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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01:23:21

마호메드 아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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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colbgcolor=#000><colcolor=#fff> 마호메드 아라이
Mahomed Arai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20704730005100_P2.jpg
출생 1988년 ([age(1988-12-31)]~[age(1988-01-01)]세)
소말리아
현재지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대전광역시 유성구 대정동 대전교도소
국적
[[소말리아|]][[틀:국기|]][[틀:국기|]]
직업 어부 해적
종교 이슬람[1]
신분 기결수 (2011년 12월 12일 ~)
교도소 수감부터 D[dday(2011-12-12)]
2031년 1월 21일부터 가석방 심사 가능

1. 개요2. 생애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2011년 삼호 주얼리호 피랍 사건 당시 석해균 선장에게 총을 쏜 소말리아 해적.

2. 생애

그의 원래 직업은 어부였다고 하며 23세 이전에 이미 결혼해서 자식까지 둔 가장이었지만 수입이 적어서 첫째 부인이 떠났을 정도로 가정형편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적회사로부터 해적일을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꼬임을 받았는데 형편이 좋지 않다 보니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해적일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삼호 주얼리호를 나포하려다가 아덴만 여명 작전으로 생포당했고 석해균 선장에게 총을 난사한 혐의로 조사를 받았다. 처음엔 혐의를 부인했으나 생존 선원들이 일관되게 그의 소행임을 주장했고 증거도 명백하여 결국 혐의를 시인했다.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1020704730005100_P2.jpg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50121_0010548504_web.jpg
2011년 체포 후 모습 2015년 1월 사진[2]
우측은 석해균 선장

1심 재판에서 검찰은 사형을 구형했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이유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3] 부산고등법원, 대법원에서 항소와 상고를 기각해 그대로 형이 확정되어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대한민국 국민에게라면 중형이 맞지만 이전에 하루 세끼 꼬박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었다는 점이나 소말리아의 열악한 치안을 감안하면 이 사람에게는 자유만 없을 뿐이고 적절한 의식주가 제공되는 안락한 여생이 어느 정도는 보장된 셈이다. 맨 위 사진에서 보듯이 체포 직후에는 깡말랐으나 복역하면서 푸짐하게 살이 붙었는데 교도소에서 살이 10kg이나 쪘다고 한다.

2014년 1월, 교도소 생활에 대해 인터뷰한 그는 “식사할 때면 문득문득 소말리아에서 굶고 지낼 아이들이 생각나 눈물이 나곤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음식에 대해 “무척 맛있다”며 “생선튀김, 생선조림, 오징어, 어묵이 맛있다”고 말했다.

또한 “(석 선장이) 살아났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기뻤다”며 “기회가 온다면 석 선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싶다”고 밝혔다. #
파일:external/pds.joins.com/NISI20150121_0010548503_web.jpg

2015년 1월 14일, 석해균 선장이 대전교도소로 직접 찾아가 그를 면회했다. 석 선장은 마호메드 아라이를 직접 용서하고 포옹했으며, 기술을 배우라고 조언을 해 줬다고 한다. #


해당 영상 42분부터 대전교도소에 수감 중인 그의 모습과 석해균 선장과의 재회 장면이 나온다.

이외 유기징역을 선고받았던 다른 소말리아 해적 5명은 전원 출소했으며, 1명을 제외하고 강제퇴거 집행되었다고 한다. 본국인 소말리아로 추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2024년, 한 교도관의 인터뷰에 따르면 일도 굉장히 잘하고 공장에 물건이 들어오면 “오라이 오라이~~”라고 할 만큼 적응했다고 한다. #

3. 관련 문서



[1] 2014년 중앙일보 인터뷰 [2] 소말리아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치안도 안전한 한국 생활에 적응해서인지 체포 당시보다 체격이 꽤 후덕해졌다. [3] 살인미수로써 받을 수 있는 사실상 최고형으로, 다시 말해 이 살인이 기수였다면 무조건 사형이었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