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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2:26:04

동월지협공전

동월지협공전
(東月氏挾攻戰)
Coordinated Strike upon Eastern Yuezhi
시기 기원전 335년 여름
장소 동월지 부시(膚施), 고망(高望)
(오늘날의 산시성(섬서성, 陕西省) 위린 시(榆林 市) 남동쪽, 내몽골 자치구 어얼둬쓰 시(鄂尔多斯 市) 북부 일대)
원인 동월지의 전방위적 약탈
임호 정벌의 여파로 인한 동월지-조선 간 대립
촉의 남정[1] 공격[2]이 겹친 진의 위기감
교전국 동월지東月氏 조선朝鮮
진秦
지휘관 동월지왕
동월지 북부 대족장
조선 진북장군 조옹(趙雍)
진 서하태수 천연(泉硏)[3]
병력 북부 15,000여 명
남부 37,000여 명

총 52,000여 명
조선 진북군 21,000여 명
진 서하군 30,000여 명

총 51,000여 명
피해 북부 6,150여 명 사상
남부 5,900여 명 사상, 6,200여 명 이탈

총 18,250여 명 손실
조선군 840여 명 사상
진군 11,700여 명 사상

총 12,540여 명 손실
결과 조선의 단독 승리
동월지 세력 일부가 흉노로 이탈
진의 대역전패
영향 흉노의 보복 시도[4]
동월지의 약화
조옹의 20대 나이 대사마대장군 취임 및 무령군(武寧君) 봉작
낙양 회맹의 대초전선 논의에 영향

1. 개요2. 배경
2.1. 동월지, 전방위 어그로를 끌다2.2. 진, 소개 및 유인작전2.3. 조선, 철과 피로 답하다2.4. 동월지의 보복 준비2.5. 조선과 진, 손잡다
3. 전쟁의 전개
3.1. 각 군의 이동3.2. 부시 전투, 1차전3.3. 부시 전투, 2차전3.4. 고망 전투
4. 결말5. 전후처리
5.1. 동월지의 내분5.2. 흉노의 대응5.3. 진의 대응5.4. 조선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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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逐鹿中原)은 시작되었다!에 나오는 가공의 전쟁. 진이 제안했고 조선이 받아들여 동월지를 남북으로 협공하였다. 이 전쟁으로 초원에서 조선의 위상이 한층 상승하였으며, 낙양 회맹 및 이후 작은 위와 제 사이의 협력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부분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다.

지도 링크:

2. 배경

2.1. 동월지, 전방위 어그로를 끌다

동월지는 기원전 346년 흉노, 임호와 연합해 돈황 전투에서 서월지를 상대로 승리, 흉노를 서초원의 패자로 옹립하며 그 위상을 높였다. 그러나 기원전 343년, 동초원의 지배자 동호와 우호관계인 조선의 임호 정벌로 동월지가 조선과 접경하게 되면서 긴장감이 높아졌다. 비록 조선은 동월지에 사신을 보내 흉노-동월지 측과 동호와의 갈등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해명하였지만, 흉노와 동월지는 반신반의하였다. 임호를 멸망시킨 조선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느냐는 문제도 있었고, 동호가 반대로 '전면전이 시작되면 조선에서 10만 대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 소문을 퍼뜨렸기 때문이었다.

이후 흉노와 동월지의 대처 방식은 큰 차이가 있었다. 흉노는 '적이 아니라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지만, 적이라면 확실한 대응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며 조선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한 정보수집에 집중하였다. 반면 동월지는 조선이 기미부주를 설치해 관리에 들어간 구 임호령 일대에 대한 약탈에 여념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조선이 항의할 때는 '안타깝지만 통제가 안 되는 일부 과격파의 일탈'정도로 모르쇠했고, 약탈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사실 동월지의 약탈 행각은 조선만이 피해자가 아니었다. 남쪽의 진을 상대로도 약탈을 연례행사 수준으로 벌였으며, 심지어 같이 서초원의 지배자 흉노에게 고개숙인 의거를 상대로도 패악질을 벌였다. [5] 거듭되는 이러한 약탈은 조선과 진으로 하여금 대응할 필요를 느끼게 하였다.

2.2. 진, 소개 및 유인작전

진(秦)의 경우 기원전 338년 효공(孝公) 영거량이 사망하고 태자 영사[6]가 새 국군으로 즉위하였다. 이로 인해 귀족 세력, 공족 세력, 영거량이 친위세력으로 육성한 군부세력이 국군의 능력을 가늠하는 동시에 서로 미묘한 눈치싸움을 벌이면서 다소 소극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영사는 우선 혼인동맹 관계인 초나라[7]에 접근해 명시적 지지선언을 받아내는 것으로 존재감을 각인시키고 국정 주도권을 가져왔다.

동월지 대책은 이후에 국군 영사와 군부의 수장인 손빈 사이에서 논의되었는데, 원정을 하더라도 유목민인 동월지는 그때만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라 뚜렷한 소득을 보기 어렵다는 점이 문제였다. 다만 손빈은 '일단 관중에 들어온다면 침략자들의 목은 모조리 진공의 것이 될 것'이라며 진군의 역량 자체에 대해서는 자부심을 드러냈다. 이에 따라 영사는 교전을 회피하고 요새 지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 사람과 물자를 순차적으로 소개, 동월지의 방심을 유도하고 약탈을 위해 관중 안쪽으로까지 내려오게 유인해 섬멸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 결과 동월지는 진 방면에서 약탈의 수확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이는 조선이 구원-운중 일대에 설치한 기미부주(옛 임호 영역)쪽의 약탈 비중이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2.3. 조선, 철과 피로 답하다

임호 정벌의 전후처리 과정에서 언급했듯, 조선이 동월지의 구원-운중 기미부주 약탈에 수세적으로 대응했던 데는 동월지 뿐 아니라 누번까지 신경써야 하면서 전력 집중이 어려워진 게 큰 이유를 차지했다. 그러나 기원전 339년 누번이 멸망하고 동호의 친조선계 부족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면서, 조선은 동월지 문제에 온전히 신경을 쏟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간 동월지 측에서는 월경과 약탈의 책임을 "우발적인 일이며 굳이 따지자면 구 임호, 현 구원-운중 기미부주 고위층이 대응을 잘못한 탓"이라 책임회피 및 전가를 해 왔다. 이에 대해 진북장군 자격으로 관련 대응을 총괄하던 대군의 공자 조옹은 "규모도 있고, 일정한 주기도 있고, 제대로 된 명령체계도 있다. 약탈부대라기보다는 정규군에 가깝다." 면서 무력대응을 통해 제대로 한 번 쓴맛을 보여줄 기회를 벼르고 있었다.

국지적인 규모의 약탈과 방어가 몇 년 간 지속된 뒤인 기원전 336년, 동월지의 약탈군은 마침내 4,500여 명의 대규모로 불어났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1) 진의 청야작전으로 해당 방면에서의 약탈 소득이 점차 감소하였다.
2) 조선이 임호 정벌 후 설치한 기미부주의 경계를 황하로 삼으면서, 황하 너머에 살던 임호 부족은 동월지로 귀부하였다. 이들은 조선의 기미부주 체제 정착을 방해하고 해당 영역을 되찾아 복수하고자 하였다.
3) 1과 2에 더해, 몇 년간 지속된 조선의 수세적인 태도로 인한 약탈의 성과는 본래 임호인이 아니었던 다른 동월지 부족에도 탐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혈기방장한 젊은이들이 이에 혹했고, 개중에는 대부족의 후계자들도 있었다.

한방 먹일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진북장군 조옹은 빠르게 이 소식을 접하고 곧바로 대군의 직속병력 7,200여 명으로 대응에 나섰다. 적당히 치고 빠지며 약탈할 생각뿐이던 동월지군은 조선군의 빠른 대응에 조선령 구원 인근에서 삽시간에 포위당했고, 절반에 가까운 4할 8푼의 사상자를 내며 궤주한다. 계속되는 월경 및 약탈에 본보기가 필요하단 조옹의 판단을 따라 조선군은 포로조차 거두지 않았고, 저 사상자는 곧 모두 '사망자'가 되었다. 실력행사를 통해 동월지를 자제시킨다는 판단이었지만, 약탈군에는 동월지 여러 부족의 미래인 젊은이들이 있었고, 이 중 대부족의 후계자들도 있던 탓에 이는 오히려 동월지가 복수전을 결의하는 역효과를 불렀다.

2.4. 동월지의 보복 준비

복수를 결의한 동월지는 전력 집중을 위해 진 방면의 약탈을 금지했고, 살찐 양을 잡아 전투식량으로 쓸 육포를 준비했다. 이전 전투의 승리에도 불안감을 느낀 진북장군 조옹은 동월지를 상대로 첩보를 실시했지만, 진 방면 약탈 금지와 살찐 양을 잡는다는 소식에 이를 위령제(?)를 준비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실태를 범한다.[8] 다만 계속되는 불안감에 진북군의 경계태세는 그대로 유지시켰는데, 정작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전공 세웠으니 승진시켜달라고 시위하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다 태자 기유의 '그렇게 복잡하게 머리 굴리는 인물이 아니다. 진짜 승진을 원했으면 차라리 대놓고 요구했을 것'이란 설득(?)에 일단 상황을 지켜보기로 하였다.

2.5. 조선과 진, 손잡다

답답한 상황을 타파한 것은 의외로 진나라였다. 기껏 청야를 통해 관중으로 동월지군을 유인하려 했더니 약탈이 뜸해진 데 수상함을 느낀 이들은 정보 수집에 나섰고, 동월지가 조선쪽을 약탈 시도하다 한 방 먹은 뒤 대규모 군사행동을 준비 중이라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다만 그들은 동월지의 행보가 조선을 상대로 복수전을 준비하는 것인지, 아니면 약탈하기 만만찮은 조선보다 자신들을 노리려는 것인지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진 군부의 수장인 좌서장 손빈은 여기서 한 가지 계책을 낸다. '실제가 어떻건 동월지의 목표는 조선이라는 식으로 조선에 사신을 보내 알리자'는 것이었다. 이후 역시 약탈에 시달리던 진이 돕겠다며 조선에 공투를 제의하면 다음과 같은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게 진 조정의 생각이었다.

1) 북적(北敵)의 정보를 알려주고 같이 싸우는 것으로 조선에 은혜를 입힐 수 있다.
2) 이전까지 서먹한 관계이던 조선을 도와 동월지를 토벌해 천하에 진의 아량을 보일 수 있다.
3) 북방민족의 준동을 중원의 패자 제나라에게 상호 증언하는 증인이 되어준다.
4) 진이 조선에 접근하는 것으로 조선과 위(魏) 사이 관계를 약화시켜 진의 동진을 수월하게 한다.

본래는 기원전 335년의 회맹 이후에 사신을 보내려던 진나라였지만, 동월지의 약탈시도와 같은 해인 기원전 336년 촉이 4만여 명으로 남정 일대 탈환을 시도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일전에는 서쪽의 강족, 의거와 충돌하였고, 이번에는 촉까지 준동하면서 동월지 문제를 더 빠르게 해결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일단 동월지가 움직이기도 전에 빠르게 움직이면 실제로 동월지가 어디를 공격하려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는 진진의 설득이 더해져, 영사는 진진을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해 동월지 공동토벌을 제안하게 하였다.

조선 조정은 진진이 들고 온 소식에 크게 놀랐고, 진의 공투 제의를 승낙했다. 다만 이 역시 계산이 숨어 있었다. 북방민족과 투쟁 일변도를 취해온 진과는 달리, 조선은 관시를 통해 초원을 더 잘 이해하고 활발히 상호작용해 왔다. 이를 활용해 이번 공투를 진이 주도한 걸로 사후책임을 떠넘기면 후폭풍을 최소화할 수 있지 않겠냐(...)는 속셈이었다.

3. 전쟁의 전개

3.1. 각 군의 이동

전쟁이 발발한 것은 기원전 335년이었다. 본래라면 식량을 구하기 쉬운 추수철에 맞춰서 이동하는 게 보통이겠지만, 양 군 모두 훨씬 빠른 여름을 작전시간으로 삼았다. 동월지의 경우 보복에 중점을 둔 이상 이미 만들어둔 육포를 활용하여 상대가 상상하지 못한 이른 시간에 움직이겠다는 생각이었다.

문제는 조선과 진 역시 마찬가지로 상대의 허를 찌르기 위해 빠르게 움직일 생각이었던 데 있었다. 조선의 조옹은 북방의 생리에 익숙했고, 진에는 손빈이라는 규격외의 용병가가 존재했다. 조선은 진북장군 조옹이 이끄는 21,000여 명, 진은 손빈이 추천한 서하태수 천연(泉硏)이 이끄는 30,000여 명의 군대로 동월지군이 미처 공격에 나서기 전, 먼저 동월지령으로 선제공격에 나섰다.

싸움이 시작된 것은 진군이 위치한 남쪽이었다. 조선군은 황하를 도하하는데 시간을 써야 했고, 동월지군은 전반적으로 동월지왕이 위치한 남쪽에 전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거기에 동월지는 대병력을 모으는 걸 조선이 눈치챌까 경계한 것인지, 북부와 남부로 나뉘어 집결하면서도 북부군의 집결지 역시 완전 북쪽 끝이 아닌, 다소 남쪽으로 내려온 백토(白土)[9]로 정해놓고 있었다. 이 때문에 동월지가 조선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는데도, 정작 조선군보다 진군이 먼저 동월지군과 마주친다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전개된 것이었다.

3.2. 부시 전투, 1차전

진군과 동월지군의 전투는 동월지왕이 남부군을 집결 중이던 부시 인근에서 발발하였다. 머릿수에서는 37,000여 명의 동월지군이 30,000여 명의 진군보다 우세했지만, 병력의 질에서는 진군이 훨씬 우세했다. 동월지군이 전사라면 질을 가리지 않고 죄다 긁어모으다시피 한 데다 약탈을 넘어선 이런 대규모 집단행동은 오랜만이었던 반면, 진군은 손빈과 그가 발탁한 인사들이 조련하고 위, 한과의 분쟁으로 실전에 익숙한 서하 방면군이 주력이기 때문이었다.

각기 양과 질에서 일장일단이 있는 상황이었지만, 동월지 측은 진군이 북상에서 자신들을 기습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1차전은 진군의 기습에 당황한 동월지군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아가면서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재정비해 태세를 갖추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진이 여태껏 동월지를 유인하기 위해 청야작전을 펼치며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였던 탓에, 진군을 약탈하러 가면 도망쳐서 성벽 뒤에 숨기나 하는 나약한 이들로 오판하고 진 측에서 선제공격할 가능성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이 결과 동월지군은 총병력 37,000여 명의 16%인 5,9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태세를 고쳐세울 수 있었다. 분노한 동월지왕은 자신들은 전 병력이 기병에 가깝다는 점을 이용, 재차 복수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남은 동월지군의 대부분은 진군의 기습에 당한 데 수치심을 품고 이에 찬동하였지만, 약 2할에 해당하는 6,200여 명은 이를 무리한 결정이라고 보고 반발해 이탈하였다. 이탈파는 이후 동월지왕이 이탈의 댓가를 치를 거라 경고한 점, 수장격 인물이 흉노의 좌대장[10]과 인척관계인 점을 고려해 아예 동월지를 떠나 흉노에 귀부하였다.

이미 한 방 먹은 상태에서 복수전을 치르겠다는 동월지왕의 판단은 내부에서도 이렇게 이탈자가 발생하는 등 무리수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3.3. 부시 전투, 2차전

태세를 고쳐세운 동월지군은 기습에 당한 게 언제였냐는 듯, 최정예병들로 구성된 진군을 영혼까지 탈탈 털었다!

처음 2차례의 교전에서 23%의 병력을 손실한 진의 지휘관, 서하태수 천연(泉硏)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 철수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전장이 적지 한복판인 상황에서 사실상 전 병력이 기병으로 기동력 우세까지 쥔 동월지 측이 이를 허락할 리 없었다. 전투는 계속되었고 진군은 여기서 기존 병력의 16%를 추가로 상실하였다. 총병력의 39%인 11,700여 명이 사상당한, 4할 가량을 잃은 사실상의 전멸이었다.

기병 전력에서 동월지가 우세하긴 했지만, 진군이 이전까지 기습으로 동월지군을 몰아붙여 사기가 충만했던 점, 지휘관인 천연도 손빈이 추천한 인재로 우수한 용장[11]이었던 점, 진 서하군은 훈련도 잘 되어 있고 실전 경험도 풍부한 정예부대인 점을 감안하면 동월지군에 별 피해조차 주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한 이번 2차전의 결과는 참으로 이해 가지 않는 진의 졸전이라 할 만 했다.

다만 이렇게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동월지 남부군은 정작 북상의 시기를 늦춰야 했고, 이는 동월지 북부군과 조선군의 교전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3.4. 고망 전투

진군과 동월지 남부군이 교전을 벌이는 동안, 황하를 도하해 남하한 조선군 21,000여 명[12]과 백토에 집결 중이던 동월지 북부군 15,000여 명은 어느 쪽이 먼저 참지 못하고 뛰쳐나올지 인내심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조선군을 이끌던 진북장군 조옹의 경우, 인근 동월지군이 전부 백토에 집결하면서 조선 조정에서 사전 당부했던 2가지 지시사항이 충돌했기 때문에 일단 시간을 끌기로 하였다. '호맹 이남으로 내려가지 마라'는 지시사항과 '무리하지 말되, 싸웠다는 증명이 될 정도의 수급은 확보하라'는 지시사항이 서로 충돌하는 문제[13]를 해소하기 위해, 일단 요격태세로 대기하면서 동월지군이 영내에 침입한 자신들을 격퇴하기 위해 알아서 북상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동월지 북부군의 경우, 조선군의 수가 자신들을 훨씬 상회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리한 교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 북상할 남부군과 합류해 2배 이상의 압도적인 머릿수의 우위를 확보하면 확실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계산이었는데, 이 때문에 양측 모두 상대가 먼저 움직이기를 기대하면서 대치상황이 장기화되었다.

결국 먼저 움직인 쪽은 동월지였다. 남부군이 진군과 교전하느라 합류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소식을 접한 동월지 북부군은 별 수 없이 북상해 조선군과 교전하기로 하였다. 조선이 일반적인 정주국가였다면 그냥 아예 철수했다 군량이 떨어진 조선군이 돌아간 뒤에 복귀한다는 선택지도 있었겠지만, 이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선은 이미 구원-운중 일대의 옛 임호 부족들을 상대로 기미부주 형태의 지배체제를 세워놓았고, 동월지군이 대치를 넘어 아예 철수해버리면 해당 지역의 목초지는 이 기미부주의 부족들에게 넘어갈 공산이 컸다. 돈황 전투 이전까지 동월지와 임호는 경계지대의 영유권을 놓고 투닥거리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삭방, 부창 등 황하 바로 남쪽의 지역들은 본래 임호령에 가까운 경계지대였다가 조선이 임호 정벌 후 기미부주의 경계를 황하로 설정하면서 동월지의 품으로 넘어온 만큼 다시 되찾아갈 개연성도 충분했다. 그러나 조선군 역시 어쨌건 이후 진 측에 역할을 수행했다는 증표로 삼기 위해 수급이 필요했던 만큼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전투는 동월지 측에 더 가까운 고망에서 벌어지게 되었다.

아슬아슬한 선까지 남하했다는 조옹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전투는 조선군이 동월지군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초반 2차례의 교전에서 조선군에 별 피해를 주지 못하고 밀려나며 총병력의 14%를 손실한 동월지군은 3번째 교전에서 9%의 추가 손실을 감수해가면서 상대에게 4%의 손해를 주고 태세를 정비, 이런 괴물들과 더 이상의 교전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철수를 준비하였다. 이런 초원의 전투에서 도주하는 유목민을 정주국가의 군대가 따라잡는다는 건 어림도 없는 소리이니 여기서 전투가 끝나는 게 일반적이지만...

조선은 예외적인 경우였다. 전차병과 보병을 혼용하던 중원 국가들과 달리, 이들은 세후 기식의 시절[14]부터 전차병을 도태시키고 기병으로 대체하는 군제개혁과 이에 발맞춘 마종개량을 추진해왔고, 이 시점에서는 서역의 대완마 다음가는, 어지간한 초원마를 능가하는 수준의 명마로까지 개량에 성공하였다.[15] 여기에 임호 정벌 등을 거치며 대규모 기병 운용법을 충분히 숙지한 명장 조옹의 지휘가 더해지면서, 동월지군은 18%의 추가 피해를 내고서야 도주할 수 있었다.

전투 총피해 조선군 840여 명 사상, 동월지군 6,150여 명 사상. 조선군의 명백한 승리였다. 다만 전장 자체가 조선 조정에서 지정했던 행동반경 제한의 한계에 가까웠기 때문에, 조선측 지휘관 조옹은 더 이상의 추격을 그만두고 적의 수급을 챙겨 조선으로 철수하였다. 더 추격했다면 동월지 북부군은 섬멸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 경우 진군을 무찌르고 북상하던 동월지왕의 남부군을 마주쳤을 가능성이 높단 점에서 실로 절묘한 시기에 이뤄진 철수였다.

4. 결말

조선의 단독 승리.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다. 조선은 동월지를 상대로 함부로 선공을 취하지 못하게 할 정도의 실력을 과시하였다. 또한 진과의 공동행동으로 동월지가 조선 쪽에 온전히 힘을 쏟지 못하게 하였다.

동월지는 왕이 진군을 상대로 대역전극을 벌이며 저력을 과시했지만, 초반 기습으로 잃고 이탈로 빠져나간 전사들의 손실은 어찌할 수 없었다. 여기에 조선에 털리던 북부군을 제 때 지원하지 못했다는 오점까지 추가.

진군은 초반 기습으로 적 전력을 대폭 깎는데 성공했고, 적 전력이 일부 이탈하기까지 했는데도 이후 일방적으로 밀리는 졸전으로 역전패 당하며 체면을 구겼다. 동원했던 병력이 하필 위, 한과 대치하며 진의 동진을 위한 첨병 역할을 하던 서하 방면군의 정예들이라 차후 동쪽 국경 방위에도 문제의 소지가 생긴 것은 덤.

5. 전후처리

5.1. 동월지의 내분

동월지왕의 남부군은 조선군이 수급을 챙겨 여유롭게 떠난 뒤에야 뒤늦게 도착하였다. 이후 책임공방이 이어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남부군은 초반 기습을 당했던 자신들도 역전승을 거뒀는데 북부군이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게 못마땅했고, 북부군은 남부군도 전력의 3분지 1 가량을 잃은 것은 마찬가지인데 저런 태도로 나오는 것을 아니꼬워했다. 거기에 북부군은 남부군이 진군과의 교전에 정신팔려 합류를 뒷전으로 미룬 것 역시 불만스러웠지만, 진군과의 격전에 시달렸던 남부군은 이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던 만큼 사정을 설명했으니 북부군이 이해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계속되는 갈등에 동월지왕은 일단 남북에서 진과 조선이 동시에 공격한 점을 지적하며, 이것이 계획된 공격이고 둘 중 주동자를 찾아내 그쪽 상대로의 복수에 전력을 집중하는 게 맞지 않겠냐는 식으로 관계 봉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북부 대족장은 이를 거부하고, '어쨌건 동월지왕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늦게 합류해서 많은 북부의 전사들이 죽었고, 이 무책임함을 따지는 게 더 중요하다'며 왕을 계속 성토하였다. 동월지왕은 크게 노하여 왕의 뜻을 거스르려 하냐는 말까지 내뱉었고, 이에 북부 대족장은 '그건 중원의 호칭을 가져다붙인 것일 뿐, 너는 우리의 대표지 지배자가 아니다'면서 정면으로 맞섰다.

이렇게 동월지는 총전력의 1/3 가량을 상실했음에도 전후에 남북대치를 벌이는 막장상황에 들어갔는데... 이 뒤에는 웃픈(?) 이유가 숨어있었다. 이번 전투로 강력한 조선군의 실력을 체감하면서 조선과의 싸움을 포기할 필요성을 느꼈지만, 정작 상대가 이를 받아들일지 확신하지 못했던 것. 이 때문에 서로 일부러 내부갈등을 유발, 시선이 외부로 돌아가는 것을 막고 대책을 찾으려 한 것이었다.
어장주(진행자)의 평: 둘 다 현실감각은 있는데 동시에 서로의 현실감각을 믿지 못한다니, 이게 무슨 말이야(착란)

그런데 내용을 살펴보면 또 이해가 되는 게, 북부군의 경우 남부군이 진군에 기습당하고 이탈자가 발생해 이미 상당한 손실을 본 상태에서도 복수하겠다고 덤벼든 공격성을 염려하였다. 저런 전적이 있으니 남북 동시공격의 주모자가 조선으로 결론날 경우 저 공격성이 다시 조선을 향해 분출하고, 자신들까지 덤터기를 쓰는 게 아닐지 걱정할 만도 했다. 한편 남부군의 경우 역지사지의 원리로 따져보았을 때, 자신들이 진군에 복수전을 벌였듯이 북부군 역시 조선에 대한 복수전을 원한다고 여길 만 했다. 특히 북부군이 남부군의 늦은 합류로 인해 패배했다는 식으로 동월지왕을 계속해서 성토한 것은 이런 착각을 부추기기 충분했다.

결국 대치가 이어지는 와중에 물밑협상을 통해 양측은 서로의 오해를 풀어낼 수 있었지만, 이런 갈등과 대립 속에서 훼손된 지도부의 권위는 다시 회복되지 못했다. 그나마 같이 상황을 종합해 본 끝에 '진이 더 먼저 공격한데다 조선은 승리하고서도 철수한 걸 보면 진이 동시공격을 계획한 원흉이다'는 결론에 다다른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그리고 이후 조선이 사간(死間)[16]을 통해 초원에 퍼뜨린 소문 역시 이런 결론을 부추겼다. 자신들만으로는 한계를 느낀 동월지는 상위 세력인 흉노에게도 이를 알리는데...

5.2. 흉노의 대응

서초원의 지배자로 동초원의 동호와 대립하던 흉노는 임호가 멸망한 데 이어 동월지까지 남북으로 협공당한 현 상황을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성을 느꼈다. 다만 이들은 머리에 피가 오른 동월지의 증언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판단, 산하 대부족들을 철저하게 입단속해가며 자체적으로 진상 조사에 나섰다. 그 결과 이들 역시 '원흉은 진'이라는데 동의했지만, 진을 공격하기 전에 눈속임으로 조선을 적당히 공격, 약탈해 힘을 빼놓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조선 역시 진의 꾐에 넘어간 죄가 있는데 주범이 아니라고 놔둘 수는 없고, 진을 공격할 때 조선을 경계하느라 전력을 분산하는 일 없이 전력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위기가 조선에 다가오고 있었다...

5.3. 진의 대응

난장판

3만 대군, 그것도 동부 국경을 지키는 정예병에서 차출해 보낸 이들이 대패한 진의 상황은 저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천연을 지휘관으로 추천한 상군(商君) 손빈의 안목부터 우선 도마 위에 올랐다. 귀족파, 공족파, 군부파가 대립하던 상황에서 군부파의 수장 손빈의 대실책에 귀족파는 희희낙락했다. 이들은 아예 선대 국군(國君)이었던 영거량 말년의 동진 시도 실패에 대한 책임론까지 들고와서 패배의 원흉인 서하태수 천연뿐만 아니라 손빈까지 '귀중한 병사들을 무책임하게 희생시킨 죄'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예상 외의 대패에 분노한 것은 국군인 영사도 마찬가지였지만, 영사도 손빈의 사형까지는 동의하지 않았다. 왕권 강화를 꾀하던 그의 입장에서, 자신이 충분한 기반을 닦지 못한 상황에서 세 파벌간의 균형이 무너지는 것, 특히 귀족파가 득세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했다. 따라서 영사는 '손빈을 처형하면 믿을 수 있는 인물에게 군권을 맡겨야 할 텐데, 그럼 자신은 공실의 어르신(...)인 공족파의 수장 영건(嬴虔)[17]을 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을 흘렸다. 자신들 중 1명에게 군권을 달라고 할 생각이던 귀족파는 손빈을 몰아내봐야 공족파 좋은 일이 될 거란 말에 크게 당황했다.

여기에 쐐기를 박은 것은 이어지는 영사의 말이었다.
그런데 말이지, 생각해 보면 상군(商君, 손빈을 가리킴)은 이미 영지에 자기 세력을 가지고 있네.
그럼 상군을 죽일 거라는 소문이 퍼지는 날에는 (영지인) 상(商)에서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겠네...

이 말을 듣고난 뒤 귀족파의 뇌내 시뮬레이션:
1) 상군(商君) 손빈의 반란 진압에 실패한다 -> 나라 전체가 뒤집어지고 손빈 처형을 주장했던 자신들은 당연히 모가지.
2) 상군(商君) 손빈의 반란 진압에 성공한다 -> 반란 진압에 성공한 영건과 공족파의 독주체제, 자신들은 개밥의 도토리 신세.

어느 쪽으로 일이 진행되어도 자신들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귀족파는, '공신을 역적으로 만드는 건 이후 인재 기용에 좋은 본보기가 되지 않는다. 손빈을 그냥 징계 처분만 하는 게 어떻겠냐'는 영사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이렇게 가장 다루기 어려운 귀족파 제압에 성공한 영사는 손빈에게 '속전과 작위 일계급 강등[18]'이란 비교적 가벼운 처분을 내린 대신, 손빈이 사비로 서하군 복구를 지원하게 하고, 처형당한 서하태수 천연의 빈 자리에 영사 본인의 사람을 박아넣는데 아무런 뒷말도 나오지 못하게 했다. 서하태수 천연은 어찌되냐는 손빈의 물음에 대한 영사의 경고를 겸한 흑막력 넘치는 답변은 일품.
『그런 사람이 있었던가?』
『그런 사람은 없어.』
『사람이란 건 숨쉬면서 살아 움직여야 하니까.』
『만약 사람이 아닌 게 숨쉬면서 걸어다니면 확실히 보내줘야겠지.』
『목을 자르건, 허리를 자르건, 조각을 내건.』
『그리고 말이야, 만약 그런 사람 아닌 것들과 여러 번 어울리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 역시 사람이라 보기 어려우니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렇지 않아?』[19]

5.4. 조선의 대응

승리한 조선은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협공을 주도한 게 조선이 아닌 진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동월지는 이를 믿었지만, 문제는 흉노의 경우 정보 차단에 들어가면서 돌아가는 사정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단 동월지에까지 크게 한 방 먹인 만큼 당분간은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 진북장군 조옹과 정서장군 곽구(郭救)[20]를 각기 대사마대장군[21]과 전장군[22]으로 승진시켜 중앙으로 불러들이고 진북장군부와 정서장군부를 폐쇄했다. 여기에 조옹의 경우 이 전투로 세운 전공까지 감안, 조선후 기토는 군호를 그냥 영지인 대(代)의 이름으로 불리던 조옹에게 무령(武寧)이란 군호를 새로 하사했다. 공이 크다는 건 인정하지만, 20대 나이에 대사마대장군이 된 것만도 급속승진인데 봉토를 추가하는 등의 상을 더하는 것은 반대라는 대소신료들의 의견을 고려해 대신 명예를 더해주기로 한 결정이었다.

이는 조옹과 곽구 개인들에게는 잘 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둘이 중앙으로 떠나고 진북장군부와 정서장군부가 모두 폐쇄되면서 조선의 북변, 특히 구원-운중의 기미부주가 적의 공격에 즉각 대응할 전력이 급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약탈을 통한 견제를 노리던 흉노에게 절호의 기회였고, 결국 2년 뒤인 기원전 333년 운중군 방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1] 삼국지 한중 지역 [2] 1년 전인 기원전 336년 발생 [3] 가상인물 [4] 기원전 333년 운중군 방어전(흉노 vs 조선), 기원전 331년 석문산 전투(흉노 vs 진)에 직접적 영향 [5] 의거의 경우 흉노가 동월지를 방조한 측면도 있었다. 동월지가 세력이 더 강하고 같이 싸워본 경험도 있는 점, 의거가 팽창해서 진 서부를 약탈할 경우 서역(페르시아 쪽)과 진 서부 사이에서 중개무역으로 이득을 취하던 흉노의 이익을 침해하게 되는 점, 반대로 동월지의 진 동부 약탈은 흉노의 이익과는 무관하다는 점 등이 종합된 결과였다. [6] 원 역사의 진혜문왕이다. [7] 영사가 태자였을 때 영거량이 초나라 여인과 혼인시켰다. 작중에서는 대충 진초관계 강화로 원역사에선 선태후가 되는 미(芈)씨가 후궁 중 4등급에 해당하는 팔자(八子)가 아닌 정부인이 되었다는 정도로 취급. [8] 지켜보던 참치(참가자)들은 모두 뒤집어졌으며, 어장주(진행자)마저 '양을 굽거나 삶는지, 아니면 말리는지만 확인하면 되는데 그게 그리 어렵더냐...'는 반응을 보였다. [9] 어얼둬쓰시 이진훠뤄 기 알탄시러 진 동가거 촌 남서쪽 [10] 흉노 서열 6위, 선우가 중원의 왕, 좌현왕이 태자에 상응하는 점을 고려하면 신하들 중에선 서열 4위. [11] 작중의 메타적 능력치를 기준으로 판단시 [12] 진북장군부 관할, 관할지역인 거용관 수비병력도 일부 차출함 [13] 전후에 이번 전쟁이 진의 제안으로 발발했다는 소문을 퍼뜨려, 동월지의 복수심을 진으로 돌리기 위한 흉계(?)를 성공시키기 위해서였다. [14] 메타적으로 작중 첫번째 조선 국군 [15] 이러한 성공에는 다음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 1)초원의 대세력들조차 느슨한 부족연합 수준이으로 체계적 마종관리는 언감생심이었던 반면, 조선은 마종개량을 국책사업으로 추진했다. 2)조선후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라는 이유로 동호의 목동 출신을 책임자로 발탁하고, 귀족들의 반발은 다른 공족들까지 동원해 진압하는 등 강력한 의지를 꾸준히 관철했다. 3)계속 어깃장을 놓던 귀족들은 비슷한 시기 변법이 진행되면서 철저하게 도태되었다. 4)요동, 남만주 일대를 초기 세력권으로 영유했기 때문에 개량된 마종을 충분한 초지에서 육성할 수 있었다. 5)일부 돌연변이도 마종개량에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16] 손자병법에서 이야기하는 간자(간첩)의 형태 중 하나. 죽음을 각오하고 적 세력 내에 잠입해 활동하는 첩자를 가리킨다. [17] 원 역사에서는 영사의 태자 시절 스승이었지만 영사가 상앙(商鞅)의 변법을 어기자 코를 잘리고 은거하게 된다. 국군 자리를 물려받을 태자를 처벌할 수는 없으니 그 스승에게 '태자를 잘못 가르친 죄'를 물었던 것.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상앙이 진이 아닌 조선에 임관해 공손앙(公孫鞅)으로 남고, 상 땅은 제가 아닌 진에 임관한 손빈이 봉지로 받아가면서 영건 역시 코가 잘리는 일을 피하고 이런저런 경력(...)을 계속 쌓을 수 있었다. [18] 군부 수장 자리와 동부군의 군권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19] 대사 앞뒤로 『』가 들어가는 것은 작중 영사의 AA가 쿠마가와 미소기인 점을 반영, 해당 캐릭터의 대화방식을 가져온 부분이다. 본심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고 꾸며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20] 가상인물 [21] 군부의 수장 [22] 전후좌우 사방장군의 일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