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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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처드 위드마크 RICHARD WID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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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800 Hollywood Blvd. |
<colbgcolor=#000000><colcolor=#efd88f> 리처드 위드마크 Richard Widmar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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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리처드 위트 위드마크 Richard Weedt Widmark |
국적 | 미국 |
출생 | 1914년 12월 26일 |
미국 미네소타주 선라이즈 타운쉽 | |
사망 | 2008년 3월 24일 (향년 93세) |
미국 코네티컷주 락스버리 | |
묘지 | 미국 코네티컷주 락스버리 그레이트 오크 공동묘지 |
직업 | 배우, 프로듀서 |
활동 기간 | 1938년 ~ 2001년 |
영화 데뷔 | 1947년, '이중 노출' |
학력 | 레이크 포리스트 대학교 |
신장 | 178cm |
배우자 |
진 헤이즐우드(1942년~1992년 사별) 수전 블랜처드(1999년~2008년 위드마크 본인의 사망) |
자녀 | 앤 히스 위드마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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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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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요 출연 작품
- 이중 노출(Kiss of Death), 1947
- 로드 하우스(Road House), 1948
- 황색 하늘(Yellow Sky), 1948
- Slattery's Hurricane, 1949
- 노 웨이 아웃(No Way Out), 1950
- 밤 그리고 도시(Night and the City), 1950
- 거리의 공황(Panic in the Streets), 1950
- The Frogmen, 1951
- Don't Bother to Knock, 1952
- Take the High Ground!, 1953
- 데스티네이션 고비(Destination Gobi), 1953
- 사우스 스트리트의 소매치기(Pickup on South Street), 1953
- 악의 화원(Garden of Evil), 1954
- The Cobweb, 1955
- Run for the Sun, 1956
- Backlash, 1956
- 성 잔 다르크(Saint Joan), 1957
- The Tunnel of Love, 1958
- 워락(Warlock), 1959
- The Alamo, 1960
- 뉘른베르크의 재판(Judgment at Nuremberg), 1961
- 전함 바이킹(The long ships), 1964
- 샤이엔의 가을(Cheyenne Autumn), 1964
- The Way West, 1967
- 건파이터의 최후(Death of a Gunfighter), 1969
- A Talent for Loving 1969
- Vanished, 1971
- 오리엔트 특급 살인(Murder on the Orient Express), 1974
- 위험한 열차(Rollercoaster), 1977
- 죽음의 가스(Coma), 1978
- 스웜(The Swarm), 1978
3. 사생활
-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인 수전 블랜처드는 헨리 폰다의 두 번째 아내였다.
- 샌디 코팩스의 전 장인이기도 하다. 위드마크의 외동딸이랑 결혼했다가 이혼.
4. 여담
- 첫 출연작 <이중 노출>(1947)에서 휠체어를 탄 노파를 계단에서 밀어뜨려 살해하는 악당 타미 유도를 연기해서 악역 이미지가 강하지만[1], 실제로는 사냥, 낚시조차 혐오하는 다정다감한 성격이였다. 악명 높은 마피아 조 갈로는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보고 타미 유도의 옷차림과 언행을 따라해서 죽을 때까지 '크레이지 조'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 < 노 웨이 아웃>(1950)에서 흑인 의사 역의 시드니 푸아티에이를 증오하는 불량배로 출연했는데, 극중에서 인종차별 대사를 할 때마다 촬영 후 푸아티에이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이후 두 사람은 평생의 절친이 되었다. 여기다 총기규제를 지지하고 민주당 지지자였을 정도로 리버럴 성향이 있었던 배우.
- 김수영(시인)의 시 '하... 그림자가 없다'에서 커크 더글러스와 함께 언급된다. 한국에서도 위드마크가 나름 인지도가 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정작 시를 쓴 김수영은 요절했고, 더글러스와 위드마크는 21세기까지 살 정도로 장수했다.
[1]
워낙 유명한 장면이라 훗날 홈 비디오로 재발매될 때 이 장면을 쓴 판본도 있다. 때문에 느와르 영화에 은근히 많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