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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8-06 20:10:46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

마르쿠스 페르페르나 베이엔토
라틴어: Marcus Perperna Veiento
생몰년도 미상 ~ 기원전 72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히스파니아
지위 노빌레스
국가 로마 공화국
가족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조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아버지)
직업 로마 공화정 법무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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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공화국 법무관, 시칠리아 총독. 가이우스 마리우스파 인사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측 인사들이 차지한 로마 정부에 맞서다 히스파니아로 망명해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에 가담하여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치렀다. 전쟁 말미에 세르토리우스를 암살하고 그의 직위를 계승했지만 폼페이우스에게 패배해 목숨을 잃었다.

2. 생애

페르페르나 씨족은 에트루리아 출신의 평민 씨족으로, 기원전 2세기경에 로마 시민권을 획득했다. 조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는 가문 최초로 로마 정계에 진출해 기원전 133년 이전에 법무관을 맡아 제1차 노예 전쟁 진압에 한 몫을 했고, 기원전 130년 집정관을 맡아 페르가몬에서 로마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아리스토니코스를 진압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가서 개선식을 거행할 준비를 하다가 갑작스러운 병환으로 사망했다. 아버지 마르쿠스 페르페르나는 기원전 92년에 집정관을 맡았고 기원전 86년에 감찰관을 역임했다. 그에겐 성명 미상의 누이가 두 명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은 베스타 여사제였다.

그는 모종의 시기에 재무관과 법무관을 연이어 맡은 뒤 기원전 82년경 시칠리아 총독을 맡고 있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술라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는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추종하는 이들의 편에 섰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에 따르면, 그는 술라로부터 자기 편에 들라는 권유를 뿌리치고 "온 힘을 다해 시칠리아를 건너 프라이네스테에 포위된 소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구하겠다"고 선언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시도를 하지 않았고, 소 마리우스는 곧 도시가 함락되자 자결했다. 이후 로마의 정권을 장악한 술라는 페르페르나가 시칠리아를 이탈리아에서 탈출한 마리우스 지지자들을 위한 요새로 만들려 한다고 파악하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했다. 그는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별다른 저항 없이 시칠리아를 떠났다. 이후 숙청 대상 명단에 들어갔지만 리구리아에서 성공적으로 숨어지냈다.

기원전 78년 술라가 사망한 후 집정관에 선임된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는 술라 정권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에트루리아인들을 진압하러 가는 척했다가 그들과 합세한 뒤 기원전 77년 로마를 상대로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즉시 이 반란에 가담하고 리구리아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레피두스의 반란은 실패로 끝났고, 페르페르나는 25,000 ~ 30,000명 가량의 잔여 병력을 수습하여 피레네 산맥을 건너 히스파니아에 진입했다.

당시 히스파니아에서는 마리우스파 인사인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로마의 히스파니아 총독 메텔루스 피우스를 상대로 벌인 세르토리우스 전쟁이 한창이었다. 그는 독자적으로 메텔루스 피우스와 싸우려 했지만, 병사들이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해야 한다고 강력히 권고하자 그 말에 따랐다. 그러나 세르토리우스와 페르페르나는 지휘권을 놓고 대립했다. 병사들이 인망 높은 세르토리우스를 확고하게 지지했기에 세르토리우스가 총지휘권을 맡게 되었지만, 페르페르나는 이에 반감을 품었다. 또한 그는 '야만족'인 히스파니아인들을 지나치게 후대한다고 여겨 세르토리우스와 끊임없이 반목했다.

기원전 77년, 원로원은 마리우스파가 히스파니아에서 갈수록 강력해지는 것에 두려움을 이끌고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에게 토벌을 맡겼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77년 말이나 기원전 76년 초 피레네 산맥을 건넜다. 파울루스 오로시우스에 따르면, 그의 군대는 3만 명의 군단병과 1,000명의 기병, 그리고 비슷한 숫자의 보조 부대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후 페르페르나는 세르토리우스와 함께 메텔루스 피우스-폼페이우스 연합군과 대적했다. 기원전 75년, 세르토리우스는 페르페르나와 가이우스 헤레니우스에게 폼페이우스를 상대하게 하고, 루키우스 히르툴레이우스는 메텔루스를 상대하되 전투를 회피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고 있는 베로네스 족과 아우트리코네스족을 토벌하기로 했다. 세르토리우스는 두 부족을 성공적으로 복종시켰지만, 그 사이에 폼페이우스는 공세를 재개해 발렌티아에 이르러 헤레니우스와 페르페르나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가이우스 헤레니우스를 포함한 10,000명의 반란군이 피살되었고, 발렌티아는 폼페이우스군에게 초토화되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세르토리우스는 급히 폼페이우스를 막으러 이동하여 페르페르나의 잔여 부대와 합류했다. 폼페이우스의 부하들은 메텔루스가 합세할 때까지 전투를 미루자고 진언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듣지 않고 수크로에서 세르토리우스-페르페르나가 이끄는 적군과 격돌했다. 그 결과 세르토리우스와 페르페르나가 크게 이겼고, 폼페이우스는 막심한 피해를 입어 전면 퇴각을 심각하게 고려했다. 하지만 메텔루스 피우스가 히르툴레이우스를 이탈리카 전투에서 물리치고 폼페이우스를 도우려 달려오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세르토리우스와 페르페르나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폼페이우스와 메텔루스 피우스가 합세하여 압박해 들어오자, 세르토리우스는 유격전으로 대항하기로 했다. 그러나 메텔루스가 켈티베리아의 사군툼을 포위하자, 세르토리우스의 군대에 복무하던 켈티베리아인들이 "우리의 도시를 구하지 않으면 떠나겠다."라고 압박했고, 그들의 협조가 절실히 필요했던 세르토리우스는 어쩔 수 없이 사군툼을 구하러 진격했다. 이리하여 벌어진 사군툼 전투에서, 앞서 파견한 페르페르나가 5,000명의 병사를 상실하고 패퇴하자, 세르토리우스가 직접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맹공을 가해 그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메텔루스는 끝까지 위치를 고수했고, 그의 부하들은 상관을 부상시킨 이베리아인들에게 맹렬하게 반격하여 몰아냈다.

기원전 74년, 메텔루스는 갈리아에서 2개 군단을 추가로 모집한 뒤 켈티베리아와 바카아이 족의 영역으로 진격했다. 그는 적의 매복이 있을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병사들에게 대비하라고 명령했다. 실제로 두 부족이 산길에서 매복 공격을 가했지만, 메텔루스의 병사들은 침착하게 대처하여 그들을 격퇴했다. 한편 폼페이우스는 팔렌티아를 포위공격했으나, 도중에 세르토리우스가 달려오자 교전을 회피하고 메텔루스 쪽으로 이동했다. 이후 두 장수는 필요할 경우 서로를 지원할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를 유지했다. 세르토리우스는 이에 맞서 페르페르나를 이베리아 서부 해안으로 보내 칼레 시를 점령하게 하고, 자신은 팔렌티아 성벽을 재건한 뒤 동쪽으로 진격하여 에브로 계곡으로 들어가 칼구루스 시를 포위 공격하던 로마군을 급습해 3,000명을 죽였다.

한편, 세르토리우스의 측근들은 세르토리우스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세르토리우스는 폭군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로마의 전우들과 함께 논의하는 걸 그만두고, 히스파니아 사람들을 억압하고, 쾌락과 사치에 탐닉했으며, 주변에서 자신을 해치려 든다고 의심하여 사람들을 해쳤다고 한다. 또한 페르페르나가 음모를 꾸민 게 밝혀져 거의 모든 공모자들이 처형되었지만, 페르페르나는 모종의 이유로 살아남았다고 한다. 한편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페르페르나가 최고 권력에 대한 공허한 욕망을 마음에 품고, 부하들에게 "로마인은 도망자 세르토리우스의 수행원 취급을 받고 있으며, 야만족은 우리를 꾸짖고 명령하고 의무를 지게 하고 있다"라고 선동했다. 이후 암살 시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소문이 걷잡을 수 없이 퍼지자, 암살을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기원전 72년, 공모자들은 세르토리우스에게 아군이 승리했다고 보고하면서 이를 기념하는 연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세르토리우스는 한동안 망설였지만 주변에서 거듭 권하자 결국 받아들였다. 연회가 한창일 때 페르페르나가 희석되지 않은 포도주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 후 바닥에 떨어뜨리자, 즉시 세르토리우스 옆에 기대고 있던 마니우스 안토니우스가 단검으로 세르토리우스를 찔렀다. 세르토리우스는 달아나려 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의 가슴에 몸을 던지고 그의 손을 잡았다. 저항할 능력을 상실한 세르토리우스는 많은 공모자들의 연이은 공격으로 결국 살해되었다. 그렇게 세르토리우스를 살해한 뒤 페르페르나가 새 지휘관에 선출되었지만, 장병들은 그동안 자신들을 잘 이끌었던 세르토리우스가 피살된 것에 불만을 품었다.

페르페르나는 자신의 집권에 반감을 드러낸 히스파니아인과 로마인을 집단 처형했고, 히스파니아 부족들은 메텔루스 피우스와 폼페이우스에게 대거 귀순했다. 이로 인해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자, 페르페르나는 적을 상대로 승리해 자신의 지도력을 입증해야겠다고 판단했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향해 진격했지만, 폼페이우스는 이를 예상하고 적을 함정으로 유인했다. 10개 코호트가 페르페르나의 군대와 교전하다가 후퇴하자, 페르페르나는 적이 패주한다고 여기고 추격했다.

그러나 도중에 매복하고 있던 폼페이우스군이 들이닥쳤고, 10개 코호트는 방향을 돌려 전방에서 추격자들을 공격했다. 결국 반란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페르페르나는 사로잡혔다. 그는 폼페이우스에게 로마 정부 및 사회의 고위급 인사들과 세르토리우스 사이에 오간 모든 서신을 전달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폼페이우스는 단호히 거부하고 페르페르나 등 세르토리우스를 살해한 모든 자들을 처형했다. 이후 세르토리우스와 페르페르나에 가담했던 모든 인사가 폼페이우스에게 귀순하면서, 세르토리우스 전쟁은 종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