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CDC5BD><colcolor=#000000> 랑발 공비 사보이아카리냐노의 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Maria Teresa Luisa di Savoia-Carigna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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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이탈리아어 |
마리아 테레사 루이사 디 사보이아카리냐노 (Maria Teresa Luisa di Savoia-Carignano) |
프랑스어 |
마리 테레즈 루이즈 드 사부아카리냥 (Marie Thérèse Louise de Savoie-Carigna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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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49년 9월 8일 | |
사르데냐 왕국 토리노 카리냐노 궁전 | ||
사망 | 1792년 9월 3일 (향년 42세) |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 ||
배우자 |
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 (1767년 결혼 / 1768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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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카리냐노 공 루이지 비토리오 | |
어머니 | 헤센로텐부르크의 크리스티네 공녀 | |
형제 | 카를로타,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 레오폴다, 폴리세나, 가브리엘라, 에우제니오, 카테리나 | |
종교 | 가톨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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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세기 프랑스 왕국의 귀족. 마리 앙투아네트의 가장 충직한 친구로 유명하다.2. 생애
2.1.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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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발 공 루이 알렉상드르 |
랑발 공은 도박 중독과 여성 편력으로 20살이 되기 전부터 평판이 안 좋았다. 부부는 처음에는 사이가 좋았으나,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랑발 공은 신나게 애인들을 만들며 문란한 생활로 돌아갔다. 그리고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났을 무렵 남편인 랑발 공은 성병에 걸려 사망했다. 후계자가 없어 툴루즈 백작+랑발 공작위도 그대로 단절된 것은 덤. 원칙적으로 랑발 부인은 수녀원에 들어가야 했으나 18살에 과부가 된 며느리가 안쓰러웠던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1725 ~ 1793)[1]과 시누이 루이즈 마리 아델라이드 드 부르봉(1753 ~ 1821)[2]의 도움으로 궁정에 머무를 수 있었다.
2.2. 왕비의 최측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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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에게 책을 읽어주는 랑발 부인 |
1770년 5월 14일 프랑스의 왕세자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했다. 랑발 부인은 촌수 상으로 루이 16세의 8촌 작은할머니 뻘[3]이었으므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가 되었고,[4] 낯선 프랑스에서 외로움과 중압감에 시달리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중하면서 다정했던 랑발 부인을 무척 좋아했다. 왕세자비의 총애와 더불어 왕세자의 남동생들이 연이어 사르데냐 왕가와 통혼하면서[5] 프랑스 궁중에서 랑발 부인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랑발 부인은 다른 귀족들과 달리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1774년 루이 16세가 즉위하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발 부인을 시녀장 바로 위의 직위인 궁녀장[6]으로 임명했다. 왕비와 만나려는 사람들, 왕비에게 전해지는 모든 문서, 서신들은 랑발 부인을 거쳐갔다. 궁인들은 이에 불만을 표했는데, 이런 중대한 자리에 오르기에 랑발 부인은 너무 어렸기 때문이다. 또한 50,000 크라운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연봉도 시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몇몇 사람들의 중상모략에도 불구하고 랑발 부인을 향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신임은 굳건했다.
그러나 1776년 이후 폴리냑 공작부인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가까워지면서 왕비의 최측근 자리를 내어줘야 했다. 궁녀장의 자리 또한 폴리냑 공작부인의 것이 되었다. 그럼에도 랑발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는 좋은 친구 사이를 유지했으며, 궁녀장 자리와는 상관없이 폴리냑 공작부인과도 나름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한편 궁밖에서는 랑발 부인이 왕비의 동성 애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물론 근거는 없는 찌라시였다. 반군주주의 선전 활동으로 랑발 부인과 마리 앙투아네트를 묘사한 음란한 그림이나 글이 민간에서 퍼져나갔다.[7]
2.3. 비참한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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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발 부인의 죽음, 가에타노 페리 作 |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많은 귀족과 왕족이 해외로 망명했다. 랑발 부인은 소식을 듣자마자 국왕 부부가 연금되어 있던 튈르리 궁전으로 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셨다. 왕비의 최측근이었던 랑발 부인 또한 민중에게 왕족 못지않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1792년 8월에 랑발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탕플 탑에 갇혔다.
이후 라호루스 감옥으로 옮겨졌다가 9월 대학살 때 군중에 의해 끌려 나왔다. 군중은 랑발 부인에게 혁명의 정당성과 자유, 그리고 평등을 인정하고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한 증오를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랑발 부인은 "전자는 기꺼이 하겠으나 후자는 내 마음이 거부하니 차마 하지 못하겠군요."라고 대답하며 끝까지 맹세를 거부했다.[8] 분노한 군중 중 한 명이 쇠망치로 랑발 부인의 머리를 가격했다. 뒤이어 군중들에게 두들겨 맞고 날붙이에 찔린 랑발 부인은 숨이 끊어졌다. 군중은 랑발 부인의 머리를 꼬챙이에 꽂아 파리를 행진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있는 탕플 탑 창문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광경을 목격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랑발 부인의 비참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기절하며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로부터 1년 후, 랑발 부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마리 앙투아네트도 혁명 재판소의 단두대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3. 여담
-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의 왕비였던 헤센로텐부르크의 폴릭세나 공녀의 조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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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발 부인과 함께
마리 앙투아네트의 측근으로 유명한 폴리냑 공작부인[9]은 랑발 부인이 마지막까지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시던 것과 정반대로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누구보다도 먼저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가 몇 년 후에 죽었다.
폴리냑 공작부인은 최근에서야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정한 충신으로 주목을 받게 된 랑발 부인과 달리 이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루는 매체에서 거의 무조건 나오는 인물이다. 만화 및 애니메이션 베르사이유의 장미와 2006년작 영화 마리 앙투아네트 영화에도 등장하는데 그 묘사가 판이하게 다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무기삼아 사치와 향락을 부리며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을 대차게 떨어트리는 건 물론, 자기 가문의 지위를 높이려는 목적으로 11세 밖에 안 된 어린 딸 샤를로트를 70세가 넘은 소아성애자 공작과 강제로 결혼시키려는[10]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위선자로 등장한다.
반면 2006년작 영화에서는 다소 경박하며 함께 사치를 부리긴 하지만 랑발 부인과 마찬가지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며[11] 후반부에 베르사유 궁전을 떠날 때도 마리와 마지막 우정의 포옹을 나누고 슬픈 마음으로 떠나는 상당히 순수하고 든든한 친구로 묘사된다. 이처럼 매체마다 폴리냑 부인의 성격과 마리 앙투아네트를 향한 마음 등이 다르게 묘사된다. 또한 어떤 기록에서는 폴리냑 부인은 탈출 성공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을 듣고 극심한 슬픔에 잠겨 얼마 안 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있다.
-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측근인 동시에 폴리냑 부인과 다르게 어떤 사욕도 안 보이고 프랑스 혁명 때도 끝까지 곁을 지키는 진정한 충신이자 친구인 것에 반해, 앞서 서술했다시피 폴리냑 부인에 비해 매체에서의 등장이 현저히 적으며 다소 소외되었지만 최근 마리 앙투아네트를 다룬 매체에서 자주 나오는 편이다. 먼저 만화 경국의 재봉사 로즈 베르탱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최측근 시녀로 나오며 동시에 오를레앙 공작부인 루이즈의 올케 언니라는 고증도 잘 지켜 나왔다. 또한 악역 영애로 전생했을 텐데 마리 앙투아네트였습니다에서 환생한 주인공의 전담 시녀로 임명되며 뒤바리 부인의 진짜 모습이나 프랑스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알려주는 든든한 조력자로 나온다.
- 비극적인 죽음으로 유명한 랑발 부인의 최후에 대해서 자극적인 사족이 붙은 여러 말들이 전해진다.
- 랑발 부인이 사망할 당시 분노한 군중에 의해 산 채로 내장이 꺼내지고 시간을 당했다는 말이 있는데, 근거없는 하드고어 음란물류에서 비롯되어 지어진 이야기다.[12]
- 야사에 의하면 창문 밖으로 보인 랑발 부인의 머리를 본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명을 지르며 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행 중 다행인건지, 마리 앙투아네트가 갇힌 곳에서는 군중이 지나가는 거리를 볼 수 있는 창문이 없었다.
- 확실한 것은 랑발 부인의 유해는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 그러나 지나치게 고어스러워서 오히려 진위가 의심되는 랑발 부인의 최후가 자극적인 이유도 당시 각종 가짜뉴스성 호외가 난무했기 때문이다. 개중 랑발 부인의 최후에 대해 가장 근거 있다고 평가받는 자료로 전기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와 서술이 있다. 직접 조사와 당시 보도된 시민일보들의 호외와 풍문을 추려낸 그의 의견에 따르면 자신의 전 주인을 옹호하는 랑발 부인에게 군중들이 격노하여 '적자 부인(앙투아네트를 부르는 멸칭)의 개'라고 부르며, 목을 벤 시신을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며 칼로 훼손해서 시신이 마치 잘게 썰린 고깃덩이처럼 참혹했고 점점 훼손이 심해져 끌고 다닐 수 없게 되자 대로변이나 강가에 내버렸다는 것. 더욱이 이 처형 과정을 목격한 간수들이 지나가며 나누는 이야기를 감방의 마리 앙투아네트가 모두 듣고 혼절했다는 이야기다.[13] 이 또한 수많은 가설 중 하나지만 시신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고 추려 묻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된 이유, 그의 사망을 알게 된 경로까지 사람들이 갖는 의문에 가장 타당한 결론으로 여겨진다.[14]
[1]
본명은 루이 장 마리 드 부르봉(Louis Jean Marie de Bourbon).
루이 14세의 손자(
몽테스팡 후작부인과의 사생아 툴루즈 백작 루이 알렉상드르 드 부르봉(1678 ~ 1737)의 아들)다.
[2]
오를레앙 공작 루이필리프 2세와 혼인하여 오를레앙 공작부인이 되었다.
루이필리프 1세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즉 루이필리프 1세 국왕은 루이 14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3]
그러나 나이상으로는 루이 16세보다 고작 5살,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고작 6살 많았으며 루이 16세의 요절한 이복누나 마리 테레즈(1746 ~ 1748)는 랑발 부인보다도 3살 더 많았다.
[4]
유럽의 귀족 여성에게 있어 왕비의 시녀가 되는 것은 가장 큰 영예 중 하나였고, 아무나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전술했듯이 시누이 루이즈가 당시 프랑스 왕정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기혼 여성이었기에 이 인연으로 시녀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5]
루이 16세의 동생
프로방스 백작 루이는 샤르데냐 국왕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의 딸
마리아 주세피나와,
아르투아 백작 샤를은 마리아 주세피나의 동생 마리아 테레사와 결혼했다.
[6]
정확히는 왕비 가정 기관 총감(쉬랭탕당트)이며 왕비를 대신해 시녀들에 대한 명령 철회 및 지시도 가능한 큰 직위였다. 그러나 지나친 급여와 특혜 문제로 루이 15세 때 폐지 되었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부활시켰다. 그만큼 랑발 부인에 대한 마리의 총애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7]
사실 당시 혁명파의 선전 활동은 왕비의 모든 여성 측근들이 왕비와 동성애 관계라고 몰아갔다.
[8]
이때 시아버지 팡티에브르 공작이 보낸 사람이 맹세를 하라고 말했지만 랑발 부인은 그에게 왕비를 자유롭게 해달라고 답했다고 한다.
[9]
본명은 욜랑드 마르틴 가브리엘 드 폴라스트롱.
[10]
샤를로트는 이후 무도회에서 공작에게 강제로 손키스를 당하자 이성을 잃고 투신자살하며 짧은 생을 마감한다.
[11]
작중 묘사로 봐도, 경박하다는 것 말고는 그냥 흔히 쾌활하고 신나는 것들을 즐기는 외향적인 친구로 묘사된다. 전문 헤어 디자이너 레오나르와도 말 놓고 수다를 즐기는 등, 소위 인싸력도 좋은 편이다.
[12]
바스티유 탈환 이래 가장 선호된 귀족 처형법은 목을 잘라 매다는 것이고 랑발 부인의 경우 정도가 과해서 세간에 회자된 것인데 그마저 능가한 엽기 처형을 했다면, 당연히 전 유럽에 보도되었겠지만 프랑스 상황을 예의 주시한 주변 왕정 혹은 공화제에 호의적인 유럽 국가들을 통틀어 나라 밖에선 단 한 건의 공식 보도조차 없었다.
[13]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주리 사형수 감옥에 수감되어 처형되기 전까지 기른
빠삐용 품종의 강아지를 함께 보살피고 식사를 배식해 주는 잡무를 맡아 잠시 머물렀던 여성이 있는데, 로잘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랑발 부인의 죽음을 전해듣고 그 충격으로 하혈하고 말수가 줄어든 앙투아네트를 가엾게 여겨 머무는 동안 친절히 대해 주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이케다 리요코는 이 실존인물을 대체역사 만화인 베르사유의 장미의 주요 등장인물
로잘리 라 몰리에르로 재창작했다.
[14]
그 전에도 망명이 있었지만 랑발 부인의 죽음은
뒤바리 부인의 처형과 함께 동산과 부동산을 현금화 할 수 있는 프랑스 귀족들의 망명러시가 급격히 늘어난 결정타가 되었으며, 오히려 사적 제재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켜 혁명이 끝난 뒤 지도원수들의 추가 처형과 탄핵이 이어지는 뜻밖의 나비 효과가 되었다. 나비 효과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파리의 유력 귀족들이 망명해 떠난 자리를 부유한 시골 귀족들이 차지하면서 새로운 유형의 살롱과 예술, 기술 공임으로 부유해진 신흥 부르주아 계층의 세력들이 득세하는 요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