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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30 02:10:02

마릉 전투

마릉 전투
馬陵之戰
Battle of MǎLíng
<colbgcolor=#C0C0FF> 시기 기원전 341년
장소 중국 허베이 성 다밍 현
원인 위(魏)의 한(韓)나라 수도 신정 공격
교전국 제齊 위魏
지휘관 전기
손빈
방연
태자 신(申)†
병력 100,000여 명 100,000여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다수 전사
결과 위나라의 패배
영향 위나라 전성기의 종말

1. 개요2. 배경
2.1. 위혜왕의 확장정책2.2. 제나라의 참전
3.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
3.1. 위나라의 한나라 침공3.2. 제군의 참전과 손빈의 작전3.3. 방연의 반격3.4. 방연이 이곳에서 죽다, 앉은뱅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
4.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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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BC 343년 전기 손빈이 이끄는 제나라군이 마릉에서 위나라 방연의 군대를 대파한 전투. 이 전투에서 손빈은 소수로 다수를 누르고 약세로 강세를 누르는 전법을 구사해 위나라 군사를 크게 이겼다.

훗날 조선시대 무인이자 시인이었던 박인로(朴仁老)가 1605년(선조 38년) 지은 가사(歌辭) 〈선상탄(船上嘆)〉에서도 깨알같이 언급된다.
발 업슨 손빈[1]도 방연을 잡아거든…

2. 배경

2.1. 위혜왕의 확장정책

파일:Wei 341 BC.png

마릉 전투 직전 동아시아 일부의 판도.[2]

전국시대 초창기 패권국은 위나라였다.[3] 위문후는 자하를 스승으로 섬기며 많은 인재를 등용했고 그렇게 등용된 이극, 서문표 등이 입법·행정 체계를 공고히 해 전국시대에 맞춰 새롭게 개편했고 오기· 악양 등의 장수는 정복활동을 펼쳐 위나라의 강역을 넓혔다. 그 후 뒤를 이은 무후 역시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 받아 훌륭한 정치를 펼쳐 위나라의 지위를 반석 위에 올렸다. 당시 위나라는 전국칠웅 중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고 가장 부유한 나라였으며 가장 강한 보병을 가진 국가였다. 그러나 위무후 말기에 들어서 국가 재정의 투자에 비해 손해가 커지는 등 패권 국가의 위상이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무후의 뒤를 이은 위혜왕이 즉위하자 그동안 축적되어왔던 모순들이 표면화되어 혜왕은 즉위 초반부터 많은 난관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위나라가 가졌던 문제는 다음과 같다. 혜왕도 이와 같은 문제점을 대강은 눈치챘기 때문에 나름 계속해서 인재를 등용하고 계속 영역을 확장함으로써 위나라의 패권을 지키려고 했다.[11] 그래서 방연 등을 등용하여 인접국이자 비교적 국력이 약했던 조나라와 한나라를 신나게 털며 세력을 계속 확장했고 표면적으로 위나라의 위세는 전보다 더 강해 보였다.[12]

조나라와 한나라는 이러한 위나라의 침공을 받아 대항했지만 연달아 싸움에 패하자 제나라를 끌어들이게 된다. 위나라 승상 공숙좌나 대장군 방연 같은 인물들이 나름 유능했고 위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강력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2.2. 제나라의 참전

당시 제나라의 왕은 위왕(威王)이었다. 위왕은 학문을 사랑하여 수도 임치의 남문인 직문 주변에 학교를 세우고 여러 인재를 초빙하여 학문을 연구하고 이들을 연구 결과를 정책에 반영했으며 많은 인재들을 영입하여 국력을 크게 신장시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영입한 대표적인 인물들이 추기, 순우곤[13], 전기 손빈이다.

이 가운데 손빈은 원래 위나라의 대장군 방연과 동문수학한 사이였으나 손빈의 재주를 시기한 방연 때문에 무릎뼈가 털리고 앉은뱅이가 되어, 미친 척을 하여 겨우 목숨을 보존하다 제나라 사신 손에 구조되어 군사까지 되었으니 방연에 대한 분노가 상당했다. 자세한 내용은 손빈 항목 참조. 기록상으로나 결과가 보여지는 점이나 방연을 압도했던 손빈이 제나라의 군권을 잡은 만큼 제나라의 병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결국 위나라가 방연을 대장군으로 삼아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조나라가 제나라에 SOS를 치면서 제·위 두 나라는 본격적으로 패권을 위한 전투를 시작하게 되었다. 제위왕이 전기를 보내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자, 손빈은 지금 위군의 정예병이 모두 조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빠져있으니 위나라 동도(東都) 대량으로 바로 쳐들어가면 손 안 대고 코 풀 수 있을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전기가 그 말대로 하자 조나라 상대로 한창 기세를 올리고 있던 방연은 포위를 풀어버리고 급히 회군했는데, 손빈은 방연의 이러한 행위를 미리 예상하고 계릉 땅에서 병사들을 충분히 휴식시켜주며 위군이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고 결국 피로한 상태였던 위군은 제군의 복병과 포위전술에 말려들어 크게 패하고 말았다.

방연을 대패시킨 제나라는 그 기세를 몰아 송나라·위(衛)나라와 연합해 위나라 영토인 양릉을 포위하는데, 방연은 한나라를 끌여들어 이를 격파하고 제나라와 강화를 맺는다. 이에 위혜왕은 그동안의 전공과 공로를 인정하여 계릉에서의 패배를 용서해 줬다고 한다. 그리고 서쪽에서 기회를 보던 진나라는 패전 소식을 듣자 하서지방을 공격하기 위해 함곡관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위나라는 여전히 강국이라 패배를 만회할 저력은 지니고 있었고 결국은 진나라를 다시 함곡관 안으로 몰아붙여 위세를 과시했다. 결과적으로 이로 인해 위나라의 주력 전선이 서쪽으로 옮겨가면서 제나라를 비롯한 동쪽 전선은 일시적으로 소강상태에 들어갔으며 그렇게 13년이 지났다.[14][15]

3. 본격적인 전투의 시작

파일:마릉전투.jpg

3.1. 위나라의 한나라 침공

진나라의 침공을 물리치고 끝끝내 서부전선을 안정시킨 위혜왕은 다시 세력 세력확장을 위한 공세에 들어가는데 그 표적이 된 곳이 한나라였다. 당시 한나라의 군주는 한소후로 유명한 법가학자인 신불해를 등용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그렇게 확장된 국력을 바탕으로 정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신정으로 옮겼는데 위혜왕은 이를 위협적으로 받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나라 역시 위나라에 패한 것에 대한 원한이 남아 있어 한나라와 비밀리에 동맹을 맻고 침공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고 하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선 가까운 한나라를 제압할 필요성도 있었다.

혜왕은 태자 신을 총대장으로 하고 방연을 장군으로 삼아 병거 500승[16]을 이끌고 한나라를 쳤다. 태자 신이 한나라의 경계에 왔을 때 위나라의 한 선비가 찾아와 대략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위나라는 천하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고 이 세상에 왕보다 높은 지위는 없습니다. 태자께서는 장차 그 나라의 왕[17]이 되실 몸입니다. 태자께서 한나라 정벌을 성공하시더라도 더 높게 올라갈 지위는 없습니다. 지금 위군은 오랫 동안 전쟁에 시달려서 피로한 상태입니다. 태자께서 위군을 이끌고 힘들게 성을 함락시켜 승리하더라도 왕이 되실 뿐이고 핑계를 대고 그냥 돌아가셔도 왕이 되실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싸우다 진다면 좀처럼 왕이 되길 어려우실 겁니다.
태자 신은 그 말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회군을 결심했지만 선비는 안타깝다는 듯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태자께서 그리 생각하셔도 그리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위나라에는 태자님이 끓이는 국을 먹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숟가락을 들고 태자께서 끓은 국을 먹기만 기다리는 승냥이들이 있는데 태자께서 국을 그만 끓이겠다고 한다고 고이 넘어가려 하겠습니까?
선비의 예상은 정확했다. 태자가 핑계를 대어 회군하려고 하자 방연을 비롯한 모든 장수들이 결사반대한 것이다. 결국 태자는 회군을 뜻을 굽히고 한나라 정벌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태자 신의 결단력 부족이라는 측면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근본적으로 혜왕이 잘못된 정책에도 기인한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구세력을 정리하지 않고 인재들만 불러 들여 영토를 확장해 그들에게 나누어 주는 정책을 폈기에 방연을 비롯한 신진세력들은 어떻게든 핑계를 대서라도 전장에 나가 공을 세울 기회만을 노리는 데만 혈안이 돼 있었다.[18] 물론 구세력을 정리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19]

그런데 정작 전투가 시작되자 공을 세우는 데 혈안이 된 위나라 장수들은 한나라군을 쉽게 제압하고 한나라 수도인 신정을 압박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선비의 걱정은 기우인 것처럼 보였다.

3.2. 제군의 참전과 손빈의 작전

한나라는 위군을 당해낼 수 없자 제나라에 구원을 청했고 제나라 신료들은 한나라를 구원하지 말자는 의견과 당장 구원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갈려 첨예하게 대립했다. 이때 손빈이 조용히 있는 것을 본 위왕은 그에게 계책을 물었는데, 나온 답변은 다음과 같았다.
  1. 위나라가 한나라를 먹으면 다음은 제나라를 노릴 것이기 때문에 구원하는 것이 옳다.[20]
  2. 그러나 지난번과 똑같이 해서는 곤란하다. 한나라의 수도 신정은 지형이 험준하기 때문에 그쪽에서 필사적으로 싸우면 적어도 위군이 신정을 함락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하겠다고 하되, 신나게 싸우다 둘 다 지쳤을 때 나서야 한다. 그러면 위나라 군대를 쉽게 제압할 수 있고 힘이 약해진 한나라로부터 얻어낼 것도 많다.
위왕은 손빈의 탁월한 식견을 높이 사 그 제안에 따랐다. 한나라를 지원하겠다고 사자를 보내놓고 떠들썩하게 각지에 동원령을 내리는 척 했지만 실제로 군사적 행동을 개시하지는 않았다. 그러자 과연 손빈의 예상대로 한군은 목숨을 걸고 싸워 위군을 막아냈다. 방연은 일 년 동안 다섯 번이나 한군과 큰 싸움을 벌여 모두 다 크게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목표인 신정을 함락시키는 일은 지지부진해졌다.

그리고 전선이 고착된 것을 본 위왕은 전기에게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케 했다. 전기는 계릉 전투 때 배운대로 한나라 수도인 신정을 직접 구원하는 대신 위나라의 동쪽 중심지인 대량을 공격하여 한나라의 포위를 풀고 회군하는 위군을 상대하는 전략을 짠다.

3.3. 방연의 반격

방연은 13년 전 패배로부터 교훈을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나라와 싸우는 와중에도 제나라의 상황에 대해 시시각각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으며 결국은 제나라를 제압하는 것이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방연은 제군이 참전한다면 신정을 직접 구원하기 보다는 제나라에서 가까운 대량 지역을 공격하리라 예상하여 미리 이 자리에 태자 신이 이끄는 별동대를 배치하여 제군을 견제하고 있었고 실제로 제군이 침공해 온다면 빠른 시간에 한나라에서 철수하여 대량에서 제군과 맞서 싸울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리고 제군의 움직임은 방연의 예상과 들이맞았다. 태자 신은 대량에서 제군과 싸워 결국 대량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고 방연은 재빠르게 회군하여 교착 상태에 빠진 제군을 엄습한 것이다. 제군은 이러한 방연의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 무너지기 시작했다. 제군은 결국 방연을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제군을 추적하던 방연에게 또 다시 희소식이 전해졌다.

제군의 기강이 완전히 무너져 이미 10만이 넘는 제군 중 절반이 넘는 5만 명 이상이 도주하였고 남은 병사들도 계속해서 도망치는데 제군의 지휘부는 이를 수습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제군의 일종의 모랄빵을 얻어 맞은 듯 보였고 이러한 제군을 추적하여 전멸시키거나 대장을 사로잡는다면 13년 전 계릉의 싸움을 완벽하게 복수하는 것이었다.

승기를 확신한 방연은 태자 신과 함께 조를 나누어 강행군을 하며 제군이 도주한 마릉 방면으로 추적하기 시작했다. 방연은 솥단지가 줄어가는 것을 보며 병력 수가 줄었음을 확신했고 보병은 버리고 정예 기병만을 이끌고 이틀 걸릴 거리를 하루에 달려 제나라 군사를 바짝 뒤쫓았다. 그러나 이것은 손빈이 방연을 속이기 위한 계책이었다.

3.4. 방연이 이곳에서 죽다, 앉은뱅이가 천하에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구나

이후 손빈은 방연이 저녁 무렵이면 마릉에 도착할 것을 예상했다. 마릉은 길이 좁고 양쪽에는 험한 산이 많아 매복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이에 손빈은 큰 나무를 골라 껍질을 벗겨놓고 다음과 같은 글을 쓰게했다.
방연은 이 나무 아래서 죽을 것이다.(龐涓死於此樹之下)
그러고는 활을 잘 쏘는 자들을 뽑아 1만 개의 쇠뇌를 준비시킨 뒤 길섶에 매복시키고 "밤에 불빛이 보이거든 일제히 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후 날이 어두워질 무렵 방연의 군대가 마릉에 도착하고 나무에 글이 써져 있는 것을 본 방연은 불을 비추게 했다. 그 순간 제나라 군사의 쇠뇌가 일제히 발사되었다. 위나라 군사는 큰 혼란에 빠져 뿔뿔이 흩어졌고 방연은 자신의 지혜가 부족하여 패배한 것을 깨닫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며 말했다.
"결국에는 그 녀석의 이름을 떨치게 했구나,"

4. 결말

제나라 군사는 승승장구하여 남은 위나라 군사들을 전멸시키고 위나라 태자 신(申)을 사로잡은 후 돌아왔다.[21] 이 전투의 패배로 초창기 전국7웅의 패자를 자임하던 위의 위상은 흔들렸으며, 다시는 천하쟁패를 노리지 못하게 되었다. 반면, 승전국인 제는 새로운 패자로 부상하게 된다. 또한 이 전투가 벌어진 후, 함곡관 안에 웅크리고 있던 진의 5만 군사가 상앙의 계략으로 하서 땅을 점령하면서 전국칠웅 중 중진국의 위치에 있던 진나라가 급부상하게 되었다
[1] 사실 손빈이 당한 건 발을 못 쓰게 하는 거였지 발을 잘라내는 것이 아니었다. [2] 당시는 진효공· 위혜왕· 한소후· 조숙후· 연문공· 제위왕· 노경공· 척성군· 무강 시기로 노나라·월나라는 주위 국가들의 국력을 못 따라가고 있었고 송나라는 왕가가 교체된 시기이며(성은 동일한데 씨는 바뀌었다) 위나라는 아래에 나오듯 문제가 하나씩 터지던 시기, 한나라는 이 해에 신불해가 사망했고 조나라는 다음 대에 전성기가 시작되며 제나라는 강성해지고 있었고 연나라는 특별한 일이 없는 시기다. [3] 초나라의 크기가 매우 압도적이지만 개척이 덜 된 밀림 지대라 인구밀도는 매우 낮았다. 이 지역이 본격적으로 개발되려면 3국 시대까지는 가야 한다. 이 당시 초나라의 수도권은 한수 유역이었고 수도는 영성(강릉성)이었다. [4] 참고로 한나라 역시도 위나라와 마찬가지로 국토가 중원 한가운데에 있어 똑같이 불리했는데 국력이 위나라만도 못한지라 위나라보다 더 불리했다. [5] 무후 시기에 3진연합군이 결성되어 초군을 막았다. 이 당시 초나라의 왕이었던 도왕은 이로 인해서 부국강병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또한 비슷하게 3진과 적국이던 진나라·제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6] 이미 제나라와는 무후 시절부터 투닥거리는 사이로 제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할 때마다 3진이 저지하곤 했다. [7] 일단 주 천자에게 다 같이 주청하여 제후 지위를 얻어내기도 했고 동질 의식이 있어 서로를 자극하려 하지 않았으나 혜왕 대에 이르러선 이러한 동질 의식이 약해지기도 했고 압도적으로 잘 나가는 위나라를 두 나라가 경계하기도 하여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한 세대 전에 무후가 조나라의 왕위쟁탈전에 끼어들어 조나라를 공격하여 3진연합 파기의 빌미를 제공했고 무후 사후 혜왕과 공중 완이 왕위쟁탈전을 벌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조나라와 한나라가 연합하여 위나라를 공격해 혜왕을 몰아내려고 했었다. [8] 북쪽의 중산 지역도 문후 시절 정벌할 때 본토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회의적인 의견이 있었는데, 이를 무마하기 위해 (훗날 무후가 되는) 태자를 배치해놓았다. 그러나 문후 사후 태자가 안읍으로 귀환하면서 영향력이 약해지고, 결국 남아있던 현지 세력이 중산국을 복권해버렸다(되살아난 중산국은 위나라가 산서지방에 대한 영항력을 상실하자 조나라에게 다시 멸망한다). [9]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는 위나라가 몰락하기 시작하며 해결되긴 한다. 왜냐하면 안읍 일대가 진나라 손에 넘어가면서 더이상 국경이 복잡하고 거점의 연결에 문제가 생길 일은 없었기 때문. 물론 중간에 껴있는 한나라를 정복한다든가 하는 식의 플러스 효과로 인한 문제해결이 아닌 만큼 저렇게 되었다고 해서 위나라에게 좋을 일은 없었다. [10] 이는 당대 자국의 국력을 끌어올렸던 진효공·한소후·제위왕 시기인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11] 맹자에서 양혜왕이라고 불리며 어리석은 군주의 대명사로 까이는 사람이 바로 이 혜왕이다. 맹자의 눈에는 혜왕이 국력신장을 한다며 하는 일이 모두 근본적인 원인에는 눈을 감고 행하는 근시안적인 정책이었기에 오십보백보라며 신나게 깐 것이다. [12]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보수세력의 기득권을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 계속 새로운 인재를 영입했기 때문에 새로 영입된 인재들에게 포상을 주려면 영토를 확장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는 주변국의 어그로를 지속적으로 끌 수밖에 없고, 카운터를 맞는 순간 나라가 통째로 엎어질 수밖에 없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13] 위왕은 즉위 후 9년 동안 이나 정사를 돌보지 않고 주색잡기에 열중했는데 순우곤이 간하는 말을 듣고 이를 멈추고 정사에 열정을 다하여 불비불명(不飛不鳴)이라는 말의 유래가 되었다( 초장왕에게도 완전히 똑같은 이야기가 내려오는데 신하가 간하자 바른 정사를 행한 점, 주색잡기의 이유가 실제는 충성스러운 신하와 간신을 가려 내기 위함이었다는 점 등 인물의 이름을 빼고는 100% 일치한다). [14] 진나라가 위나라를 치는 동안 그보다 훨씬 강했던 제나라는 양릉 전투에서 기세가 꺾이고 강화를 맺었기에 위나라의 뒷통수를 칠 수가 없었다. 후에 제위왕와 위혜왕 만나 서로 왕호로 부르며 격식을 올렸다는 점에서 볼때 싸움에도 불구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리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다. [15] 소설 열국지에서는 방연이 전기와 손책을 몰아내기 위해 제나라 상국 추기에게 이간질을 했기 때문에 제위왕의 의심을 사 일시적으로 물러났다 13년이 지나 제위왕이 죽고 제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복직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창작이다. 제선왕은 마릉전투가 있은 후 19년이 지나서야 왕위에 올랐다. 제선왕이 초기 훌륭한 정치를 하다 후에 방탕해져 제나라의 패권이 망가지는 단초를 제공한 것은 사실이지만 손빈의 은퇴와는 상관이 없는데 열국지에서는 제선왕이 승전이후 오만하게 행동하여 손빈은 산에 들어가 신선이 되고 전기는 실망하여 실의 속에 죽었다고 되어있다. 작가의 실수이거나 손빈의 드라마를 위한 극적 장치를 확보하기 위해 일부러 역사를 무시한듯. [16] 5만 명 정도로 추측된다. [17] 뭔가 문제가 있는 표현으로 당시 위나라는 왕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이 시기까지만 해도 위혜왕은 왕을 칭하지 않고 후작 작위에 머물러 있었고 왕호를 사용하는건 마릉 전투로부터 7년 후다. [18] 더 큰 문제는 이 신진세력들이 자기네들끼리도 경쟁했다. 방연의 경우에도 같은 신진세력인 손빈을 축출했는데 그게 위나라에 얼마나 큰 재앙으로 돌아왔는지 감안하면…그리고 이 원인은 추정컨대 구세력을 정리하지 않은 채 인재들만 불러들이려고 한 것에도 있을 것이다. 차라리 구세력 Vs 신진세력이면 신진세력들이 구세력들이 차지한 걸 빼앗기 위해서라도 서로 단결했겠지만 구세력들 것은 그대로이니 공을 세워서 출세해야 하는데 기회는 한정적인데 사람은 많으니 자연스레 서로 물고뜯을 수 밖에… [19] 초나라는 초도왕 시기에 오기를 등용했다가 초숙왕이 즉위하자 숙왕의 결단과 귀족들의 야합으로 결국 오기가 축출되었다. 그나마 진나라는 진효공 시기에 상앙의 변법으로 발전하고 혜문왕이 즉위하자 상앙은 축출되지만 그 정책은 이어받는데 그래도 진나라 역시 진효공 시기에 상앙을 축출하라는 상소가 하루에만 수천통이나 쏟아지기도 했으며 좌초 위기도 여럿 있었다고 하니 개혁이 쉬운 일은 아니다. [20] 설사 위나라가 칼끝을 제나라로 돌리지 않더라도 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제나라에게 좋은 일은 아니다. 위나라의 중간에 있는 한나라가 멸망하면 위나라는 중원 한복판의 알짜배기 땅을 몽땅 먹게 되며 국경 문제도 해결된다. 결과적으로 위나라는 더 강해지므로 제나라에겐 좋은 선택지가 아니다. [21] 사로잡힌 날 밤 태자 신은 욕을 당할 것을 염려하여 칼을 빼 자결했다. 원래 태자를 죽일 생각이 없었던 손빈은 그의 죽음을 듣고 탄식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