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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틀리 왕국 11대 군주 როსტომი | 로스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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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로스톰 |
조지아어 | როსტომი | |
라틴어 | Rostom | |
이름 | 호스로 미르자(ხოსრო-მირზა) | |
가족 |
다비트 11세(아버지) 챠브키시의 여인(어머니) 케테반(첫째 아내) 마리암 다디아니(둘째 아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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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565년 ~ 1658년 | |
재위 기간 | 1633년 ~ 1658년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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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르틀리 왕국 11대 군주.2. 생애
카르틀리 왕국 6대 군주 다비트 11세와 챠브키시 출신의 무명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다. 이복형제로 바그라트 7세가 있었다. 그는 사파비 제국의 수도 이스파한에서 태어나 이슬람교 신자가 되었다. 1569년 아버지가 카르틀리 국왕으로 선임된 뒤 카르틀리 왕국의 수도 트빌리시에서 자랐지만,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이 전쟁을 벌일 때 다비트 11세가 가족을 버리고 오스만 제국에 귀순하는 바람에 1579년 이란군에게 붙들려 이스파한으로 끌려갔고, 어머니와 함께 하렘에 귀속된 노예가 되었다.그는 이란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유창한 조지아어를 구사했으며, 조국의 역사에 열정적이었고 언젠가 조지아의 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었다고 한다. 1602년 카헤티 왕국의 군주 알렉산드레 2세가 사파비 왕조와 화해하고 왕위를 되찾았을 때, 알렉산드레 2세의 궁정에 배속되었다. 알렉산드레 2세는 루스 차르국과 동맹을 맺어 이란의 간섭에서 벗어나길 희망해, 보리스 고두노프의 딸 제니아 보니소프나를 그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1605년 알렉산드레 2세가 이란과 관계를 끊자, 그는 이란으로 쫓겨나듯 귀국했다. 1605년 3월 12일 아버지 알렉산드레 2세를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 콘스탄틴 1세는 루스 차르국에 제니아 공주의 약혼자인 그를 귀환시키는 데 힘을 보태달라고 청했지만, 러시아 사절단은 그를 "못생긴 자"라고 묘사하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란으로 돌아온 그는 빈곤에 빠졌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스파한에서 거지 신세가 되었고 생존을 위해 온갖 잡업을 해야 했다고 한다. 그러다 1612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조지아인의 해방 운동을 전개하던 기오르기 사카제가 이란으로 귀순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사카제는 아스파한에 거주하는 조지아 공동체를 찾아갔다가 그를 발견하고 왕족으로서 정중히 대우했고, 그의 형편이 나아지도록 많은 도움을 줬다. 당초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아바스 1세는 사카제로부터 그가 총명하고 이란에 대한 충성심이 지극하다는 이야기를 듣자 흥미를 느끼고 그를 궁궐로 불렀다. 이후 그는 궁궐에 거주하면서 환관으로부터 궁중 예절을 배웠으며, 제국 노예 감독관인 무히브 알리 벡으로부터 고급 교육을 받았다. 1615년 기오르기 사카제가 아바스 1세에게 반기를 든 뒤에는 그가 이스파한에 거주하는 조지아인들 사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1620년 아스파한의 지사로 임명되어 도시 행정에 상당한 수완을 발휘해 아바스 1세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던 1625년 3월 25일, 테이무라즈 1세가 이끄는 조지아군이 마르코피 전투에서 사파비 왕조군을 섬멸하고 트빌리시에 입성했다. 이에 아바스 1세는 친정에 나섰는데, 그는 이사 칸 사파비, 로스톰 칸 사카제와 함께 휘하 장군으로서 복무했다. 1625년 6월, 6만의 이란군과 함께 조지아로 진군한 그는 7월 1일 마라브다 전투에서 우익 부대를 지휘하여 이란군의 승리에 일조했다. 마라브다 전투 후 트빌리시를 공략한 이란군은 시몬 2세를 왕으로 복위시켰다. 한편, 반란군 지휘관 기오르기 사카제는 병력을 재건한 뒤 이란을 지지했던 조지아의 무슬림 공작 압드올가파르 아밀라크바리와 아래 6명을 인질로 붙잡았다. 그는 이사 칸 사파비로부터 구출 임무를 부여받고 이들을 구하러 떠났다.
그는 아라그비 강둑을 통해 카르틀리 북쪽으로 진군하면서, 아라그비 공작에게 자신의 군대가 마을들을 파괴하지 않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카제의 반란군은 므츠헤타 북쪽의 치사무리 마을 인근에서 습격했지만, 그는 이들을 격파한 뒤 무크란에 잠시 휴식을 취했다. 이후 두체티 방향으로 진군하여 미티우레티 산맥을 넘어 케비 산맥에 도착했고, 아르치 요새에서 감금되어 있던 압드올가파르 아밀라크바리와 아내들을 풀어줬다. 그러나 크사니 공작 예세 1세와 기오르기 시다모니가 그의 퇴로를 봉쇄한 뒤 기오르기 사카제가 이끄는 12,000명의 조지아군이 이란군을 급습했다. 이 전투에서 아제르바이잔 총독 반다 칸이 전사하고 3명의 사파비 장성들이 포로 신세로 전락했지만,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아밀라흐바리 요새로 후퇴했다.
이후 이란으로 돌아온 그는 1629년 1월 아바스 1세의 임종을 지켜봤다. 아바스 1세는 숨이 끊어지기 전에 그를 황실 근위대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그때까지 호스로 미르자(ხოსრო-მირზა)로 쓰던 이름을 로스톰 칸(Rostom Khan)으로 개명하게 했으며, 손자 사피의 황위 계승을 보장하도록 했다. 그렇게 아바스 1세가 숨을 거둔 뒤, 그는 사피 샤의 즉위를 선포하고 모든 사파비 주지사들에게 아스파한으로 와서 샤한샤에게 충성을 맹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렇게 무사히 샤한샤가 된 샤피 샤는 샤한샤로 즉위한 뒤 궁정의 쾌락에 관심을 뒀고, 통치는 그에게 맡겼다. 당시 오스만 제국과 사파비 제국과의 전쟁이 한창이었기에, 그는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1630년 여름 하마단에서 오스만 장군 간지 후스레프 파샤를 상대로 승리했으며, 11월 오스만군의 공성전에 시달리던 바그다드를 구원했다. 1632년, 그는 사피 샤의 어머니이자 조지아계 여성인 딜라람 카눔을 지원해 그녀가 아들의 경쟁자가 될 만한 왕자와 공주들을 참혹하게 살해하는 데 일조했다.
그러나 그와 딜라람 사이에서 긴장이 고조되었다. 간자와 카라바흐의 주지사이며 그의 지지자였던 다우드 칸이 왕실 연회에서 쫓겨난 사건은 두 사람의 갈등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다우드 칸은 카헤티 왕 테이무라즈 1세에게 망명했고, 그가 이끌던 부대는 조지아군에 배속되었다. 사피 샤는 다우드 칸을 돌려보내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테이무라즈 1세의 폐위를 선언하고 그를 새 왕으로 내세워 조지아를 침공하게 했다. 마침 다우드 칸의 실각에 불안을 느꼈던 그는 샤한샤의 지시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1633년, 그가 이끄는 이란군이 카르틀리와 카헤티를 휩쓸었고, 테이무라즈 1세는 이메레티로 망명했다. 이후 카르틀리의 왕위에 오른 그는 고리와 수라미 등 여러 요충지에 수비대를 배치했지만, 민중의 반발을 고려하여 이란군인을 쉬르반 민병대로 점진적으로 교체하도록 했다.
과거에 아스파한 주지사로서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해 아바스 1세의 신임을 얻었던 그는 카르틀리 왕으로서도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먼저 카르틀리의 대귀족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 상당한 선물을 주었다. 치오치 흐말라제에게 삼치빌데 영지를 하사했고, 과거 자신을 도와줬던 기오르기 사카제를 존경했기에 사카제의 유족들이 이전의 영지를 이어받도록 해줬다. 또한 고르자스프 아바치치빌리 공작의 딸 케테반 아바치치빌리와 결혼해 자신의 편으로 삼았다. 반면 테이무라즈 1세를 여전히 지지하는 자들을 가차없이 토벌했다. 그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길 거부하는 자들의 영역을 황폐화시켰고, 수십 명의 영주를 파직하고 그들의 아들이나 형제로 교체했다. 또한 기독교인을 특별히 박해하지 않았고 조지아 정교회 대성당을 복원하는 걸 돕기도 했지만, 이슬람교에 노골적으로 적대심을 드러내는 귀족들을 엄격히 처벌했다.
그는 아바스 1세의 통치를 모델로 삼아 카르틀리 왕국의 중앙 집중화에 진력했다. 1635년 카자 치치빌리를 궁전 대주교로 임명했고, 마누차르 숨바티슈빌리를 트빌리시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각지의 관료들을 자신에게 충성을 바칠 인사들로 배속시키고 세금을 착실히 거두도록 했다. 1636년 고리 총독의 10세 아들인 파르사단 고르귀자니제를 자신의 보호하에 두는 등, 대귀족의 자제들을 궁궐에 데려와서 인질로 삼는 정책도 진행했다. 한편, 그는 이란 관리와 조지아 관리를 동등하게 대우했으며, 카르틀리 왕국이 쓰던 관직을 이란식으로 개명하되 각 지위의 기능을 변경하지 않아서 조지아 귀족들이 적응하기 쉽게 했다. 또한 조지아 궁정에 이란의 궁중예법과 관습을 도입했다. 개인적으로 사피 샤와 가까운 관계였던 그는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화려한 연회를 개최하고 거리 축제도 종종 열었다. 또한 크티아 강과 간자 강에 다리를 건설하고 아할칼라키 시를 건설하는 등 토목 공사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시기 이란 정부는 카르틀리 왕국의 내정에 강도 높은 통제력을 행사했다. 트빌리시, 고리, 수라미 등 각지의 요충지에 이란군이 주둔했으며, 왕국의 남쪽 지역, 특히 로우리와 가구리는 페르시아 군 총독의 통치를 받았다. 그는 관리를 임명할 때마다 이스파한으로부터 허락을 받아야 했고, 매년 막대한 공물을 제국에 바쳤다. 이 때문에 니콜로즈 베르드제니치빌리 등 일부 조지아 역사가들은 그가 카르틀리 왕국의 독립을 끝장내고 이란의 속주로 삼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했다. 그렇지만 당시 샤의 심복이었던 그로서는 이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며, 이전에 잦은 전쟁과 착취로 피폐해졌던 민중이 그의 치세에 어느 정도 나은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실제로 그의 치세에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와 마을이 되살아났고, 상업이 번성했으며, 인구도 어느 정도 회복되었다.
이렇듯 카르틀리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다스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지는 여전히 불안했다. 그에게 밀려 이메레티로 망명한 테이무라즈 1세는 1634년 카헤티로 복귀한 뒤 카헤티 왕을 선포하고 로스톰에 맞서 싸웠다. 양자의 대결은 수년간 이어지다가 1638년 테이무라즈 1세가 카헤티 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이란에 충성을 맹세하는 조건으로 합의를 봤다. 1641년, 그에게 반감을 품고 있던 카르틀리 귀족들은 테이무라즈 1세에게 카르틀리 왕을 자처하라고 권고했다. 테이무라즈 1세는 자기가 트빌리시로 진격할 테니 그들은 내부에서 호응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음모는 사전에 발각당했고, 그는 테이무라즈 1세에게 호응하려 했던 귀족들을 가차없이 척살했다. 트빌리시 인근까지 이동했던 테이무라즈 1세는 계획이 틀어진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그는 이에 보복하기로 마음먹고 1648년 이란군과 함께 카헤티로 쳐들어가 마가로에서 테이무라즈 1세를 격파하고 이메레티로 쫓아냈다.
이후 카르틀리-카헤티 전역을 잘 다스렸으나,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는 고르자스프 아바치치빌리 공작의 딸 케테반 아바치치빌리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보지 못했고, 1638년 밍그렐리아 공작 레반 2세 다디아니의 누이 마리암과 재혼했으나 역시 자식이 없었다. 이로 인해 후계자가 없는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이메레티 왕자 마무카를 양자로 삼으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1642년에는 시몬 2세의 손자 루아르사브를 입양했으나, 1652년 루아르사브가 암살당하면서 역시 무산되었다. 1653년, 그는 장고 끝에 카르틀리 왕국 남부 일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크란 가문의 일족인 바크탕 5세를 후계자로 세웠다. 1658년 사망하여 이란의 쿰 시에 묻혔고, 바크탕 5세가 카르틀리 왕국의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