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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7 02:46:06

만인소

1. 개요2. 역사3. 매체4. 역대 만인소

1. 개요

만인소()는 조선시대 상소의 일종으로 공론을 중시한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생들이 조정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할 경우 1만여 명 내외의 서명을 받아 공동 명의로 조정에 의견을 제시해 반대 여론을 공론화하는 방법이다. 쉽게 말해서 조선 시대의 범국민 서명운동인 셈.

2. 역사



조선 역사 기록에 남은 만인소는 정조 16년(1792년)을 시작으로 19세기 말까지 총 7차례 있었다.

최초의 만인소는 노론 관료 유성환이 정조가 주색잡기에 빠졌다는 내용으로 상소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역대 조선 왕들 중 가장 자기 관리가 철저했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트집잡기에 발분한 영남 지방 유생들이 집단상소를 올렸고 그게 바로 만인소의 시작이었다. 당시 만인소에는 유성환의 처벌과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한 노론에 대한 처벌의 요구가 적혀 있었다. 여기서 진짜 무서운 것은 '만인소'라는 이름 그대로 상소에 참여한 사람의 숫자가 만 명이 넘는다. 정확히는 1만 57명. 사실 집단상소는 이전에도 있었고( 1565년 백인소, 1666년 천인소) 그 전통이 만인소의 바탕이 된 것이라고 볼수있다.

3. 매체

임오화변을 다룬 사도에서 사도세자의 추숭을 부르짖는 영남 만인소 장면이 나올 뻔 했으나 영화의 엔딩이 늘어지는 관계로 편집당했다. 윤허하지 않으실꺼면 여기 가져온 도끼로 목을 치라는, 그리고 그걸 반대하는 신하들의 사도세자 추숭할 거면 우리들 목부터 날리라는 캐삭빵지부상소는 덤. 궁문 바깥까지 이어지는 엄청난 길이의 상소문 두루마리를 정조가 걸어가며 보다 궁문 바깥을 뒤덮은 채 읍소하는 일만 유생들의 모습을 보며 착잡해하는 장면이지만 잘려나간 관계로 CG 처리를 위한 초록벽이 남아있는등 불완전한 상태로만 유튜브에 공개되어 있다.

대통령 각하 만세에서 면암 최익현을 필두로 외세의 바짓가랑이를 기며 국가와 황실을 능멸하는 주인공 조지원을 비판하는 유생들의 만인소가 작성되었다. 허나, 어전에 가지도 못하고, 조지원에게 감회된 김좌진 등의 청년단원들에게 백주대낮에 경성 시민들 앞에서 조롱의 멸시를 받음과 동시에 불쏘시개가 되어 버렸다. 이후 참가한 유생들은 문화대혁명 때 반동이라 규정되었던 이들처럼 조리돌림을 당하고 최익현은 불온세력의 수뇌라는 명목으로 사형을 당하면서 종식된다.

고종, 군밤의 왕에서는 의외로 중국, 청나라에서 발생한다. 조선이 순조롭게 개화하는 모습을 보고 자국을 걱정한 강남(중국)]] 향신들 사이에서 "근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조선처럼 의회를 설치하여 천하의 공의를 모으고 부세의 쓰임을 놓고 가부를 결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형성되고 있었는데, 강유위가 '천하의 흥망에 필부도 책임이 있다.'는 '조선변정고'의 마지막 문장이 문제가 되어 투옥당했고, 이로 인해 한(漢)인 사이에서 "만인 조정을 믿을 수 없다"는 반감이 확산되었으나, 어쩌다 보니 흥한 운동의 구심점이 된 유영복의 주도로 강남에 효도관광 중이었던 김병국의 조언을 받아 강유위의 신원 보호, 의회 설치를 주장하는 만인소 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은 중국. 병국은 중국의 엄청난 인구를 미처 고려하지 못해 양가 일대의 서생이 결코 일만 명으로 끝나지 않고 더 퍼져나갈 것이라는 것을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주만인소, 항주만인소, 소흥만인소, 통주만인소를 시작으로 만인소 행렬이 퍼져나가며 각 주, 군, 현에서 작성된 만인소가 쉴 새 없이 올라오고 강소성과 절강성을 넘어 안휘, 호북, 강서에서도 소가 올라오니 만인소가 아니라 수백만인소에 가까웠고 이렇게 많은 백성들과 향신들의 열정이 그동안 허수아비 천자 노릇을 하던 광서제를 각성시켜 광서제가 헌법 설치를 허가하고 천자로서의 권위를 되찾아 체계적인 근대화의 동력을 얻는다.

4. 역대 만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