 쇄도했다. 와투갈루에 적군이 진입할 당시 다르마왕사 왕의 딸이 결혼식을 올리던 중이었기에 다르마왕사는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한채 사로잡혀 죽었다. 와투갈루는 불태워졌고 이로 인해 마타람 왕국은 완벽히 멸망했다.
3. 정치
마타람 왕국은 중앙정부에서 마을 지도자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식으로 통치했다. 당시의 왕은 종교지도자를 겸했다.4. 경제
마타람 왕국은 주로 쌀을 재배했으며 다량의 쌀이 재배가 가능해 인구가 점차 늘어났다. 또한 일부 마을과 토지는 비문으로 된 칙령을 통해 하사받은 사마땅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사마 땅에서 수확된 쌀은 보통 종교 건물에 쓰였다.
[1]
2~3세기 경 자바 서부에 인도 상인들이 세운 살라카 왕국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제대로 뒷받침할만한 고고학적 증거가 없어서 반쯤은 신화 속 왕국 취급을 받는다. 고고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 존재가 처음으로 입증된 왕국은 타루마 왕국이다.
[2]
현재도 역사적 이유로 '마타람'으로 불리는 지역이다. 지금의
욕야카르타 등과 가까우며, 나중의
마타람 술탄국도 이 지역 및 근처를 핵심 강역으로 한다.
[3]
Kerajaan Mataram, 732–929, 훗날의
마타람 술탄국과 구분해 고(古) 마타람 왕국, 또는 마타람-므당 왕국 전기라고도 부른다.
[4]
자바 중부의
크두 평원(Dataran Kedu)을 핵심 영지로 하여 출발한 왕가로, 기원으로는 여러 설이 있다. 마타람-므당 왕국이나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가가 되기도 했다. 발리섬의 와르마데와 왕가 역시 사일렌드라 왕가의 방계이다.
[5]
일반적인 역사 서술은 이렇지만, 산자야도 사일렌드라 왕가에 속했으며, 산자야 왕가라는 별도의 왕가는 없고, 오직 사일렌드라 왕가의 대승불교 분파와 시바파 힌두교 분파만이 존재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6]
사일렌드라 왕조 출신의 다라닌드라 왕이 어떻게 인접한 스리위자야 왕국을 집어삼켰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당시 스리위자야 왕국은 세워진지 100년 정도 된 국가였는데, 아마 원래부터 스리위자야 일대에 영향을 끼치던 사일렌드라 왕가에서 자바의 힘을 등에 업고 스리위자야 왕국의 왕위도 얻어낸 것으로 추정된다.
[7]
이때 자바 섬의 국력이 상당히 강력했는데, 어찌나 강력했던지
크메르 제국의 전신인
수진랍의 왕
마히파티바르만이 '자바 왕의 목을 잘라 내 앞의 쟁반 위에 놓고 싶다'라는
망언을 하자 분노해 바다 너머 캄보디아까지 군대를 파병해 수진랍 왕을 죽여버렸을 정도였다.
[8]
단, '므당'이라는 명칭은 937년의 <안죽라당 비문>(Prasasti Anjuk Ladang)에서 사용되어 후대에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중심이 동부로 옮겨지기 전인 마타람 시대에도 당대에는 한동안 사용되었던 국호로 보인다. 실제로 <안죽라당 비문>에는 "Mdaŋ i Bhûmi Matarâm", 즉 '마타람의 땅에 (도읍을 둔) 므당 (왕국)'이라는 구절도 있다.
[9]
특히 스리위자야 왕국을 다스리던 사일렌드라 왕가가 아직까지도 자바 섬을 자신의 적법한 영토로 여기고 되찾아오고 싶어했기에 갈등의 정도가 더 심했다.
[10]
이때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였던 스리 쿠다마니 와르마데와가
송나라 황제의 힘을 빌려 외교전을 벌이기도 했다. 천자의 장수를 기원하는 사찰을 지어주는 대신 중국의 원조와 정치적 지지를 얻어내었던 것. 저멀리 동남아 이국 땅에 자신을 위한 사원이 세워졌다는 것에 기뻐한
송 태종은 사찰의 이름을 친히 짓고 종을 주조해 보내주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