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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2 00:30:46

마이클 스핀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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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마이클 스콧
(1977~1981)
제2대
마이크 마쿨라
(1981~1983)
제3대
존 스컬리
(1983~1993)
제4대
마이클 스핀들러
(1993~1996)
제5대
길 아멜리오
(1996~1997)
제6대
스티브 잡스
(2000~2011)
제7대
팀 쿡
(2011~ )
창업주 · 이사회 · 이사회 의장 · 현직 경영진 }}}}}}}}}


1. 개요2. 경력
2.1. Apple 이전의 경력2.2. Apple로 이직2.3. Apple 암군
3. 관련 문서

1. 개요

Michael Spindler

Apple Inc.의 제 4대 CEO. 1942년 12월 22일 나치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2016년 9월 5일 향년 73세로 병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출생 | 1942년 12월 22일
사망 | 2016년 9월 5일 (향년 73세)

2. 경력

2.1. Apple 이전의 경력

쾰른 공학 대학교의 전기 공학을 전공, 졸업했다. 그는 DEC를 거쳐 인텔의 유럽 사무소에서 마케팅을 담당했다. 그러던 도중 인텔의 이사회에 있었던 마이크 마쿨라의 눈에 띄게 되었다. 마이크 마쿨라는 마이클 스핀들러의 마케팅 실력의 유능함을 보며 1980년 Apple의 유럽 본부로 이끌었다.

2.2. Apple로 이직

그는 지역별 맞춤 마케팅 전략으로 Apple에서 유명해졌다. 유럽에서 공격적인 광고 전략으로 Apple II를 유럽의 컴퓨터들, BBC 마이크로, Amstrad, ZX 스펙트럼과 경쟁해 성공적인 실적을 거두었다. 칸지토크도 그가 주장해 만들어진 것으로 그덕에 폐쇄적인 일본 시장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 덕에 그는 승승장구하였고 존 스컬리의 눈에 띄어 본사로 이동하게 되었다.

당시 존 스컬리의 2인자였던 장 루이 가세가 아쿠아리우스 프로젝트 실패, 1989년 컴퓨터 부품 폭등을 이유로 Macintosh 29% 가격 인상, 어도비를 배신하고 마이크로소프트와 트루타입 기술 개발 같은 일련의 실수 등을 이유로, 1990년 Apple을 떠나게 되자 그는 명실상부한 존 스컬리의 2인자가 되었다. 1990년 그는 승진해 COO에 취임할 수 있었다.

1992년 그는 존 스컬리와 함께 IBM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이른바 AIM(Apple-IBM- Motorola) 동맹이 이 시기에 시작한 것이다. 또한 고마진 정책을 포기하고, Macintosh Classic이나 Macintosh LC를 만들기 시작한 것도 그의 추천을 존 스컬리가 승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마이클 스핀들러의 저가형 Macintosh 정책은 매출액 성장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마진율이 급격히 하락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존 스컬리는 이 시기에 엉뚱한 곳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 1992년에는 마침 미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빌 클린턴의 정보고속도로 공약에 감화된 존 스컬리는 빌 클린턴의 민주당 선거 캠프를 돕는다며 회사 일에 등한시 했다. 이 때문에 이사회에 단단히 낙인 찍히게 됐다. 또한 존 스컬리가 가장 관심을 갖고 추진했던 Newton MessagePad는 크게 실패했다.

존 스컬리는 마지막으로 Apple의 운영 체제 사업부와 Macintosh 사업부의 회사 분할을 추진했고, 마이클 스핀들러에게 가칭 Macintosh Company를 맡아주길 요청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뿐 아니라 누구도 Macintosh Company에 일하길 원치 않았다. 운영 체제 사업부였던 가칭 애플소프트 역시 IBM이 Apple을 위해 새로운 운영 체제인 탈리젠트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분할을 원치 않았다.

이사회는 결국 존 스컬리에게 권고사직을 종용했고, 1993년 10월 15일 그는 Apple을 떠났다. 그리고 이사회는 후임 CEO로 마이클 스핀들러를 선임했다.

2.3. Apple 암군

마이클 스핀들러가 1993년 10월 15일 CEO로 취임했다. 그는 급격한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무려 2500명이나 해고했는데, 이는 당시 Apple 종업원의 15%였다. 또한 존 스컬리 시절부터 우후죽순 늘어난 좀비 프로젝트를 정리하려고 노력하였다. 게다가 회사 식당과 피트니스를 유료화 시켰을 뿐 아니라, 임금을 동결했고, 성과급을 중단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종업원들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마이클 스핀들러는 경영자로서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낯가림이 무척 심한 사람이었고, 언변이 횡설수설했으며, 긴장을 잘해 신경질적이었다. 그래서 존 스컬리는 그를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기자회견에서는 준비된 연설문만 읽고 질문을 받지 않고 나간다던가, 편집장의 밀착 인터뷰 때는 횡설수설 떠드는 바람에 기사를 낼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무능해질 때 까지 승진한다는 경영학 이론인, '피터의 법칙'의 예시로 그가 알맞는 사례일 것이다.

특히 Macintosh의 저변을 넓히겠다며, 클론 프로그램을 추진한 것이 그의 가장 치명적인 실수였다. 클론 프로그램으로 저변이 넓혀지기는 커녕 저렴한 클론들에 의해 상대적으로 고가였던 Apple의 Macintosh만 더 팔리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Apple은 재정난을 겪기 시작했고, 1,300명을 추가로 해고해야 했다.

Microsoft Windows 95 발매도 이 시기였다. Apple이 GUI 운영 체제 기술력으로 경쟁 회사였던 Microsoft에게 추월당한 것에 대한 Apple 내부의 충격이 컸다고 한다.

마이클 스핀들러는 마지막으로 Apple에 가망이 없다고 판단해 인수자를 찾기 시작했다. 그가 찾은 피인수 대상자는 IBM 제너럴 일렉트릭, 썬 마이크로시스템즈였으며, 모두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썬 마이크로시스템즈는 터무니 없는 낮은 가격을 불렀다. 당시 제너럴 일렉트릭의 CEO였던 잭 웰치에 따르면 마이클 스핀들러는 제너럴 일렉트릭에 Apple을 인수해 달라고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Apple 같은 첨단 기술 회사를 제너럴 일렉트릭이 관리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IBM이 그나마 높은 가격을 불렀지만, 이사회가 만족한 가격은 아니었다.

결국 이사회는 스핀들러에게 권고사직을 종용했고, 2년여 만인 1996년 2월 2일 Apple을 떠났다. 후임 CEO는 Apple의 이사 중 하나이면서, 내셔널 세미컨덕터를 경영하고 있었던 길 아멜리오가 맡았다.

3.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