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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2-21 03:07:09

계종(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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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조 10대 황제
系宗 惠王 | 계종 혜왕
묘호 계종(系宗)
시호 환천성지분문양무혜대왕
(桓天聲地奮文揚武慧大王)
연호 영창(永昌, Vĩnh Xương)
막(Mạc / 莫)
응우옌타인(Kính Quang / 元淸 / 원청)
낀헤(Kính Hẻ / 敬喜 / 경희)
낀투이(Kính Thuỵ/ 莫敬瑞 / 敬瑞 / 경서)
생몰 기간 ? ~ 1681년
재위 기간 1661년 ~ 1681년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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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막응우옌타인(Mạc Nguyên Thanh|hn/莫元淸, 막원청, ? ~ 1681년)은 대월 막 왕조의 제10대 황제(재위: 1661년 ~ 1681년)로 명종 막낀지에우의 아들이었다. 베트남 사서에는 명종 막낀부 청나라에 책봉을 요청했을 때 '막응우옌타인'으로 개명한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뉴쥔카이(牛軍凱)[1] 교수는 청나라의 당안(檔案) 연구에 의거해 막응우옌타인은 실제로 베트남 사서에 있는 '막낀투이'(Mạc Kính Thuỵ, 莫敬瑞/막경서)라고 주장했으며, '빈쓰엉'이 막응우옌타인의 연호이고, 자신의 책에 있는 막씨 계보 항목에서 막응우옌타인의 묘호를 '계종'(系宗)이라고 했다. 우군개 교수는 막 왕조는 후대에도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해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2. 생애

1661년 6월, 청나라는 명종 막낀지에우를 귀화장군(歸化將軍)으로 책봉했다. 같은해 12월, 청나라는 막낀지에우의 아들 막응우옌타인을 안남도통사(安南都統使)로 책봉했다. 막응우옌타인은 청나라에 진공했고, 아울러 주(奏)를 올려 말하기를,
"편방(徧方)이 협소하니, 뒤를 이은 뒤에는 공헌(貢獻)하는 것을 면하도록 하기를 요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청 성조 강희제는 이를 윤허하였다.

1662년, 막 왕조가 양산(諒山) 칠천(七泉)에서 후 레 왕조군에게 패배했다.

1666년, 후 레군이 까오방을 공격했으나 막군이 후 레 군의 태원통군공(太原通郡公)을 사로잡으니 후 레군이 철군했다. 이후 후 레군은 다시 까오방으로 진격하여 점령했고, 막 왕조의 궁실을 불태웠다.

1667년, 후 레군이 다시 까오방을 공격하자 막응우옌타인은 운남(雲南)으로 달아났고, 까오방은 함락되었다.

1669년, 강희제가 이선근(李仙根), 양조(楊兆)를 파견해 베트남에 칙유(敕諭)하도록 하여 까오방 4주를 막씨에게 반환하도록 명령했다. 후 레군은 까오방에서 철군했고, 막씨는 까오방으로 돌아왔다.

1673년, 청나라에서 한족 번왕들에 의한 삼번의 대란이 일어나자 막씨가 이를 지지했다.

1677년, 후 레군이 까오방을 공격해 점령하자 막씨 종실들은 광서(廣西)의 용주(龍州)로 도망갔다. 후 레 왕조는 청나라에 막씨가 반란의 수괴 오삼계를 지원했다고 보고하며, 청나라가 막씨를 지지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1681년, 막응우옌타인은 청나라에서 병사했고, 그의 동생 막낀꽝이 뒤를 이었다.

[1] 우군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