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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4 07:41:40

라마 오돔

라마 오돔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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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파일:FIBA 농구 월드컵 로고.svg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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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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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83 1983-84 1984-85 1985-86 198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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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88 1988-89 1989-90 1990-91 199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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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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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조지프 오돔
Lamar Joseph Odom
출생 1979년 11월 6일 ([age(1979-11-06)]세)
뉴욕주 뉴욕시 퀸스
국적
[[미국|
파일:미국 국기.svg
미국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출신학교 로드아일랜드 대학교
신장 208cm (6' 10")
체중 104kg (230 lbs)
윙스팬 224cm (7' 4")
포지션 파워 포워드 / 스몰 포워드
드래프트 1999 NBA 드래프트 1라운드 4순위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지명
소속 팀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1999~2003)
마이애미 히트 (2003~2004)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2004~2011)
댈러스 매버릭스 (2011~2012)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2012~2013)
사스키 바스코니아 (2014)
등번호 7번 - 클리퍼스 / 마이애미 / 레이커스 / 댈러스
14번 -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

1. 개요2. 일생
2.1. NBA 입성 이전2.2. NBA 시절2.3. NBA 이후
3. 수상 내역4. 플레이 스타일5. 여담

[clearfix]

1. 개요

미국의 농구인으로, 불우한 가정사를 겪었으며 NBA에선 게으름과 사탕 중독[1][2][3] 같은 워크에틱 문제로 생각보다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말년에 여러가지 불우한 일을 겪으며 몰락한 풍운아.

과거 배우자가 카다시안 가문의 삼녀인 클로이 카다시안이다.

한국 NBA 팬덤에서의 별명은 '옥돔'.

2. 일생

2.1. NBA 입성 이전

오돔은 뉴욕주 뉴욕시 퀸스의 사우스 자메이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헤로인 중독자인데다, 불과 어머니가 12살 때 대장암으로 죽고 외할머니 손에 자라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다.

고교 때는 퀸즈의 크리스트 더 킹 신학 고등학교 외 3개교를 전전했으며, 코네티컷 주 뉴 브리튼의 세인트 토마스 아퀴나스 고교 때는 제리 디그레고리오 감독[4]의 가르침을 받아 1시즌 동안 천재적인 솜씨로 1997년 <퍼레이드> 지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고, 1996 및 1997년에는 동지 선정 올 아메리칸 퍼스트 팀에 뽑혔다.

훗날 NBA 선수가 되는 엘튼 브랜드 론 아테스트와 같은 AAU팀에서 뛰었고, 아디다스 ABCD 캠프에서는 훗날 레이커스 동료인 코비 브라이언트와 뛰었다고 한다.

2.2. NBA 시절

1997년 네바다 대학교 라스베가스 캠퍼스(UNLV)에 농구 특기생으로 특별 입학했으나, 잡다한 문제로 입학 승인이 거부돼[5] 이듬해에 로드아일랜드 대학교로 편입했다.

재학 1년간 짐 해릭 감독[6]에게 지도를 받아 1998-99 시즌에 컨퍼런스 챔피언을 차지하고 NCAA 전국대회 3년 연속 진출에 공헌해내 컨퍼런스 최고의 신입생으로 뽑히기도 했으며, 곧바로 NBA 드래프트에 참가했다. 단축시즌에 9승 41패라는 부진한 성적을 거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에 뽑히고 데뷔전부터 30득점 12리바운드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달성, 무난하게 루키 퍼스트팀에 들어갔지만 이후 클리퍼스를 살려내지는 못했다. 2001년에는 마리화나 사용이 적발되어 징계를 받는 사고도 쳤다. 같은 시기에는 대리우스 마일스와 퀸틴 리차드슨에 이은 '3단 앨리웁'으로 화제가 됐다.

제한적 FA가 된 오돔은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했다. 에디 존스, 루키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팀을 이끌며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뛰는 기쁨을 맛봤다. 이후 한 시즌만에 샤킬 오닐 트레이드 때 카론 버틀러, 브라이언 그랜트와 묶여 레이커스로 떠났다. 코비 브라이언트 외에는 딱히 돋보이는 선수가 없어서 2000년대 중반에는 고생을 하다가 명감독 필 잭슨을 모셔오고, 잭슨의 컨트롤하에 앤드류 바이넘의 성장과 파우 가솔의 영입으로 레이커스는 챔피언십 컨텐더로 부상한다.

가솔-바이넘 트윈 타워 스타팅을 앞세우기 위해 필 잭슨은 오돔에게 식스 맨으로 뛰기를 요구했다. 오돔은 처음에는 아쉬워했지만 실제로 다재다능한 그의 능력은 식스 맨 자리에서 빛을 발했으며, 트라이앵글 오펜스 꼭지점에서 자신의 장기인 시야와 패싱능력을 앞세워 활약하면서 레이커스의 2연패에 공헌하고 마지막 시즌에는 식스 맨 상까지 수상했다. 거기에 2010년에는 세계 농구 선수권 대회에 미국 대표팀에 선발되며 농구 선수로서는 사상 최초로 단일 년도에 NBA 파이널 FIBA 농구 월드컵을 동시에 우승하는 기록을 세운다.

하지만 오돔의 제대로 된 커리어는 딱 거기까지였다. 2011시즌 쓰리핏을 노리던 레이커스는 댈러스 매버릭스에 일격을 당하며 2라운드 탈락으로 마무리 되었고,[7] 레이커스 구단은 노쇠화를 보이는 코비 브라이언트 하에서 더 달리기 위해 2004년처럼 판타스틱 4를 결성하려고 스티브 내시 드와이트 하워드를 데려오는 선택을 했고, 그 과정에서 오돔은 버려지듯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된다. 트레이드 되었을 때 댈러스 팬들은 제법 기대를 했지만 오돔은 원래도 필 잭슨의 카리스마와 LA생활로 유지되던 멘탈이 버려지듯 트레이드 된 충격과 함께 날아가버리면서 그야말로 최악의 먹튀로 전락하고 만다. 그는 댈러스에서 못하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운동선수로써의 자세조차 되어있지 않은 수준으로 정신 나간채 코트에 나왔고 NBA G 리그로 내려갔다 오거나 플레이오프에서는 뛰지도 못하는 등 추하기 그지 없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첫 소속팀이던 클리퍼스로 돌아갔지만 기량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2.3. NBA 이후

그렇게 2013년을 끝으로 LA 클리퍼스와 결별한 후 2014년에 스페인 리그에서 뛴 것 말고는 선수로서의 소식은 별로 기대할 게 없었고, 손대범: 이렇게 훅 간 선수 처음 봤어요 같은 해 6월에 뉴욕 닉스와 계약만 하고 경기장에서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부인인 클로이 카다시안과 이혼 소송을 진행한다거나, 마약 문제나 음주운전 같은 소식들 뿐이었다. 그러다 2015년 10월 13일(현지 기준) 뜬금없이 코카인에 쩔어서 의식이 불명인 상태로 성매매 업소에서 쓰러진채 발견되었다. 다행히도 이후 의식을 회복해 재활 중이기는 하지만 오돔이 급작스럽게 몰락한데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이후 2017년 11월에도 LA에 위치한 나이트클럽에서 정신을 잃은 상태로 발견되어 구급차로 이송되었다. 사유는 약물 남용으로 추정되며, 다행히 건강한 모습으로 12월 18일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열린 레이커스 레전드이자 전동료 코비 브라이언트의 영구결번 행사에 참석했다.

3. 수상 내역

수상 내역
파일:NBA 로고.svg NBA 올-루키 퍼스트 팀 (2000)
파일:NBA 로고.svg NBA 올해의 식스맨 상 (2011)
파일:FIBA-Logo.png 2010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터키 금메달[8]
파일:오륜기(여백X).svg 2004 아테네 올림픽 동메달

4. 플레이 스타일

한때 제 2의 케빈 가넷, 왼손잡이 매직 존슨 등의 기대치를 반영한 평가를 들었을 정도로 올 어라운드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선수다. 탑에서 패싱 게임을 할수 있는 시야를 갖추었고, 괜찮은 핸들링을 가졌으며 운동능력도 뛰어났다. 시즌 평균 더블-더블을 2번이나 기록했을 정도로 골밑에서 경쟁력도 나쁘지 않은 선수였다. 유튜브에서 그의 영상을 검색해보면 전성기 시절 꽤 멋진 무브들을 감상할 수 있다.

대신 슈팅력이 부족해 득점력은 기복이 심한 모습을 보여줬고, 무엇보다도 게으름이 문제였는데 비시즌에 몸을 관리하면서 기술을 쌓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몸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 탓에 몸상태가 늦게 올라오는 모습을 보였다. 실제로 2010-11 시즌에는 비시즌에 FIBA 선수권 대회에 나서느라 몸관리를 일찍 한 결과 이전 시즌들보다 괜찮은 활약을 했다.[9]

이런 탓에 사람들은 라마 오돔의 멘탈이 레이커스 시절 같은 팀의 코비과 컨퍼런스 경쟁팀인 스퍼스의 드래프트 동기인 지노빌리의 반만 닮았으면 1옵션급이 되었을것이다에서 한계가 명확하다는 평가까지 다양하지만 공통적으로 지금의 커리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사실 최대한으로 성장했어도 코비, 지노빌리 같은 타입보다는 스카티 피펜 같은 유틸리티 타입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오돔은 슈팅력이 나쁘진 않았지만 슈팅터치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기복도 상당히 심했다. 자유투 성공률의 경우 커리어 69.3%로 75%를 넘긴 적이 단 한번 뿐이다. 피펜은 커리어 70.4%였는데 초창기엔 안 좋다가 꾸준히 성장한 피펜과 달리 오돔은 그냥 널뛰기를 했다. 슈팅 터치가 상당히 투박했던 편. 또한 최정상급 수비력을 갖춘 피펜과 달리 수비력도 안 좋았고, 시야와 리딩이 좋긴 했지만 풀타임 리딩을 본 적은 사실상 없다. 사실 성장세를 예측하기 힘든 선수인게, 2-3번이 아니고 3-4번에 걸쳐있던 선수인데 그렇다고 케빈 가넷처럼 강력한 보드장악력이나 골밑수비력이 있던 것도 아니다. 2-3번이나 3-4번이 할 수 있는 것을 두루 할 줄 아는데, 각자 부분에 있어선 저들보다 확연히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워낙 두루두루 괜찮아서 (제대로 성장했을시) 뭐가 주특기였을지 짐작하기 힘들다.

물론 저렇게 애매하게 잘하는데도 저게 다 NBA에서 통할 수준이었다는 것 자체가 미친 재능인 건 맞다. 어떻게 보면 그 애매함 때문에 기대치가 더욱 올라간 것도 있다. 피펜은 다재다능했지만 확실히 외곽선수에 가까웠고, 가넷은 놀라운 볼핸들링과 게임리딩 실력을 지녔지만 누가봐도 골밑에서 승부해야할 선수였다. 그런데 신인 시절 오돔은 둘 다 잘할 것만 같은 선수였던 것.

그러나 그는 여러가지 대내외적인 악재와 부족한 자리관리로 재능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고, 1999년 드래프트에서 상위픽인 1라운드 4위를 한 선수치고는 결국 크게 성장하지 못한 케이스이다.[10]

5. 여담



[1] 농구만 잘하면 사생활은 절대 신경 안 쓴다는 필 잭슨 감독이 직접 사탕 금지령을 내렸을 정도였다. 그 심각성이 얼마나 컸냐면 필 잭슨은 그 데니스 로드맨에게도 딱히 터치를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로드맨이 97-98시즌 도중 휴가를 요청하자 경기력에 지장을 주지 않게 하기 위해 (당시 피펜의 장기결장으로 노장인 조던과 로드맨의 부담이 커졌고, 이에 따른 스트레스가 쌓인 상황이었다) 시즌 중 휴가를 허가했을 정도. 그리고 샤킬 오닐의 최전성기 때에도 엔터테이너와 같은 외도 활동에 대해서도 크게 아쉬워하기만 했지 막지는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 필 잭슨이 오돔에게는 직접 사탕 금지령까지 내릴 정도로 사생활에 어느 정도 간섭했다는 것은 오돔의 자기관리가 그 사생활 잘 터치하지 않는 필 잭슨이 보기에도 매우 심각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2] 우리가 생각하는 사탕 뿐 아니라 영어에서 candy라고 하면 초콜렛을 포함해 단 과자 전반을 일컫는다. 즉 단 걸 입에 달고 살았단 얘기로 엄밀히 우리말로 따지면 사탕 중독이라기보다 '당 중독'에 가깝다. 당 중독은 그냥 단순히 단 걸 많이 좋아하는 수준을 넘어 거의 마약처럼 단 것을 끊임없이 찾아 먹는 행동으로, 정신과 진단명으로 명시돼 있을 만큼 일종의 질병으로 분류된다. 당분을 과다섭취하면 당연히 몸에 여러 부작용이 생기는데 그 중 하나가 인지도 저하 문제로 이는 농구선수로선 심각한 문제다. 오돔은 커리어 내내 산만해서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 점을 당분 과다섭취와 연결해보면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 몸관리와도 당연히 관련있고. 위의 잭슨 일화와 연결해보면 잭슨은 취미생활이 심각한 경기력 저하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자율을 보장해줬는데, 오돔의 당 중독은 경기력에 심각한 저하를 주는 수준이었다 짐작할 수 있다. 로드맨의 경우 몸관리 하나는 철저한 선수였고, 샤크는 레이커스 후반부로 갈수록 체중조절은 실패했지만 리그 최고 센터로서 기량은 꾸준히 유지했다. 실제로 그는 잦은 부상으로 MVP횟수는 적어졌지만 레이커스는 샤크의 부상 때문에 플레이오프에서 발목잡힌 적은 없다. 그러나 오돔은 이 둘과는 다르게 기본적인 자기관리 문제부터가 매우 심각했고, 심지어 프로의식 결여를 의심할 만한 일화들도 굉장히 많았다. [3] 클로이 카다시안과 결혼했을 당시에 카다시안 리얼리티에서 오돔을 치과에 데려가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로 치아 상태도 안 좋았다. 원인은 당연히 사탕을 비롯한 단 것들. 무려 7시간동안 6명의 치과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았다. 의사들 중 한명은 그의 치아상태를 보더니 왜 캔디맨인지 알겠다고 할 정도였다. [4] 1998년 로드아일랜드대 편입 당시 코치-선수 관계로 다시 만났다. [5] 2000년에 리쿠르팅 당시 후원자인 치과의사 데이빗 챕맨 등에 의한 뒷돈 거래 등 비리 행위의 정황이 드러나 포스트시즌 1시즌 출전정지 등의 징계를 받았고, 오돔을 스카우트했던 빌 베이노 감독이 동년 12월에 쫓겨났다.( 참고1, 참고2) [6] 레바논계 미국인으로 1938년 7월 25일 웨스트버지니아 주 찰스턴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스톤월 잭슨 고등학교와 모리스 하비 칼리지(현 찰스턴 대학교)를 졸업, 1966년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땄다. 1963년 모닝사이드 고등학교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1969년 감독으로 승진, 유타 주립대학교(1973~1977)와 UCLA(1977~1979)에서 코치로 대학 무대를 점차 경험하여 1979년 페퍼다인 대학교 감독으로 발탁되어 임기 9년 동안 NCAA 전국대회 4회, NIT 2회 진출을 각각 달성했고, 특히 1982년 전국대회 때 32강까지 가는 등 수완을 보였다. 1988년 UCLA로 전근간 후 1995년 전국대회 때 결승까지 가서 20년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게 했고 임기 8년 간 푸 리차드슨, 트레버 윌슨, 제럴드 매드킨스, 키스 오웬스, 대릭 마틴, 트레이시 머레이, 미첼 앤더슨, 에드 오배넌 등을 육성하거나 발굴했다. 그러나 찰스 오배넌 및 카메론 달러의 리쿠르팅 과정에서 벌인 만찬 당시 영수증 위조 혐의로 인해 감독직에서 쫓겨났고, 1997년 로드아일랜드대 감독으로 복귀한 뒤 커티노 모블리의 대학시절 마지막 시즌을 함께했다. 1999년에 조지아 대학교 감독으로 이적해 2001년 및 2002년 3월의 광란에도 진출시켰으나 2003년 들어 코치였던 아들 짐 해릭 주니어가 토니 콜 등에게 금품을 수수하거나 농구 전술 수업에 불참했음에도 A학점을 주는 등 비리를 저지른 게 NCAA에 의해 발각되어 그가 쫓겨났고, 해릭 자신도 재계약을 못 하고 해임됐다. 또한 NCAA 측은 2001-02 및 2002-03 시즌의 승점 일부를 삭제하고, 짐 해릭 주니어에겐 비리에 엮인 선수 2명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이유로 자격정지 7년을 내렸다. 반면 해릭 본인은 덴버 너기츠의 스카우터, NBA G 리그 팀 베이커즈필드 잼(현 모터시티 크루즈) 감독, 프라임티켓 해설위원 등을 거쳐 2018년부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노스릿지 캠퍼스의 코치로 재직 중이다. [7] 제4경기 때 고의로 노비츠키를 팔꿈치로 가격해 퇴장당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8] 이 대회까지는 세계 선수권 대회로 불리다 2014년부터 월드컵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9] 보통 구단에선 부상때문에 될 수 있으면 국제대회에 나오는것을 만류하지만 오덤의 경우는 너무 나태한 나머지 구단 관계자들은 물론 동료들까지 그가 국가대표가 되어 일찍 훈련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했다고... 이와 비슷한 케이스가 92년 드림팀 출전이 몸관리 측면에서 도움이 된 찰스 바클리이다. 물론 멘탈 자체가 약했던 오돔과 달리 바클리는 슈퍼스타치고 다소 연습을 게을리하고 몸관리가 좀 안됐을 뿐 경기에선 무시무시한 승부 근성과 강력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10] 사실 1999년 드래프트의 진정한 주인공은 1라운드에서 뽑힌 선수들이 아닌 2라운드에서도 거의 꼴찌에 해당하는 57번째라는 매우 낮은 순위로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선택을 받았던 아무도 성공을 예상하지 못한 마누 지노빌리다. 물론 당시 지노빌리도 이탈리아와 유럽 무대에서 뛰어난 기량을 증명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유럽 리그에서 뛰는 남미의 백인 선수보다는 그래도 다재다능한 모습을 대학시절부터 자주 보여준 오돔에 대해 NBA 관계자들은 더 높게 평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커리어는 잘 알다시피 오돔은 부족한 자기관리와 여러 대내외적인 악재로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하지만, 지노빌리는 스퍼스 이적 이후 팀 던컨, 토니 파커와 함께 BIG 3의 주역 중 하나가 되며 스퍼스에서는 4회 우승, 식스맨상 1회, 올NBA팀 2회, 올스타 2회, 등번호 20번 영구 결번 등의 엄청난 기록을 세우고 아르헨티나 농구 국가대표팀에서도 2004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MVP, 2008 베이징 올림픽 동메달의 업적을 추가하면서 은퇴 이후 명예의 전당에도 입상해 지노빌리와 오돔의 현역 선수 시절 위상 차이는 크게 벌어졌다. 거기에 지노빌리는 오돔보다도 두 살이 더 많다. [11] 오돔을 따라 고향인 LA를 떠나 댈러스로 가기도 하고 오돔이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집을 그에게 맞게 인테리어 하는 등 클로이는 오돔과의 관계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