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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포를란/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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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디에고 포를란의 클럽 경력을 정리한 문서.

1.1. CA 인데펜디엔테

아르헨티나 1부 리그 팀인 CA 인데펜디엔테에서 성인리그 데뷔를 했고, 팀의 주전 공격수로 맹활약했다.

1.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그러다가 2002년, 당시 포워드 자원을 찾고 있던 맨유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딱 내가 원하는 타입의 공격수!'라고 하며 8m의 이적료를 들여 데리고 왔다. 지금의 트레이드 마크인 폭풍간지골도 가끔 넣어주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워낙 들쑥날쑥한 실력에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고[1] 결국 2003-04 시즌을 마지막으로 비야레알로 이적했다.

하지만 포를란은 경기를 읽는 눈이 좋고, 당대 최고 수준의 슈팅 스킬에 나름의 발재간을 가진 다재다능한 선수였지만 수비수와 몸싸움을 해가며 박스 안에서 버텨주거나 수비수를 압도할 수 있는 주력을 갖춘 선수는 아니었다. 아래에도 나오겠지만 포를란은 스트라이커로 활약할 때에도 박스 안쪽 보다는 살짝 바깥쪽에서 가장 무서운 선수였는데 당시 맨유가 가진 자원을 생각하면 이렇게 박스 바깥에서 활약해 주는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롤이 겹치기 때문에 비효율적이었다. 당시 맨유에게 가장 필요했던 포지션은 박스에서 머물면서 베컴과 긱스가 뿌려주는 크로스와 스콜스의 롱패스를 넙죽넙죽 잘 받아먹는 선수였는데 이건 반 니스텔루이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퍼거슨 감독은 반 니스텔루이처럼 '나는 공격수!'같은 마인드를 가진 선수를 싫어했고, 포지션 분업화를 싫어했다. 포를란과 반 니스텔루이의 플레이 스타일만 놓고 보면 퍼거슨은 포를란의 스타일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다.

아마 퍼거슨은 포를란의 준수한 드리블, 최상급 슈팅 능력, 경기를 읽는 눈을 보면서 최종적으로는 맨유 시절 전성기 호날두와 같이 파괴적인 프리롤 공격수로 성장해 주길 기대한 것 같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포를란은 주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드리블도 호날두처럼 파괴적이지 않았다.[2] PL의 거친 수비들 사이에서 볼 키핑을 할 능력도 부족해 반 니스텔루이에게 밀려나고 만다. 당시 국내팬들은 포를란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허걱소리가 나올 정도로 못 해서 허걱란, 기복이 너무 심한 나머지 골을 넣으면 뽀록이 터졌다고 해서 뽀록란이라는 별명을 선사하기도 하였다.

2004-05 시즌 개막전 첼시와의 경기 전 퍼거슨은 포를란에게 비가 내리니 긴 스터드의 축구화를 신고 경기에 나설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짧은 스터드를 선호하는 포를란은 퍼거슨의 말을 듣지 않았고 결정적인 골 찬스를 날리게 된다. 포를란의 짧은 스터드의 축구화를 본 퍼거슨은 분노하며 포를란의 축구화를 땅바닥에 내팽겨쳤고, 이것이 포를란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소속으로 뛴 마지막 경기가 된다.

그래도 퍼거슨 감독과 포를란과의 사이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던걸로 보인다.[3]

1.3. 비야레알 CF

그렇게 비야레알에 새 둥지를 튼 포를란은 프리메라리가 데뷔 시즌부터 기량이 만개하여 사무엘 에투, 호나우두, 히카르두 올리베이라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38경기 25골로 피치치(득점왕)를 차지[4], 자신이 본래 먹튀급 실력이 아니란 것을 톡톡히 증명한다. 그 뒤 2시즌을 더 뛰면서 비야레알의 주포로 활약한다.

맨유에서 실패를 겪은 포를란이 비야레알에서 성공한것은, 비야레알이라는 팀의 매우 보기 드문 특징에서 기인한다. 비야레알에는 후안 로만 리켈메가 있었고, 리켈메같은 클래식한 10번 스타일의 플레이메이커는 그 선수가 팀의 중심이 되어야 기량을 100% 발휘할 수 있었다. 이에 마누엘 펠레그리니 감독은 리켈메를 팀의 주축으로 활용하면서 과장 좀 섞어 리켈메의 비야레알이라고 할만한 전술을 짰고, 그 결과 조금 과장하면 비야레알이 공을 갖고 있는 시간의 90% 정도가 리켈메가 공을 끌고 다니는 시간이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리켈메의 볼 점유를 극한으로 높였다. 거기다가 리켈메가 이렇게 자신을 위해 짜여진 전술을 바탕으로 기량을 120% 발휘하며 볼 키핑에 탈압박에 킬패스나 중거리 슛 등등 온갖 플레이를 다 하다보니 수비수들의 온 신경은 리켈메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러다보니 페널티 에어리어든 그 밖이든 포를란에게 여유 공간이 많이 생겨났다. 여기에 라리가의 전반적인 플레이스타일 자체가 EPL에 비해 거친 파울이나 몸싸움보다는 기술축구를 하는 점도 포를란에게는 더 편했다.

그러나 수비수들이 이젠 포를란에게도 공간을 내주면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집중 견제를 시작하자 성적이 급락하며 두 번째 시즌은 모든 대회를 통틀어 45경기 13골로 파괴력이 현저히 줄어든 모습을 보였고, 결국 포를란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리켈메 빨로 득점왕 한 번 먹은 슈팅 셔틀' 정도가 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비야레알도 포를란이 그 다음시즌 리그에서 36경기 19골을 넣으며 반등의 기미가 보이자 21M 유로를 받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팔아버린다.

1.4.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2007-08시즌을 앞두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페르난도 토레스 리버풀로 이적시키며 공격수 자리에 공백이 생겼고, 그 자리에 포를란을 영입해 공백을 메우려고 했다. 그리고 이 선택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포를란은 떠오르는 신성이었던 세르히오 아구에로와 투톱을 이뤄 뛰었고, 07-08 시즌 모든 대회를 통틀어 53경기 23골 5도움을 기록하며 좋은 기세를 이어나간데 이어 08-09시즌에는 리그에서만 33경기 32골 10도움이라는 미친 퍼포먼스를 과시하며 생애 2번째 피치치를 수상했다. 두 시즌동안 포를란-아구에로 투 톱이 리그에서 기록한 골이 무려 84골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레알과 바르샤 바로 다음가는 수준의 공격력을 보여줄 수 있었다.[5]

09-10 시즌에도 모든 대회를 통틀어 56경기 28골 10도움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코파 델 레이에서도 팀을 결승전까지 이끌었으나 끝내 세비야에게 2대0 패배 준우승했고, 챔피언스 리그는 플레이오프를 통과하여 D조에 들어갔지만 첼시와 포르투에 밀려 3무 3패를 기록했고 포를란은 한 골도 넣지 못한 채 침묵했다. 그나마 상대전적 동률에 원정다득점에서 앞서 아포엘을 4위로 밀어내고 유로파에는 갈 수 있었는데, 꿩 대신 닭이라고 유로파에서 승승장구하며 우승을 거두었고 포를란도 결승전에서 풀럼을 상대로 2골을 넣는 등 9경기 6골의 활약으로 좋은 모습을 보여줬다.

시즌 종료 후 2010 월드컵에 참가하였고 알다시피 월드컵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다. 이 즈음 전성기를 구가하던 포를란은 바르셀로나를 비롯한 유수의 빅클럽들과도 링크가 떴었다.

10-11 시즌 리그 1라운드에서 멀티골, 2라운드에서도 골을 기록했으며 11라운드에서 2골 1도움을했지만, 이 시즌부터 잔부상과 기복으로 많은 고생을 했고, 이에 따라 당시 다비드 비야 리오넬 메시, 페드로 로드리게스의 롤을 동시에 소화할 수 있던 백업을 찾던 바르셀로나와의 링크 역시 사라진다. 결국 모든 대회 통틀어 42경기 10골 5도움이라는 아쉬운 성적을 남기고 시즌 종료 후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이적하게 되었다.

알레띠 시절 포를란은 그의 최전성기라고 할 수 있었다. 특히 모든 조건이 포를란이 뛰기에 최적인 조건이었다. 세르히오 아궤로는 포를란에게는 없었던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의 볼 운반과 돌파 능력이 있었고 거기에 마무리도 할 수 있었으며, 사이드나 조금 처진 위치에서 이 둘을 보조하던 시망 사브로자는 아구에로만큼의 결정력은 없었지만 주력과 테크닉을 이용한 우수한 돌파능력과 크로스 능력을 갖췄다. 덕분에 수비수들의 주의가 이 두 선수에게 쏠리며 상대적으로 포를란을 향한 압박의 강도가 낮아졌고, 그러면서 포를란은 한 박자 빠른 논스톱 원터치 슈팅이나 좋은 위치선정을 이용한 세컨볼 선점을 통해 달리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도 다른 시즌에 비해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포를란 본래의 장기인 중거리 슛의 위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저기서 때리겠나' 싶은 위치에서 때려버리는, 그리고 골을 넣는, 웬만한 캐논 슈터들도 잘 해야 한 시즌에 한 번이나 보여줄까 말까한 골을 시즌마다 네다섯번 씩은 보여줬다. 그런 골을 시즌마다 두 자릿수 정도 넣는 괴수도 있긴 하지만 여기에 온더볼 상황에서도 드리블을 해가며 상대 수비수에게 중거리 슛 아니면 아구에로/시망을 향한 스루패스를 통한 침투라는 강제적 이지선다를 걸 수 있었다. 상대가 후방의 침투를 우려해 소극적으로 수비하면 빈 공간에서 포를란은 환상적인 중거리 슛을 꽂아버렸고, 이 때문에 포를란을 향해 가깝게 붙으면 반 박자 빠른 침투 패스로 아구에로와 시망에게 찬스를 만들어줬다.

다만 이 셋 모두에게 없는 능력치 때문에 아쉬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크로스를 잘 받아먹는 선수가 없었다는 점. 전성기 포를란의 골들을 모은 영상을 보면 아군의 돌파 후 크로스에 의한 골은 별로 없고, 흘러나온 공을 집어넣거나 도박과도 같은 원 터치 슛 아니면 강력한 중거리 슛이 대부분이다. 당시의 아구에로는 부족한 신체조건 때문에 높은 크로스에 대응할 수 없어 주로 측면으로 빠지며 돌파한 뒤 가운데로 볼을 투입했으며, 시망도 애초에 득점에 특화된 중앙 공격수가 아니었다. 대신 아구에로나 시망이나 둘 다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라서 측면 돌파에 이어 중앙으로 볼을 투입해줄 수 있었지만, 정작 최전방의 포를란이 안정적으로 받아서 버텨주거나 연계를 못 하고 도박적인 원터치 슛이나 흘러나온 공 주워먹기 에 주력했다는 건 당시 아틀레티코 공격진의 크나큰 단점이었다. 일부러 박스 바깥으로 나가서 공을 받을 수도 없는 노릇. 아무리 중거리 슛 성공률이 좋아도 결국 중거리 슛이다. 박스 안에서의 슛과 비교하면 성공률이 현저히 낮다.

포를란이 공을 잡고 들어올 때도 문제가 있었다. 포를란은 스킬이나 패싱 센스는 갖췄지만 폭발적인 스피드로 상대 수비를 떨치거나 철벽의 볼키핑을 가지고 있는 선수는 아니었다. 결국 포를란이 공을 잡고 있을 때는 적극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아구에로가 공을 잡고 있을 때에는 박스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이드로 밀어붙이고 크로스를 강요, 시망이 공을 잡고 있을 때에는 좋은 크로스 툴을 제대로 살릴 수 없도록 나머지 둘을 집중 마크하는 식으로 어느 정도 파훼법이 나왔으며 결국 시간이 지나며 공격력이 약화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하락세를 타게 되었다. 그나마 수비력이라도 뛰어났으면 모르겠는데 당시 알레띠는 이 세 명의 공격력에 승부를 거는 팀이었다.

한편으로는 포를란의 노쇠화가 시작된 것 역시 이 즈음이다. 피치치를 달성한 이후 포를란의 골 기록, 경기 내용은 하락 일로를 걸었다.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2011 코파 아메리카 이후의 커리어는 이게 과연 라리가 득점왕 2회, 유러피언 골든슈 2회, 2010 남아공 월드컵 골든볼, 대회 베스트 XI, 2011 코파 아메리카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된 선수와 같은 선수가 맞는지 의심스럽게 만들 정도의 엄청난 폼 하락을 보여주었다.

1.5.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2011년 8월 30일 안지로 떠난 사무엘 에투의 대체자로 인테르로 이적했다.

리그 데뷔전인 US 팔레르모 원정경기에서 선발출전하여 리그 데뷔골을 득점하였지만 팀은 4:3 패배.

하지만 이적 후에는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하면서 인테르 팬들의 원성을 들어야 했다.

사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 마지막 불꽃이었고, 30대에 접어든 포를란은 저물어 가는 별이었다. 인터 밀란에서의 그는 기복도 심했고, 전체적인 기량 저하가 왔다. 애당초 그가 전성기를 보낸 비야레알과 ATM 시절은 25~30세로 선수로써 최전성기를 달릴 때였고 남아공 월드컵때는 이미 31세였으니 인테르로 이적한 시점엔 32이 넘어가는 노장으로 분류되었다. 인테르 또한 주축 선수들을 연속해서 팔려가면서 팀 전력이 급격하게 하락하면서 포를란도 여기에 휩쓸리면서 부진에 빠져들었다. 또한 이는 같은 팀의 동갑 선수인 디에고 밀리토도 가지고 있는 문제였다. 그나마 밀리토는 2011-12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4골을 넣어주며 트레블 시절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부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포를란은 애초에 그런 것도 없었다.

2011-12 시즌 성적은 20경기 2골 3도움. 그야말로 완벽한 먹튀로 낙인 찍혔고, 시즌 후 인테르를 떠나게 된다.

1.6. SC 인테르나시오나우

2012년 7월에 브라질 리그의 인테르나시오나우로 이적했다. 인테르에서 인테르로 이적. 두 시즌을 뛰면서 34경기 10골을 기록했다.

1.7. 세레소 오사카

2014년 1월에 일본 J리그 세레소 오사카와 계약을 맺었다는 오피셜이 떴다. J리그로서는 오랜만에 월드스타급 네임드를 영입한 셈. 주목할만한 점은 포를란이 세레소 유니폼을 입고 뛰는 공식경기 데뷔전이 한국에서 열린다는 것. 2014 AFC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첫 경기를 포항 스틸러스와 갖게 되는데 이 경기는 포항의 홈경기장인 스틸야드에서 2월 25일 열렸다.

후반 18분 교체출전하여 30분 동안 그라운드를 누볐는데 단 한번도 슈팅을 하지 못했다. 아직 팀에 적응이 덜 된 듯 하다. 그리고 세레소 안방에서 포항에게 0-2,산둥에게 1-3으로 참패할때 별다른 활약도 못하며 예상되었던 거랑 달리 그다지 큰 도움이 못되었다. 그나마 최약체라던 부리람 유나이티드와의 안방경기에서 드디어 첫 AFC 챔피언스리그 골을 기록하며 4-0 승리에 기여는 했지만. 정작 중요한 고비인 산둥과 포항전에선 조깅만 했다.

하지만 마지막 6차전 산둥 원정에서 막판 역전골을 넣으면서 2-1 팀 승리에 기여, 아슬아슬하게 팀의 16강진출을 도우며 모처럼 이름값을 했다.

리그에선 7경기 출전해서 감바 오사카전에서 2골을 기록한 걸 비롯하여 3골, 아챔리그 골까지 2014년 4월 중순까지 4골을 기록 중이다. 그러나 2014년 말에 들어서 팀은 최하위권으로 추락, 강등 위기에 처하더니 결국 2부리그로 강등당하고 말았다.
파일:/image/081/2014/11/30/SSI_20141130175154_V_99_20141130175605.jpg
이게 팀이 강등당하고 찍힌 사진이다. 연봉 6억 엔(약 54억원)을 받은 포를란의 최종성적은 리그 26경기 7골, 컵대회까지 포함하면 34경기 9골이 끝이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계속 일본에서 뛰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그 소원대로 6개월 연장 계약을 했는데, 그래도 6개월동안 27억원이다. 한달 월급이 4억 5천만원인 셈인데 2부리그에서 쓰기에도 엄청난 돈이고 무엇보다 폼 떨어진 벤치멤버한테 쓴다는 게 문제였다. 어쨌든 재계약 후 2015시즌 2부리그에서 16경기에 출전해 팀 내 최다인 10골을 터뜨리면서 그나마 활약은 했지만, 당연히 세레소 오사카 팬들에게는 좋은 소리를 듣지 못했다. 결국 2015년 6월 7일에 포를란의 고액 연봉을 감당하지 못한 세레소 오사카가 그를 방출하며 자유계약 대상자가 되었다.

먹튀 기록을 쓰면서 세레소 오사카 팬들은 당연히 너 때문에 강등당했다고 실컷 깠지만, 나중에 포를란이 왕따를 당했다는 소리가 나오자 포를란 대신 주동자로 의심되는 미나미노 타쿠미가 욕을 먹었다. 그리고 이후에 일본 이지메 근절 VTR와 광고에, 왕따를 당했던 디에고 포를란 선수가 출연하게 되었다.

사실 왕따 사건은, 디에고 포를란 선수뿐만아니라 하나의 프로 축구팀으로써는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였기때문에 일본 축구팬들도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사건 이후로 왕따를 당하고도 계속 일본에서 뛰고싶다고 한 포를란을 높게 쳐주는 시선도 생겼다.

1.8. CA 페냐롤

2015년 7월, 자신이 유소년 시절을 보냈던 조국 우루과이의 클럽인 페냐롤에 24년만에 돌아와 뛰게 되었다. 계약기간은 1년 6개월.

1.9. 뭄바이 시티 FC

2016년 8월 13일 트위터를 통해 뭄바이 시티 입단을 정식으로 알렸다. 2017년 1월 1일에 자유 계약 선수로 풀려났다.

1.10. 킷치 SC

2018년 1월부터 6개월간 단기 계약을 맺었다 아르헨티나의 온라인 신문 '인포바에(Infobae)'가 보도하면서 페냐롤로 복귀하는 듯 했다. 그러나 얼마 뒤 홍콩 킷치 SC로 이적했다.

2018년 2월 20일 킷치가 아챔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와 대결하게 되면서 간만에 한국 팬들에게 근황을 알리게 되었다. 포를란 덕에 한국에서도 주목받은 빅매치였지만, 정작 본 게임에서 포를란은 아무것도 못하고 전북에 0:6으로 탈탈 털렸다.

1.11. 은퇴

킷치를 떠난 지 1년이 넘은 2019년 8월 7일, 자신의 SNS를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1.12. 복귀

2022년 2월 11일, 은퇴를 선언한지 약 2년 6개월 만에 우루과이 대학리그의 올드 보이스 풋볼 클럽으로 현역 복귀하였다. #


[1] 이동국, 토마스 브롤린과 함께 더 선에서 선정한 역대 PL 최악의 공격수로 뽑혔다. 사실 이런 상은 유명도가 없거나 출전이 적은 선수 중에서 뽑는게 아니다. 더 못한 선수가 많지만 맨유라는 유명팀에서 기대를 많이 걸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아먹지는 않았는데 포를란이 뽑혔다. [2] 당시 호날두는 스피드가 역대급은 아니더라도 리그에서 상당히 빠른 편이였다. 또한 드리블 역시 잘 풀리는 날에는 전 세계 탑급이라 해도 될 정도였던 수준. [3] 후에 퍼거슨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포를란의 누이의 치료 문제 때문에 스페인에서 지내기를 원했고, 어쩔수 없이 판 배경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포를란이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골든볼을 차지하며 대활약할때도 문자 메세지를 보내줬다고 하며, 포를란 역시 그 후 데헤아의 맨유 이적을 적극 추천했다. 그리고 몇년 후 포를란 본인 역시 퍼거슨의 말을 듣지 않아 후회했다고 인터뷰로 밝히기도 했다. [4] 사실 에투도 25골로 동률이었지만 피치치 시상을 주관하는 마르카에서 에투의 1골을 무효처리함에 따라 포를란이 단독으로 수상하게 된 것. 그래서 시즌이 끝나고 '포를란의 단독수상이냐 에투와의 공동수상이냐?'를 두고 논란이 생겼었다. [5] 여담이지만 2023-24 시즌 지로나 FC 아르템 도우비크 이전까지 무려 15년동안이나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피치치 상을 독식했었다. 물론 이러한 피치치 상의 역사는 메날두의 영향이 컸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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