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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14 00:22:36

무함마드 나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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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아랍 공화국 초대 대통령
무함마드 나기브
محمد نجيب | Mohamed Naguib
파일:Mohamed_Naguib1952.jpg
이름 무함마드 베이 나기브 유세프 엘 카쉬란
Mohamed Bey Naguib Youssef Qutb El-Qashlan
الرئيس اللواء محمد بي نجيب يوسف قطب القشلان
출생 1901년 2월 20일
파일:이집트 국기(1882-1922).svg.png 앵글로-이집트 수단 하르툼
(현 수단 공화국 하르툼)
사망 1984년 8월 29일 (향년 83세)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카이로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53년 6월 18일 ~ 1954년 11월 14일
서명
파일:Muhammad_Naguib_Signature.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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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09300><colcolor=#ffffff> 배우자 아이샤 나빕
국적 파일:이집트 국기.svg 이집트
종교 이슬람 수니파
직업 정치가
학력 고든 메모리얼 칼리지 }}}}}}}}}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군인으로서2.3. 자유 장교단 쿠데타와 실각2.4. 축출 이후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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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집트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2. 생애

2.1. 초기 생애

무함마드 나기브는 1901년 2월 20일, 수단에 주둔중이던 이집트군 하급 지휘관 유세프 나기브와 조라 아흐메드 오스만 사이에서 아홉명의 자녀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나기브는 카르툼에 있는 고든 메모리얼 칼리지에서 중등 및 육군 사관학교를 다녔고 1918년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1923년, 이집트 왕실 근위대에 입대하고 1927년 법률 면허를 취득한 이집트 최초의 군인이 된다. 1929년에는 정치 경제학으로 대학원 학위를 수여받게되고 민법으로도 다른 학위를 수여받게 된다.

학창시절 나기브는 어학에 관심을 보여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히브리어를 배웠는데, 이는 먼 훗날 중동전쟁에서 나비효과로 돌아오게 된다.

2.2. 군인으로서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임관한 나기브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수단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1919년 이집트 혁명이 발발하자 카이로의 모스크에 이집트 국기를 걸면서 영국군을 향해 총구를 돌린다.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에도 군생활을 계속했고, 평소 어학에 관심을 가졌던 그는 독립의 움직임이 보이는 이스라엘이 장차 적성국으로 급부상 할것으로 판단했다.

이때문에 이집트군 장교와 부사관들에게 히브리어를 배우도록 지시했는데, 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는 가운데 히브리어를 아는 이집트군 장병들이 이스라엘군 무전을 도감청해 격파하는 전공을 세우면서 이를 입안한 나기브는 영웅으로 부상해 이집트 국왕 파루크 1세의 아성을 위협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2.3. 자유 장교단 쿠데타와 실각

파일:61429BAA-B916-44F8-86D6-75AD13BC1A67.jpg

1952년, 무함마드 나기브는 가말 압델 나세르, 안와르 사다트 등의 '자유 장교단'(free officer movement)은 파루크 1세를 쿠데타로 축출하고 초대 대통령에 추대되었다.

하지만 그를 바지사장대통령으로 내세운 나세르에 의해 1954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카이로 외곽 저택에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1]

2.4. 축출 이후

죽음을 면한 나기브는 그뒤로 30여 년을 더 살면서 1970년에는 자신을 몰아낸 나세르의 죽음도 지켜보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나세르가 사망한 후 권력을 승계한 안와르 사다트가 반혁명파에 대한 유화책을 펼치며 1972년 사면되었고, 사다트의 암살마저 지켜본 후 1984년 간경화로 사망한다. 향년 83세. 사망 당일 촬영한 사진이 남아있다. #

당시 대통령이었던 호스니 무바라크는 그의 장례식을 국장으로 치러 그를 사실상 전직 대통령으로서 복권조치했다.

3. 기타


[1] 무함마드 나기브가 기존 이집트 정치 세력 및 무슬림 형제단에 접근하면서 나세르로부터 독립할 조짐을 보이자 나세르가 선수를 친것이라고 한다. [2] 나기브는 이집트와 파티마 왕조, 아이유브 왕조와의 관계를 부정한다고 봤으며, 메흐메트 알리 왕조에 대한 반감과는 별개로 메흐메트 알리 왕조[3]의 압바스 힐미 2세에 대해서는 애국자였다면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