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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 FC/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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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창단과 초창기3. 맨체스터 시티의 첫 중흥기4. 조 머서의 부임, 첫 번째 전성기5. 경영난으로 암흑기에 빠진 맨체스터 시티6. 탁신과 두번째 중흥기7. 만수르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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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축구 클럽 맨체스터 시티 FC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맨체스터 시티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다음으로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가장 성공적인 구단으로, 특히 1992년 잉글랜드 축구 1부 리그가 프리미어 리그(Premier League)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탄생한 이후에는 21년간 8회의 리그 우승컵을 비롯해 총 25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 창단과 초창기

파일:st-marks-gorton-fc-manchester-city-fc.jpg

1880년, 잉글랜드 맨체스터의 고튼 서부에 위치한 세인트 마크스 교회 (St. Mark's Church)의 교인들이 다분히 인도적인 목적으로 훗날 맨체스터 시티로 알려질 축구 클럽을 창단했다.

당시 많은 실업자와 범죄자들이 맨체스터 동부, 특히 고튼에 만연해있었는데 현지인들을 위한 새로운 활동을 도입함으로써 이것을 개선하고 사회적 병폐를 줄이라는 아서 코넬 (Arthur Connell) 목사의 독려에 따라 교회 관리인인 윌리엄 비스토우 (William Beastow)와 토마스 굿비히어 (Thomas Goodbehere), 그리고 아서 코넬 목사의 딸인 안나 코넬 (Anna Connell)이 세인트 마크스 웨스트 고튼 (St. Mark's West Gorton) 라는 교회 축구 팀을 창단한 것이다.

특히 안나 코넬은 '19세기에 창단된 프로 축구팀 가운데, 창단 멤버 중에 유일한 여성'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게다가 안나 코넬이 창단에 큰 기여를 했는데 원래는 크리켓이나 럭비 팀을 만들려고 했는데 당시 지방 음주 노숙자라든지 여러 사회 문제가 된 알코올 중독자를 위한 스포츠로 두 종목은 맞지 않는다며[1] 축구팀을 만들자고 건의한 게 그녀였다고 한다.[2]

1884년,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의 또 다른 축구 클럽인 고튼 애슬레틱과 합병되지만 불과 한 시즌 뒤에 세인트 마크스는 고튼 AFC로, 고튼 애슬레틱은 웨스트 고튼 애슬레틱으로 분리되었다. 1887년에 연고지를 맨체스터 시 동부에 위치한 아드윅이란 동네로 옮겨 클럽 이름을 아드윅 AFC로 바꾸고, 홈 구장도 하이드 로드로 옮기게 된다. 1889년에는 하이드 로드 근처의 탄광에서 폭발 사고가 일어나 23명의 광부가 사망하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고, 아드윅 AFC와 뉴턴 히스(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가 지역 주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 마련 자선 경기를 치르기도 하였다.

3. 맨체스터 시티의 첫 중흥기

1892년, 잉글랜드 축구 2부 리그가 설립되어 아드윅 AFC가 창립 멤버로 참가했다. 1894년에는 팀 이름을 맨체스터 시티 FC로 바꾸고, 1898-99 시즌에 1부 리그로 올라왔으나 2시즌 이후 강등당했다. 그러다가 1시즌 만에 승격함과 동시에 바로 다음 해인 1903-04 시즌 볼턴 원더러스를 꺾고 FA컵 우승과 리그 2위의 성적을 거두며 기적적이고 극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이 성과를 바탕으로 잉글랜드 전역에 이름을 알렸지만, 오래가지 않아 다시 강등과 승격을 거치며 중소 구단으로서 지내야 했다. 그 와중에 1923년 홈구장 하이드 로드가 불에 타버려서 메인 로드로 경기장을 옮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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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26 시즌에는 감독 없이 FA컵 우승을 차지하였고, 맨유 원정에서 6-1로 역사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1928년에는 최고의 서포터즈를 가진 클럽으로 선정되기도 했고 1934년, FA컵 우승과 1936-37 시즌에 맨시티도 첫 리그 우승의 감격을 누린다.

하지만 1937-38 시즌, 리그 42경기에서 80골이나 넣는 공격력을 보유하고도 77실점이나 허용하는 수비진 탓에 강등을 경험한다. 결국 맨시티는 지금까지 다음 시즌에 강등된 유일한 디펜딩 챔피언이자 실점보다 높은 득점(+3)을 기록하고도 강등된 유일한 팀으로 남는다. 그래서 이후 1951년에 지금까지도 맨체스터 시티 역사상 최고의 골키퍼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전쟁 포로 독일인 골키퍼 베르트 트라우트만을 전격 영입하고, 수비를 강화하면서 전력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1955년에 FA컵 결승전에서 뉴캐슬에게 패해 우승컵을 내주지만, 1년 후 다시 결승에 진출해 우승한다. 1958년 뮌헨 참사에서 맨시티의 골키퍼였으며 기자로 활동하였던 프랭크 스위프트[3]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4. 조 머서의 부임, 첫 번째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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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에 조 머서가 감독으로, '빅 말(Big Mal)'이라는 닉네임을 막 달았던 말콤 앨리슨이 코치로 맨체스터 시티에 부임했다.

머서와 앨리슨의 부임 이후 맨시티는 큰 변혁을 맞았다. 조 머서 감독의 지휘 아래 말콤 앨리슨은 프랜시스 리, 콜린 벨, 마이크 서머비 삼총사를 중심으로 활력 넘치는 공격진을 만들었다. 간단하지 않은 전술과 투지 넘치고 정교한 축구를 3년 연속 이어간다. 이 시기에 디비전 2 우승을 차지하며 디비전 1 복귀, 1967-68 시즌 팀의 두 번째 풋볼 리그 디비전 1 우승, 1968-69 시즌 FA컵 우승, 그리고 1969-70 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 FA 채리티 실드와 함께 맨시티의 최초의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인 UEFA 컵위너스컵 우승까지 달성한다.

이 모든 것은 단 4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영광의 시대도 잠시 1971년, 피터 스웨일스 회장 취임 후 조 머서가 맨시티를 떠났고, 1972년, 구단 엠블럼을 변경한다. 이후 1973년, 맨시티 성공의 주역이었던 앨리슨 역시 팀을 떠났다. 이후 1975-76 시즌 풋볼 리그 컵 우승을 하지만, 1981년 FA컵 준우승 이후로 우승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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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당시에도 맨시티는 잉글랜드에서 가장 큰 구장 중 하나를 가진 인기 클럽으로서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한 1980년대에도 꾸준히 관중 순위 3~4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영광의 시간 뒤에 구단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 찾아오게 되는데..

5. 경영난으로 암흑기에 빠진 맨체스터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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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체스터 시티는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되는 시기인 1992년~2000년대 중후반까지 구단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를 보냈다. 100년 동안 리그에서 가장 입지가 탄탄한 터줏대감 중 하나로 중상위권 팀이었던 맨시티가, 이 시기에 하위권을 전전하며 강등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1994년, 팀을 방만하게 운영해 온 피터 스웨일스는 사임하고, 팀의 레전드인 프랜시스 리가 회장으로 부임한다. 그럼에도 팀의 경영은 갈수록 더 악화되어 1995-96 시즌 당시 퍼스트 디비전 (2부), 더 나아가 1997-98 시즌 세컨드 디비전, 즉 3부 리그까지 강등되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이것은 유럽 대항전 우승팀 역사상 최초로( UEFA 컵 위너스컵 우승) 3부 리그 강등 기록이라는 불명예였다. 이는 2004-05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을 가진 노팅엄 포레스트 FC가 리그 원으로 강등되기 전까지 유일한 기록이었다.[4] 맨체스터 시티가 과거의 영광에 비해 얼마나 암흑기를 크게 맞이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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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1시즌 만인 1998-99 시즌 도중에 데이비드 번스타인 회장과 조 로일 감독이 각각 취임하여 버뮤다 출신의 무명 공격수 숀 고터의 활약에 힘입어 1999년에 다시 2부 리그로 승격했고[5] 1999-00 시즌에 2부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블랙번 로버스를 꺾고 프리미어 리그로 승격하였으나, 한 시즌 만에 18위로 아쉽게 강등당했다.

그 사이 덴마크 같은 유럽 축구 변방과 제3세계 등지에서 젊은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 보강에 주력한 후, 2001-02 시즌에 새로 부임한 케빈 키건의 지휘 하에 리그 1위를 차지해 프리미어 리그로 단숨에 올라왔다. 승격 첫 시즌인 2002-03 시즌에 상대 팀에 따라 기복이 심하고 수비가 약해 54점 실점을 기록했으나, 9위로 마감하여 다크 호스 역할을 했다. 해당 시즌 우승팀이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매치업에서 1승 1무로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정든 메인 로드를 떠나 새 구장인 시티 오브 맨체스터 스타디움으로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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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장 이전 후 수비를 보강하기 위해 아스날의 명수문장 데이비드 시먼을 영입하고, 공격수로는 니콜라 아넬카, 풋볼 리그 디비전 1으로 막 강등당한 웨스트햄 유나이티드로부터 미드필더 트레버 싱클레어를 사들여 전력 안정을 꾀하고자 했으나, 뜻대로 안 되어 리그 성적은 연이어 2004-05 시즌 빼고 16위, 15위, 14위를 각각 기록했고, 하위 팀으로서 강등을 겨우 모면하는 신세인 팀이었다. 2006-07 시즌에는 리그 컵에서 3부 리그 팀 체스터필드에게 패하고, 리그 내내 홈에서 10골만을 넣고, 리그 후반기인 2007년 1월 1일 에버튼전에서 골 넣고 나선 홈에서 단 한 골도 못 넣는 미친 대활약을 벌이면서[6] 강등을 겨우 모면하고, 이때 감독 스튜어트 피어스는 맨시티의 흑역사가 되어 쫓겨난다.[7]

6. 탁신과 두번째 중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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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년 전 쿠데타로 태국에서 쫓겨난 전 타이 총리 탁신 친나왓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구단을 매입한다. 당시 맨시티 서포터들이나 영국 반응은 무덤덤했다. 탁신은 2004년에 리버풀 FC를 인수하려다 실패했었고 이 와중에 자신이 리버풀 팬이란 언론 홍보를 하는 바람에 맨시티 팬들은 "리버풀에서 거절하자 꿩 대신 닭이라고 맨시티를 샀다"라며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맨체스터 시티는 과거 잉글랜드 국대를 지휘한 바 있는 스벤예란 에릭손 감독과 프리미어 리그에서 통할 만한 몇몇 선수들을 영입했다. 일라누 마르틴 페트로프가 대표적이다. 그 외의 영입으로는 롤란도 비앙키, 발레리 보지노프, 베드란 촐루카, 지오반니, 젤손 페르난지스, 하비에르 가리도가 있다.

2007-08 시즌 맨시티는 초반 리그 3연승을 거두며 선두에 오르기도 했고, 맨유에 홈, 어웨이 모두 승리를 거두는 등[8] 좋은 성적을 내며 리그 2/3 정도 치른 시점까지 챔피언스 리그를 사정권에 두었다. 첼시 원정 0:6 패배, 마지막 경기인 미들즈브러 원정에서 1:8 대패라는 옥에 티도 있었지만 리처드 던 마이카 리차즈의 센터백 라인은 맨시티의 호성적에 큰 뒷받침이 되었다. 그리고 이적생인 엘라누와 마르틴 페트로프도 적응기 없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돌풍 팀들이 그렇듯이 맨유 원정 승리 후 리그 12경기에서 3승 2무 7패에 그치며 최종 성적 9위로 리그를 마쳤다. 9위로 리그를 마쳤지만 그해 페어 플레이 팀으로 선정되며 1차 예선부터 UEFA 컵에 출전할 수 있는 진출권을 따내는 성과를 올렸다. 영국 언론 포포투에서는 9위도 잘한 것이라는 평을 내렸다.

하지만 탁신은 팀을 5년 만에 UEFA 컵에 진출시킨 감독을 경질하고[9][10], 호나우지뉴를 영입하겠다고 떠들면서 정작 팀의 주전 수비수 리처드 던의 주급을 올려주지 못해 잃을 뻔할 정도로 한심하고 답이 없는 운용을 거듭하다가 태국에 있던 그의 자금이 법으로 막혀버리자 구단을 냅다 알 파힘을 통해 만수르에게 팔아 버렸다. 탁신은 덕분에 2배 이상 이득을 보았고 탁신의 후광을 입고 맨시티에 입단했던 태국 선수 3명은 2008년 10월에 전원 방출되었다.

또한 이 당시의 맨체스터 시티에 대해 국내에서는 쑨지하이가 활약한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쑨지하이는 2001-02 시즌 겨울 이적시장에 이적했고, 다음 시즌 탁신이 구단주로 취임하기 전, 2007-08 시즌 이전까지 계속 주전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탁신이 구단주가 된 이후 선수 보강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잃어 결국 2008년 셰필드 유나이티드로 이적했다.

또한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고의 악동 중 한 명인 조이 바튼이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일으키면서 한국 언론에서 종종 이름이 언급되기도 했고,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마르크비비앙 푀의 소속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11] 페테르 슈마이켈 데이비드 시먼 등 특급 수문장들도 이곳에서 선수 말년을 보냈다.

7. 만수르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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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르의 인수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시즌은 개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7.1. 마크 휴즈의 부임과 과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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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0대 감독
마크 휴즈

7.1.1. 2008-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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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당시 호비뉴를 깜짝 영입하며 세계를 놀래켰고, 많은 선수들을 영입했지만 리그 10위 기대 이하의 성적으로 시즌을 마무리 했다. 페어플레이로 진출했던 UEFA컵에서는 8강까지 진출했다.

7.1.2. 2009-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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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선수들을 대거 영입[12]하면서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으나 마크 휴즈의 역량으로는 팀을 이끌기 무리였고 시즌 중반 성적 부진으로 경질 당하고 로베르토 만치니가 부임하며 팀을 빠르게 정비해가며 리그 5위로 마무리하며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7.2.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클래식 만치니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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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대 감독
로베르토 만치니

7.2.1. 201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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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리그 최소 실점으로 시즌을 마무리하며 우승을 도전했으나 테베즈에게만 의존하는 공격력이 발목을 붙잡았다. 리그를 3위로 마무리하고 FA컵을 우승하며 팀에게 43년만에 트로피를 안겼는데 특히 라이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4강에서 격파하며 우승했기에 더욱 더 의미가 있는 트로피였다.

7.2.2.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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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에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리그를 휩쓸었고 그 중심에는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6대1로 격파한 경기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중반부터 기세가 꺾이면서 마지막까지 결과를 모르는 리그 레이스를 보였지만 기적같은 마지막 경기로 44년만에 리그 우승을 성공하였으나, 아쉽게도 챔스에서 조별 탈락을 하며 쓴 고비를 맞은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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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3.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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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다시 한 번 팀을 개편하려는 만치니의 영입 리스트[13]가 모두 실패로 돌아가며 시즌 초반부터 보드진과의 삐걱이는 모습이 있었고, 리그는 맨유에게 내주며 2위를 기록하고 챔스 역사에 손에 꼽을 죽음의 조에 편성되고 3무 3패로 4위로 탈락하는 굴욕을 맞보기도 했고, FA컵 결승에서는 압도적인 언더독이었던 위건에게 충격적인 패배를 당해 준우승을 기록하여 만치니를 경질한다.

7.3. 나름의 성공을 거둔 펠레그리니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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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대 감독
마누엘 펠레그리니

7.3.1. 2013-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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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새로 부임한 펠레그리니와 함께 라리가 선수들을 대거 영입했고 막강한 공격력으로 리그 최다 득점을 기록하며 리그 우승, 캐피탈 원 컵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하고 챔스도 조 2위로 구단 처음으로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리오넬 메시의 바르셀로나에게 덜미를 잡히며 16강에서 마무리했다. 하지만 단단한 수비를 구축한 경기를 보여줬던 만치니에 비해 화끈하고 스피드한 공격으로 즐거움을 준 펠레그리니의 축구는 다음 시즌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7.3.2. 2014-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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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적지않은 이적료를 투자하여 다시 선수들을 영입했으나 영입생들이 모두 기대이하의 모습을 보였고 지난 시즌과는 다르게 선수들 개인 능력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지며 힘겹게 우승경쟁을 이어 나갔으나 리그 2위로 마무리하며 무관으로 끝냈고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선수단을 보며 다음 시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7.3.3.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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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맨시티의 핵심이 될 영입들[14]을 성공시키며 영입생은 아주 성공적이었으나 리그에서 힘도 못쓰며 힘겹게 4위 싸움을 하며 4위로 챔스권에 안착했으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역으로 4강까지 진출했으나 에이징커브로 폼이 심각하게 떨어져 강팀과의 경기에서는 오히려 팀에게 약점으로 작용했던 야야 투레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2차전에서 선발 출전 시켜버렸고 그 영향으로 탈락해버리며 4강에서 마무리 한다.

그래도 리그컵을 우승하며 결과로만 보면 리그 4위, 챔스 4강, FA컵 16강, 리그컵 우승으로 좋아 보이지만 심각했던 리그에서의 경기력과 노쇠화한 선수단을 하나도 개편하지 않아서 아쉬움이 훨씬 큰 시즌이었다. 하지만 시즌 중반에 펩 과르디올라가 다음 시즌 부임한다는 기사가 공개되었지만 불편한 기색 없이 잔여 시즌을 신사적으로 치러준 펠레그리니의 놀라움도 볼 수 있는 시즌이었다.

7.4. 펩 과르디올라 체제 이후 (20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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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대 감독
펩 과르디올라

7.4.1.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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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 과르디올라의 첫 번째 시즌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2016-17 시즌은 명백한 실패였다. 무관으로 시즌을 마쳤고, 리그에서는 2위에 한참 뒤진 3위를 기록했다.

시즌을 시작했을 때는 연승 행진을 달리며 순항했으나, 귄도안이 시즌 아웃 부상을 당하고, 상대 감독들이 파훼 전술을 들고 나오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문제점을 세가지로 나눈다면 스쿼드 상의 문제, 전술 상의 문제, 그리고 불운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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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2.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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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그에서 압도적인 경기력과 함께 역사에 남을 기록과 레이스를 보이며 PL 역사상 최다 승점 (100점)을 달성한 시즌이다.

또한 연승 기록, 최다 승 기록, 2위와 최다 승점 차 기록, 최다 골득실 기록 등등 셀 수도 없이 PL의 많은 기록들을 경신했다. 특히 폭발적인 공격력과 함께 그야말로 역사적인 리그 레이스를 보였다. 더불어 EFL컵에서도 우승하며 국내 컵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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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3.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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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한 대단히 성공적인 시즌이다. 비록 챔피언스 리그 8강 토트넘과의 경기에서 아쉽게 미끄러졌지만 특히나 주전 멤버 2명인 케빈 더 브라위너 뱅자맹 멘디가 반복되는 부상으로 사실상 시즌 내내 제대로 뛰지 못했던 것을 감안하면, 매우 완벽했던 시즌이다. 더불어 베르나르두 실바 올렉산드르 진첸코가 각성하며 주전으로 발돋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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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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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0 시즌 맨체스터 시티의 성과는 아쉽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물론 커뮤니티 쉴드와 카라바오 컵은 따냈으나, 더 굵직하고 무게감 있는 메이저 트로피를 들어올리는데는 실패하였다.

우선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최종 2위로 준우승을 거뒀으나, 시즌 내내 압도적인 선두를 달리던 리버풀에게 무려 승점 18점 차로 우승 경쟁에서 크게 밀리는 수모를 겪고 말았다. 특히 리버풀이 PL 역사상 가장 빠른 라운드에 우승을 확정짓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어서 FA컵에서는 순조롭게 4강까지 진출했으나, 아스날에게 일격을 당하며 탈락하였다.

아쉬웠던 2019-20 시즌, 그리고 2020-21 시즌 초반의 부진 때문에 펩의 전성기가 지났다는 평가까지 나왔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2019-20 시즌의 실패는 2020-21 시즌 극적인 반등에 성공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되었다. 이는 펩이 실수를 인정하고 변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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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5.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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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적으로 객관적인 트로피 성과로 보면 펩 과르디올라 부임 이후 2017-18, 2018-19 시즌 못지 않은 최고의 시즌이라고 볼 수도 있다. 리그와 리그컵을 들어올리고 구단 역사상 최초로 챔스 결승전에 진출했기 때문. 그러나 또 다시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패착으로 인하여 맨 마지막 가장 큰 무대에서의 우승 기회를 날려버려 아쉬운 느낌이 드는 시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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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6.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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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한 전력상 약점을 가지고 시작한 시즌이다. 스트라이커 포지션에서는 구단의 레전드인 세르히오 아궤로의 대체자인 해리 케인의 영입 실패로 인해 제로톱 전술을 계속 운용할 수밖에 없었고 레프트백 뱅자맹 멘디의 성범죄 기소로 인한 퇴출 때문에 풀백 뎁스에 구멍이 뚫린채로 시즌을 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그를 2년 연속으로 우승하며 최근 5년간 4번이나 우승을 차지한 팀이 되었다. 다만 팀의 숙원인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집중력 차이로 매우 아쉽게 패배하고 말았다. 특히 이번에는 감독의 전술적 실책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뼈아픈 탈락이었다.

더불어 항상 1개씩은 우승해오던 국내 컵도 하나도 들어올리지 못하였다. 하지만 리그 연속 우승을 차지한 것은 전체적으로 보면 거대한 성과로 나름대로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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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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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이래 최초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1999년의 맨유에 이어 프리미어 리그 역대 2번째 트레블까지 달성한 구단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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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톱 전술에서 벗어나고 엘링 홀란드라는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를 영입했지만 시즌 중반까지만 해도 리그에서는 아스날의 기세에 밀렸다. 특히 겨울 이적시장에서 핵심 멤버였던 주앙 칸셀루가 감독과의 불화로 이탈하는 바람에 우려섞인 목소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겨울을 거쳐 펩의 창의적인 전술 변화 그리고 케빈 더 브라위너, 로드리, 후벵 디아스의 포지션별 세계 최고의 선수들의 미친 활약과 일카이 귄도안, 존 스톤스와 같은 기존 멤버들의 각성으로 오히려 겨울 이후 엄청난 상승세를 보이며 역대급 페이스를 이어간 시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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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8.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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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창단 이래 최초로 첫 UEFA 슈퍼컵, FIFA 클럽 월드컵을 제패함과 동시에 영국 역사상 최초의 5관왕을 달성하였다. 그리고 리버풀(1976~77시즌) - 아스날(1990~1991시즌) - 맨유(1995~96시즌)에 이어 10번째 리그 우승을 거두는 4번째 프리미어 리그 팀이자, 프리미어 리그 및 잉글랜드 1부리그 역사상 최초로 리그 4연속 우승이라는 첫 번째 팀이라는 대성과를 이루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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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 2024-2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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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연속 지긋지긋한 준우승을 하던 커뮤니티 실드를 비주전이 많은 상황에서 승부차기 끝에 우승하며 좋은 시즌 출발을 알렸다.

그러나 펩시티 왕조의 주축 선수들인 로드리, 케빈 더 브라위너의 부상과 카일 워커, 일카이 귄도안, 베르나르두 실바의 노쇠화, 후벵 디아스, 존 스톤스와 같은 핵심 수비진들의 줄부상 및 오스카 밥의 장기 부상과 필 포든의 갑작스러운 폼 하락까지, 스몰스쿼드의 단점과 선수들의 에이징커브, 각종 부상까지 겹쳐 성적만으로도 2019-20 시즌을 뛰어넘는 펩시티 역사상 최악의 시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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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닌 게 아니라 이전에 있던 다른 교회 크리켓 팀에서 크리켓 배트로 상대방을 두들겨 패고 패싸움이 벌어졌었고, 럭비팀에서도 공은 내팽개치고 사람을 들이받아 싸우기 일쑤였다고... [2] 2016년 9월호 베스트 일레븐 지 출처. [3] 20세기 맨시티 역대 키퍼 중 베르트 트라우트만 다음으로 뛰어났다고 꼽히는 레전드 키퍼이다. [4] 2019년에는 UEFA컵 우승경력의 입스위치 타운 FC가 3부 리그로 떨어지며 또 하나의 사례가 추가되었다. [5] 과정이 굉장히 드라마틱했다. 3부 리그 3위로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맨시티는 6위였던 위건 애슬레틱을 제압하고 결승에서 프레스턴 노스 엔드를 제압한 질링엄 FC와 상대해야 했다. 당시 질링엄 감독은 토니 퓰리스. 맨시티는 질링엄을 상대로 후반 36분과 후반 41분에 실점하며 승격은 물건너가는 듯했는데, 추가 시간에만 2골을 득점하며 승부를 극적으로 연장으로 끌고 갔고, 결국 승부차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2부 리그 승격에 성공했다. [6] 마지막 홈경기 2경기에서 모두 PK를 얻고도 득점에 실패했다. 홈 최종전이 라이벌 맨유전이었는데 여기서 0-1로 패하면서 맨유는 리그 우승 초읽기에 들어갔고 다음날 첼시의 무승부로 우승에 성공했다. [7] 참고로 이 당시 피어스는 잉글랜드 청소년 대표팀 감독을 겸임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소속 팀에 집중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더욱 거셌다. 물론 맨시티에서 경질된 이후에도 청소년 대표팀 자리는 유지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몇년간 키워온 선수들을 이끌고 2012 런던 올림픽에 나섰지만 8강에서 한국에게 져 탈락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8] 2008년 2월 10일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뮌헨 참사 50주년을 추모하는 기념식이 있었는데 맨시티가 맨유를 2:1로 꺾으며 맨유 팬들을 더더욱 슬픔에 잠기게 만들었다. [9] 이때 맨시티 팬들은 에릭손을 지킨다며 Save Our Sven, 줄여서 SOS 캠페인을 벌이지만 실패한다. [10] 에릭손 감독의 후임으로 마크 휴즈가 맨시티의 감독이 되었다. 맨유 레전드가 맨시티의 감독이 되어 논란이 있었다. [11] 임대 신분으로 맨체스터 시티에 합류했었다. [12] 테베즈, 아데바요르, 산타 크루즈, 가레스 배리, 콜로 투레 [13] 반 페르시, 에덴 아자르, 데 로시 [14] 케빈 더 브라위너, 라힘 스털링, 니콜라스 오타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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