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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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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임체는 문루 및 성곽이 대부분이 소실되어 터만 남은 읍성, 볼드체는 대부분이 보존, 복원된 읍성
행정구역은 현재 대한민국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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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colbgcolor=#c00d45> 동래읍성
東萊邑城 | Dongnae City Wall[1]
파일:search.pstatic1324.jpg
문화유산
명칭
동래읍성지(東萊邑城址)
정식 명칭 동래도호부성(東萊都護府城)
입지 평산성
기능 읍성
건설 1387년 (우왕 13년)[초축]
1446년 (세종 28년)[개축]
1731년 (영조 7년)[증축]
폐성 1895년 (고종 32년)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면적 103,647㎡
지정연도 1972년 6월 26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링크 공식 홈페이지
소재지 부산광역시 동래구
1. 개요2. 역사3. 구조
3.1. 성문
3.1.1. 주조문 ・ 무우루3.1.2. 지희루3.1.3. 심성루3.1.4. 인생문3.1.5. 은일루3.1.6. 북문
3.2. 장대
3.2.1. 서장대3.2.2. 동장대3.2.3. 북장대
3.3. 해자3.4. 동래왜성
4. 여담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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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임진왜란 부산 최대의 격전지 동래읍성
조선시대에 현재의 부산광역시 동래구 복산동과 수안동 일대에 존재했던 동래도호부(東萊都護府)의 읍성.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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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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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동래부순절도.jpg
『해동제국기』「동래부산포지도」 『동래부순절도』, 변박, 1760
[ 신증동국여지승람 보기 · 닫기 ]
>읍성(邑城)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3천 90자, 높이는 13자이고, 안에 6개의 우물이 있다.

○ 이첨(李詹)의 기문에,
"본조에 있어서 성을 언급할 때면 본래 성을 잘 수비했다 일컫는다. 삼국 시대에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이 평양(平壤)의 새로운 성을 가지고 중국의 군사를 막아냈으니, 아마도 당시에 필연 수비하는 법술을 체득하여 적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이리라. 삼국 통일 후에 이르러서는, 천하가 태평하여, 성을 헐어서 밭을 만들고 우물을 메워 집을 지었으며, 전쟁에 사용하는 기구를 거둬 땔나무로 했다. 한가하고 편한 것이 오래되니, 수비의 법술을 알던 사람들이 늙어 죽기에 이르자, 그 전통은 끊어지고 전수되지 않았다. 중엽에 이르러서는 국운이 비색하여 거란의 군사가 기회를 타고 돌입하였으니, 급박하게 변란에 대응할 길이 없게 되자, 성을 옛 형태대로 완전히 보수는 하였다지만, 역시 수비에 있어서 그 법술을 얻지는 못하였다. 원충갑(元沖甲)이 비록 치악산(雉岳山)에 자리잡고 거란병을 쳐서 패주시켰지만, 한 몸의 충의와 용맹이 대중을 격동시켰던 것이요. 진실로 지난날의 수비하던 법술을 다 터득하여 알았던 것은 아니다.

경인년 이래로 왜구들이 변방에서 시끄럽게 굴어 걱정이 날로 심하게 되자, 주상께서 염려하시고 재상들도 계책을 올리곤 하였지만, 그 책략이란 성벽의 견실을 힘쓰는 것이 아니요, 특히 들의 작물이나 가옥을 깨끗이 없애서 대처하고 해변을 따라서 지키게 하였으니, 그 꾀한 바가 도적을 깊숙히 끌어 들이기에 알맞은 것이요, 우리 군사들로 하여금 도리어 의거할 곳이 없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원수(元帥) 박(朴)공이 일찍이 김해(金海)에서 부사로 있을 때에 처음으로 망산성(望山城)을 수축하였는데, 그 수비하는 제구와 방법이 이미 완전히 갖추어졌으므로 사졸들이 익히고는 한 번 시험해 보았으면 하던 차에 마침 왜적이 개미떼처럼 몰려 왔는데, 공이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들어가 지키게 하니, 화살이며 돌이 일제히 내리치자 쥐새끼같은 것들이 죽기도 하고 도망치기도 하였으며, 우뚝한 외로운 성엔 전혀 침범할 수가 없었다.

인하여 조정에 왜적의 수급을 바치니, 주상께서 재상한테 이르기를, '성보(城堡)의 설치는, 약한 힘으로 강한 힘을 막을 수도 있고, 적은 수로 많은 수를 대적할 수도 있으며, 편하게 있으면서 힘들이는 자를 막을 수도 있으니, 이번에 이 계책이 실현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조종(祖宗)과 생령의 복인 것이다.' 하고는 여러 도의 바다에 인접한 군과 현에 명을 내려 제각기 성보를 설치하고 수비하여, 적으로 하여금 앞뒤를 생각하여 그 악한 일을 자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야 연변의 경보(警報)가 조금 잠잠해져서 오늘에 이르도록 태평하니, 오직 공의 덕택인 것이다.

공이 동래에서 군사훈련을 할 때, 전야가 황폐하고 인가에선 밥 짓는 연기가 피어 오르지 못함을 보고, 개연히 고을을 일으켜 볼 생각을 지니고 군관(軍官)과 여러 유사에게 말하기를, '동래의 고을은 동남에서 으뜸이다. 바다 자원이 많고, 토산물이 풍부하여 국가의 수요에 기여함이 적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동쪽엔 해운포(海運浦)가 있으니, 옛날에 신선이 놀고 즐기던 곳이며, 북쪽엔 온천이 있으니 역대의 군왕들이 목욕하던 곳이다. 그밖에도 선경(仙境)이라 불리는 곳이 8ㆍ9군 데나 되지만 그곳들이 지금은 매몰되었으니, 장수된 몸으로 그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다. 성보를 쌓아 이 고장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히 모여 살도록 하여 주어 국가의 수요에 이바지하고, 또한 고을의 관가가 예전과 같이 되도록 해보지 않겠는가. 만약에 성만 쌓는다면 김해(金海)와 울산(蔚山) 두 성의 사이에 3각으로 대치하게 하여 나졸로 하여금 성 밑에서 배를 대게 한다면 적을 물리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여럿이 모두 이의가 없자, 공이 이에 통첩을 돌려 장정을 징발하고 계획에 따라 일을 감독하니, 정묘년 8월 19일에 시작하여 달포 걸려 일이 완성됐다. 공이 나를 불러 기문을 쓰라 하니, 내가 말하기를, ‘공이 이룩한 성보의 공은 온 나라가 힘입었으므로 사가(史家)가 《춘추》에서의 형(邢 지명)에 성을 쌓고, 초구(楚丘 지명)에 성을 쌓은 사례에 준하여 이미 특서(特書)하였을 것이어늘, 변변치 않은 글솜씨의 소자(小子)가 감히 덧붙일 말이 있겠는가. 그러나 기문은 또한 감히 사양할 수 없는 일이니, 백성은 성에 보호받고, 성은 덕(德)에 보호받았다. 그러므로 사람을 얻기가 어려운 일이라. 《시경》에, ‘소백(召伯)이 사(謝)에 성을 쌓고, 중산보(仲山甫)는 제(齊)에 성을 쌓았다.’란 말이 있으니 반드시 그 사람을 얻었음을 말한 것이다. 공은 장차 어느 곳에 위치할 것인가."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동래현」 【성곽】조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고려 말인 1387년 8월 19일, 원수 박위(朴葳)가 동래군성(東萊郡城)을 처음 쌓기 시작해 한 달 이상 걸려서 완공했는데 석축으로 둘레가 3,090척, 높이 13척으로 우물이 6개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경상도속찬지리지』에는 1446년 동래현령 김시로가 둘레 3,092척, 높이 15척의 석성을 다시 쌓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것이 조선전기 동래읍성의 원형일 것으로 추정한다.

동래는 일본과의 국경을 이루는 외교 창구였기 때문에, 군에서 현, 도호부로 승격시키면서 관아의 규모가 커지고 격식도 높아졌다.[2] 조선의 북쪽 국경도시가 의주성이었다면, 남쪽 국경도시가 동래성인 셈이었다. 자연스럽게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인들이 자주 출입했고, 삼포(三浦) 중 부산포를 담당하던 부산진성을 감독하는 읍치로서 안보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부산진성과 더불어 가장 먼저 함락당한 읍성이기도 하다. 이것이 1592년 4월 14일 발발한 동래성 전투로,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군민이 죽음을 무릅쓰고 항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래성이 함락당한 후 킷카와 히로이에가 동래읍성 동쪽 망월산에 동래왜성을 쌓으면서 읍성의 성돌을 빼서 쓰는 바람에 성곽이 많이 허물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기장왜성 부산포왜성과 연계되어 조선인 포로와 노예들을 일본으로 압송하는 거점이 되어버렸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보수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가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鄭彦燮)이 동래부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마안산 능선 자락과 망월산 능선 그리고 조선 전기의 동래읍성지 남서 벽을 이어 기존 읍성의 6배에 달하는 규모로 크게 증축했다. 둘레 17,291척, 높이 17척이었는데, 1871년에는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포루를 다수 설치하고 체성을 보수하였다.

일제강점기와 경제개발기를 거치면서 복산동, 수안동, 명륜동 일대는 도심화가 진행되었고 동래읍성의 서남부는 시가지가 들어서면서 완전히 유실되었으며 산등성이를 따라 흔적만 남아 있었는데, 이렇게 방치되어 오던 동래읍성의 흔적들을 1972년 6월 26일 부산광역시에서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기 시작했고 1979년부터 1993년 사이에 여러 차례 복원과 보수를 하여 현재에 이른다. 2005년 5월에 부산 도시철도 4호선 공사를 진행하다가 현 수안역 자리에서 조선전기 동래읍성의 해자 유적이 발굴되었는데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 당시 학살당한 주민들의 유골과 각종 무기류가 출토되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3. 구조

파일:external/pds21.egloos.com/a0105007_4fffa78175d6b.jpg
수안역 임진왜란 전시관에 있는 조선전기 동래읍성 모형
조선전기 동래읍성은 현재의 동래부동헌을 중심으로 해 주위를 원형으로 쌓은 성곽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조선후기 읍성 크기의 17%가 채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으며 성벽에 치(雉)가 아주 조밀하게 돌출되어 있었고 작지만 해자도 둘렀던 것이 확인되었다. 이곳에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고 송상현과 군민들이 장렬히 전사했다. 사진 정면에 성벽 일부가 산자락에 걸친 부분이 보이는데 이 동쪽 체성을 왜군이 뚫고 들어왔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1군에 종군한 요시노 진고자에몬(吉野甚五左衛門)의 비망록에 따르면 " 어제 성보다는 닷 배는 큰 성"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루이스 프로이스의 『일본사』에는 "조선의 모든 성채보다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이는 성채"라는 표현이 있으나 과장된 것으로 본다.

성벽이 대부분 멸실되어 잔존하지 않으나, 성벽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기초 다짐석과 그 상부의 지대석 및 기단석은 양호하게 남아 있어 성곽의 윤곽을 확인할 수 있다. 축조 수법은 먼저 풍화암반토를 ㄴ자로 정지하여 외벽 쪽에서 인두대 크기의 적심석을 5 ~ 6단 정도 축조하고, 그 안쪽으로는 약 70cm 높이까지 돌로 채웠는데 외벽의 적심석 최상단 위에 너비 40cm 내외, 두께 20cm 내외의 판석을 지대석으로 놓고, 두께 35cm 내외의 대형의 판석을 기단석으로 삼았다. 내벽은 외벽으로부터 600cm 안쪽에서 확인되며 3035cm×3540cm 크기의 삼각형 석재를 넣어 3 ~ 4단 정도 쌓았다. 그 바깥쪽으로는 황갈색 마사토와 갈색 점토가 덧대어져 있어 수축 또는 증축한 흔적으로 판단한다.

조선전기 동래읍성 유물로는 성벽석 사이에서 주로 출토된 분청사기 및 백자 조각, 뻘층에서 수습된 백자 및 도기, 기와 조각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분청사기 인화문 대접편에서 경(慶), 고(庫) 등의 명문이 확인된다. 해자에서는 해자 호안 석축, 가교, 말뚝 등의 성곽 시설물과 갑옷, 투구, 창검 등의 도검류, 화살촉, 깍지 등을 발견했다. 이외에 발굴된 인골 중 도검류 등에 훼손된 두개골 등이 확인되어 임진왜란 당시의 참상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어 주는데 현재는 수안역에 이전, 전시되어 있다.
파일:external/ncache.ilbe.com/8c5d3839be2a38b8593712a0fe507d61.jpg
조선후기 동래읍성의 대략적인 구조
파일:KYKH006_0000_0003(2).jpg
『1872년 지방지도』 「동래부지도」에 묘사된 조선후기 동래읍성
조선후기 동래읍성 1731년 정언섭이 증축한 것을 기초로 한다. 5개의 문과 1개의 암문이 있었으며 3개의 장대를 갖추었고, 모든 문에 옹성을 둘렀다. 망월산과 마안산을 읍성 권역으로 편입시켜 평산성의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그 면적은 경상도 일대에서도 손에 꼽는 수준으로 넓었다.

부산광역시 동래구 안락동, 명장동, 명륜동, 복산동 등 광활한 지역에 걸치고 있다. 북쪽과 동쪽은 산지이고 남쪽과 서쪽이 평지에 해당한다. 둘레 17,291척, 여장 1,318타, 높이 17척으로 성내에는 10개 우물과 1개 못이 있고, 수성청을 두었다. 전체 성벽 2.7km 중 남쪽 부분 1.3km는 시가지가 되어 멸실되었으며, 현존 성곽은 석성으로 높이 1.53.0m인데 상부 폭은 2.4m 내외이다. 자연 암반인 기반암층 위에 소할석과 암갈색 사질 점토를 다짐하여 수평을 맞춘 후 수직으로 면석을 축조하였다. 면석에서 성벽 몸체 내벽 쪽으로 약 1m 정도까지 20cm 내외를 할석으로 채웠다. 외벽 바깥쪽은 510cm 정도 두께의 사질층과 사질 점토층을 교차하여 기단석까지 덧대어 성벽 몸체 기단부를 보강했다.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은 3~5단 정도이고 3단까지는 경사에 따라 세워쌓기를 하였으며 그 위로는 눕혀쌓기를 하였다. 성벽 몸체 외벽에서는 축조 구분점이 확인되며 각 구간 간격은 4m 정도이다.

외벽은 경사면을 따라 지대석을 놓고 수평을 맞추어 기단석을 놓은 뒤 그 위로 성돌을 축조하고 있으며 그 사이에는 소할석, 황갈색 사질토와 강회를 발라 마무리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외에도 성벽 몸체 외벽 축조 시 생토층 위에 암갈색 점질토를 정지한 후 바로 대형의 장방형 석재를 기단부로 축조한 경우도 확인되고 있어 구간별로 축조 수법에 일정한 차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성벽 몸체 외벽 기단석에서는 각자(刻字)가 확인되었다. 명문 내용 중, "북소구(北所九) 패장(牌將), 출신(出身) 서후봉(徐後逢), 석수승(石手僧) 00명(明), 00 군경주(軍慶州), 사청도(寺淸道)" 등이 있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서후봉(徐後逢)은 『내주축성비(萊州築城碑)』, 『동래부축성담록(東萊府築城膽錄)』에도 등장한다.

동래구청 신청사 부지에서 확인된 서측 체성 외벽은 2단 정도 잔존해 있고, 벽석 길이는 40150cm, 너비는 40130cm가량인데, 다듬은 장방형의 석재를 가로로 평평하게 쌓고 있다. 성석 사이는 맞물려서 틈새를 없게 하였다. 체성은 기반토가 진흙이어서 연약한 지반을 강화하기 위해 나무 지정을 박고, 흑갈색 진흙로 성토하여 대지를 조성한 후 그 위에 점토와 황갈색 사질토, 할석을 포함한 암갈색 사질토 등을 교대로 성토하여 체성을 쌓았다. 그 후 외벽 성석과 적심석을 채울 공간을 ㄴ자로 절개한 후, 성벽 외벽석과 약 1~1.5m 가량을 할석으로 적심을 채운 뒤쪽에 흑갈색 진흙 점토와 식물 등을 이용한 부엽공법(敷葉工法)으로 메웠다. 해자 호안 석축 내측 벽 및 해자 내외에서 직경 20cm 내외 나무 기둥 구멍과 말뚝, 차수벽으로 추정되는 석렬이 나란히 확인되며 해자를 넘나들 수 있는 나무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후기 동래읍성 유적에서는 다량의 기왓조각이 수습되었다. 이 기와편의 타날 문양은 창해파문이 압도적으로 많이며 선문, 집선문, 복합문, 무문이 일부 확인된다. 명문와는 '기사삼월명(己巳三月名) 칠십명(七十名) 신미오월명(辛未五月名), 0와(瓦)' 글자가 발견되었다. 그 밖에도 백자편 등이 출토되고 있다.

현재 잔존하는 체성은 서북측 마안산 구간과 동남측 망월산 구간인데, 남아있는 기존의 성벽 위로 복원 성벽을 쌓아올려 놓았다. 그런데 그 형태가 심히 이질적이어서, 조화롭지 않다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3.1. 성문

3.1.1. 주조문 ・ 무우루

파일:동래읍성 남문.jpg
19세기 말에 촬영된 동래읍성 남문
파일:동래읍성 세병문.jpg
남문의 옹성문인 세병문의 모습
파일:동래읍성 남문 무우루 현판.jpg
동래읍성 남문 내측
파일:무우루 현판.jpg
동래읍성 남문 현판
파일:세병교.jpg
세병교 전경
파일:동래읍성 남문터.jpg
동래읍성 남문 터 표석
동래읍성의 남문은 6곳의 출입구 중 규모가 가장 컸다. 이층 문루를 올렸으며 외측에는 주조문(朱鳥門)[3], 내측에는 무우루(無憂樓)[4]라는 현판을 달았다. 방형 중앙문식(中央門式)[5] 옹성을 갖추었는데, 옹성에 난 문은 세병문(洗兵門)[6]이라는 이름을 따로 가지고 있었다. 이 앞에 세병교(洗兵橋)[7]가 있어 초량왜관과 부산진성으로 통했다고 한다. 남아있는 사진을 보면 반듯한 방형으로 깎아낸 면석을 정교하게 이를 맞추어 品자 형태로 쌓아올리는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축성법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축조 기법은 한양도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현재까지 사진이 남은 동래읍성의 유일한 구조물이기도 하다.

3.1.2. 지희루

파일:동래읍성 동문터.jpg
동래읍성 동문 터 표석
파일:지희루 현판.jpg
동래읍성 동문 현판
동래읍성의 동문이다. 지희루(志喜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3.1.3. 심성루

파일:동래읍성 서문터.jpg
동래읍성 서문 터 표석
파일:심성루 현판.jpg
동래읍성 서문 현판
동래읍성의 서문이다. 심성루(心成樓)라는 현판을 달았다.

3.1.4. 인생문

파일:동래읍성 인생문.jpg
현대에 개건된 인생문
동래읍성의 소문(小門)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문이라 하여 인생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으나 근거가 없다. 상술했듯 임진왜란 당시 동래읍성은 조선 후기 읍성의 1/6 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며 현재 인생문 고개라 불리는 곳은 성곽이 지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는 도로가 지나가기 때문에 원위치가 아닌 북측으로 약 10m 옮겨 개건(改建)해 놓았다. 현재의 인생문은 원형과는 전혀 관계없는 기념물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2005년 개건할 때 대단히 부실하게 시공한 탓에, 성벽이 아예 붕괴해 버린 전적이 있다. 동래읍성 인생문 성벽 붕괴사고 문서 참조.

3.1.5. 은일루

파일:동래읍성 암문터.jpg
동래읍성 암문 터 표석
파일:은일루 현판.jpg
동래읍성 암문 현판
동래읍성의 암문(暗門)이다. 야문(夜門)이라고도 불리는 이 문은 암문인데도 이례적으로 은일루(隱一樓)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옹성까지 갖추고 있어 일반적인 성문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다.[8] 나머지 다섯 문이 닫힌 밤중에 긴요한 일이 있으면 사용하게 한 문이다.

3.1.6. 북문

파일:동래읍성 북문.jpg
동래읍성 북문 전경
동래읍성의 북문이다. 이름이 따로 없는 이 문은 현판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9] 옹성의 형태가 굉장히 특이한데 보통 180도를 두르는 다른 옹성들에 비해 이곳은 90도 가량밖에 둘러져 있지 않아서, 일반적인 반원형과 구별지어 호형(弧形) 옹성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부터 서장대 부근까지가 동래읍성의 체성이 복원되어 있는 두 구간 중 하나인데, 원형의 성벽을 거의 찾아보기는 힘들고 현대식으로 반듯하게 쌓아올렸다. 동래읍성의 '느낌만' 찾아보는 편이 좋다.

3.2. 장대

3.2.1. 서장대

파일:동래읍성 서장대.jpg
동래읍성 서장대
동래읍성의 서쪽 장대이다. 1734년 동래부사 최명상(崔命相)이 세운 15개 보루 중 하나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기록에는 1870년 동래부사 정현덕(鄭顯德)이 세웠다고 전한다. 1937년 동래읍성과 함께 철거되고 방치되다가 1979년 첫 복원사업 당시 북문, 동장대, 북장대와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개건되었다. 원형에 대한 깊은 고찰 없이 수원 화성의 서장대를 베껴 왔기 때문에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3.2.2. 동장대

파일:동래읍성 동장대.jpg
동래읍성 동장대
동래읍성의 동쪽 장대다. 내부에 망월대(望月臺)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충렬사의 권역 내부에 속하며 군관청(軍官廳)과 더불어 동절기 출입금지 구역이다. 충렬사에서는 화재 및 사고 방지를 위하여 매년 11월 1일부터 5월 31일까지 6개월간 망월산의 입산을 통제[10]하는데 통제구역인 철조망 내부에 동장대가 속한다. 정말 산불 때문이라면 왜 철조망 바로 바깥 등산로는 통제하지 않는지 의문이다.

이곳은 본래 임진왜란 때까지만 해도 동래읍성의 권역이 아니었다. 동래성 전투 이후 이곳에 주둔한 제7군 소속 킷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가 망월산에 동래왜성을 축성한다. 동장대 자리가 왜성의 중심부인 제1곽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동장대 바로 남쪽의 체성이 부자연스럽게 꺾여 있는 것도 왜성을 쌓았던 지형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분석도 나온다.

동장대를 중심으로 동북쪽 절벽에 해자 2곳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이후 이곳은 증산(甑山)[11]이라 불렸다.

3.2.3. 북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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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읍성 북장대
동래읍성의 북쪽 장대다. 마안산(馬鞍山)의 꼭대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래읍성에서 가장 높은 고지를 점하고 있는 장대다. 북문에서부터 인생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통해 오를 수 있다. 새해에는 이곳에서 해맞이 행사를 열기도 한다.

3.3. 해자

KBS 역사추적 9회 –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에 무슨 일이 있었나(2009.1.31.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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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안역 시공 과정에서 발굴된 유물과 인골
2005년 5월 부산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부지에서 동래성 외곽 해자 유적이 대규모로 발굴되었다. 1452년에 설치된 동래성 해자는 기초다짐층, 조선전기층, 조선후기층[12]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 중 임진왜란기에 해당하는 조선전기층에서 폭 30m x 길이 30m 좁은 공간에서 환도, , 찰갑, 투구, , 화살촉 등등 당시 동래성 전투에 사용된 다양한 조선군의 무기들이 임진왜란 당시 무기사를 새로 써야할 만큼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참고게시물: 400여 년 전 부산의 비극

한편 이 유적에서는 약 80여 구의 유골이 함께 발견되어 당시의 참상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남성은 물론 저항할 수 없는 여자와 아이의 유골에서도 활과 조총, 철퇴에 맞거나 창검으로 찔리고 베인 자국이 발견되었으며 화살 또는 총알이 뚫고 나간 어린아이의 두개골도 발굴되었다. 한 여성 유골은 일본도로 추정되는 칼로 몇 차례나 목을 베인 흔적이 있었으며 몇몇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두개골은 턱뼈가 깔끔하게 잘려나간 것도 있었다. 따라서 이 유적은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이 자신들이 학살한 시신과 쓸모없게 된 조선군 무기들을 해자에 함께 던져 넣고 메워버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발굴에 참여했던 정의도 당시 경남문화재연구원 학예실장은 고고학자라면 누구나 꿈꾸는 이만한 유적을 발굴하고도 "기쁘기는커녕 오히려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본격적인 발굴에 앞서 위령제부터 지냈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 참상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유골들을 통해서 당시 조선인들의 평균 체격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었는데 동래읍성 유적지에서 발굴된 유골들은 모두 조선인의 것으로 밝혀졌으며 이 유골들을 측정한 결과 당시 동래성 주민들 중 남자들의 평균 신장은 163.6cm 정도로 밝혀졌다.[13] 동래성 주민 중 여자들의 평균 신장은 153.4cm로 밝혀졌다. 에도 막부 시절에 일본인 남성들 평균 신장이 155.1~156.5cm였다고 하고 여성들 평균 신장은 143~144.7cm였다고 하니 조선인 남성은 일본인 남성보다 7~8cm 정도 더 컸고 조선인 여성도 일본인 여성보다 9~10cm 정도 더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영양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치아를 확인할 수 있는 두개골과 하악골 32개체 가운데 법랑질 형성부전증(Enamel hypoplasia)이 26개체에서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영양실조에 의해 나타나는 선이라고 한다. #참고기사

출토된 환도들의 길이가 주로 55cm 전후, 혹은 65cm 전후의 칼날 길이를 가지고 있는 등 규격이 동일하지 않아 1452년 문종 때의 규격을 그대로 유지되지 않음을 실증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여기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들과 인골들은 위의 참고게시물 링크와 이 참고기사에서 더 볼 수 있으며 수안역 내부의 동래읍성임진왜란역사관에서는 실물을 볼 수 있으니 인근을 지나게 된다면 들러 보도록 하자.

3.4. 동래왜성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동래왜성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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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여담

동래구 소재 초등학교에서 현장체험학습을 오기도 한다.[14]

조선시대에도 성을 증축 및 보수를 하다가 유골이 발굴되어 위령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5. 관련 문서



[1] 부산광역시에서는 공식적으로 Dongnaeeupseong이라는 비직관적인 표기를 쓰고 있다. [2] 시기별로 다르지만 주로 조선 통신사 에도( 도쿄)까지 산 넘고 물 건너서 간 경우가 많았지만 일본 측의 사자는 임란 이후 사신의 통행로가 침략로로 사용될까 염려하여 조선측에서 동래읍성까지만 입국시켰다. [3] 주조는 주작(朱雀)을 뜻한다. 주작이 남쪽을 관장하는 신수임을 생각하면 말 그대로 남문이라는 뜻이다. [4] 근심이 없을 것을 기원하는 뜻. 동래부가 일본과 접경하는 남쪽 최전방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이름이다. 현재 무우루를 비롯한 성문의 현판들은 모두 동래부 동헌에 옮겨져 전시되고 있다. [5] 수원 화성의 팔달문이 중앙문식이다. 익성(翼城)이라는 표현을 써 편문형(片門形) 옹성과 구별짓기도 한다. [6] 만하세병(挽河洗兵)이라는 구절에서 따 온 이름으로, 직역하면 은하수를 당겨 피로 얼룩진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전쟁보다는 평화를 누리자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7] 본래 나무로 만든 목교(木橋)였으나 일제강점기에 돌다리로 바꾸었다고 한다. [8] 이는 본디 암문으로 설계되었으나 후대에 문루가 세워지고 일반적인 성문 역할을 하게 된 수원 화성 남암문과 유사한 부분이다. [9] 그래서 개건할 때 그냥 '북문'이라고 적은 현판을 걸었는데, 원래는 현판을 아예 걸지 않은 무편액 성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0] 우천 시에도 출입금지된다. 사실 이 규정 때문에 1년에 군관청과 동장대를 볼 수 있는 날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 [11] 왜성이 있었던 곳의 지명에는 떡시루 증(甑)이 들어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일본식 성의 모습이 마치 켜켜이 쌓여 있는 떡시루와 같은 것에서 유래한다. [12]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간 쌓여 조성된 부분이므로 전쟁과 관련없는 백자나 옹기 파편, 기와 파편,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13] 유럽의 당시 남유럽인들 평균 신장과 비슷한 수치다. 지금도 한국인과 남유럽인의 평균 신장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한국인: 173~4cm, 남유럽인: 175~176cm.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당시 조선인 남성의 평균 신장을 163.4cm라고 적었는데 이로 볼 때 조선인 남성들은 300년 동안 계속해서 163~164cm 정도의 평균 신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4] 물론 자연체험이라서 재미없어하는 학생이 과반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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