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동골라의 교회 유적
1. 현대 도시
아랍어 دنقلا영어 Dongola
수단 공화국 북수단 주의 주도. 인구는 대략 10만으로, 시가지는 나일 강 서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나일 강 중류에서 아스완 댐 남쪽으로 약 500여 km 가량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없는데, 동골라에 비로소 동골라 앗 살림 대교가 놓여있다. 지명의 유래는 중세 누비아인들이 건설한 마쿠리아 왕국의 수도 동골라로, 현대 도시에서는 남쪽으로 80여 km 떨어져 있는 나일 강 동안의 언덕에 위치한다. 옛 동골라는 현대 동골라보다 다른 도시 앗 다바하에서 더 가깝기 때문에 구분하여 서술한다.
동골라 지역은 1820년 메흐메트 알리의 원정 후 이집트에 편입되었고, 1899년에는 이곳에서 마흐디 반군을 격파한 영국군이 기지를 설치하였다. 당시 전쟁을 기념하기 위해 영국의 브리스톨, 런던 등지에는 동골라 로가 있고, 미국 일리노이에도 1850년대에 세워진 동명의 도시가 있다. 또한 1885년 하르툼에서 포위된 찰스 고든 경을 구하기 위해 파견된 나일 원정대의 지휘관 월셀리 경이 아스완 ~ 앗 다바하의 600km 를 가장 빨리 주파하는 부대에게 상금을 걸었던 것에서 유래된 동골라 경주가 1886년부터 영국의 민속놀이..?로 정착하였다.
2. 중세 도시 유적
동골라 유적 배치도
아랍어 دنقلا العجوز
영어 Old Dongola
4세기 ~ 14세기까지 누비아의 기독교 왕국인 마쿠리아의 수도였던 천년고도. 누비아어로 돈쿨은 붉은 벽돌을 뜻하는데, 옛 동골라의 많은 건물들이 그를 재료로 지어졌기 때문이다. 642년과 652년 이집트에 기반한 아랍-이슬람 군대가 침공했지만 두 차례 모두 격퇴하였다. 후자의 경우 도시가 포위되고 대성당이 파괴되었지만 결국은 승리하였다. 초기 이슬람 정복 사상 매우 드문 연패로, 이후 이슬람 제국과 평화 협정인 바크트를 체결하여 대상 무역으로 호혜적인 관계를 이어나갔다. 7세기 말엽에는 유명한 화강암 성당이 지어졌고, 9-11세기의 평화와 함께 도시는 크게 번영하였다. 당시 마쿠리아 왕국은 룩소르까지 확장하였고, 동골라에는 비잔틴 양식의 대관식 궁전이 건설되었다.
마쿠리아는 1173년 아이유브 왕조에게 북부의 주요 도시 카스르 이브림을 상실하고 베두인들의 습격과 가뭄에 노출되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맘루크 왕조 들어 술탄 바이바르스는 1265년 동골라 부근까지 침공하였다. 이에 마쿠리아 국왕 다비드가 1272년 이집트의 홍해 연안 항구인 아이다브, 1275년 아스완을 공격해 파괴하였다. 1276년 반격에 나선 바이바르스는 다비드의 사촌 마쉬쿠다와 함께 남하, 세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한 동골라를 약탈하였다. 그후 마쿠리아는 맘루크 조의 속국이 되었고, 동골라에는 맘루크 군이 주군하였다. 비록 몇년 후 샤마문이 봉기하여 맘루크 군을 축출하고 독립을 회복하였으나, 1312년 맘루크 군이 재차 남하해 이번에는 마쿠리아의 무슬림 왕족을 옹립하였다. (사이프 앗 딘 압둘라 바르샴부)
즉위 궁전. 모스크로 전환된 후 18세기 현지 셰이크 사티 하미드 사와르가 보수하여 현재에 이른다.
그는 1317년 즉위 궁을 모스크로 전환하였고, 이에 귀족들이 반발하며 내전으로 이어졌다. 한편 그무렵 동골라에는 제노바 상인 공동체가 있었다. 1365년 내전 끝에 마쿠리아 조정은 쇠락한 동골라 대신 북쪽의 아도로 천도하였다. 동골라는 푼즈 부족인 바누 자드에게 남겨졌고,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채로 폐허로 변해갔다. 1699년 푼즈 술탄국 하의 도시를 방문한 프랑스인 여행가는 시가지가 모래로 덮여 있다고 기록하였다. 19세기 후반 동골라는 북쪽에 새로 지어진 동명의 도시와 남쪽의 앗 다바흐에게 완전히 대체되었고 유적이 되었다. 1964년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 일대를 발굴,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발굴은 현재 진행 중이며, 2021년 5월에도 새로운 교회 유구를 발견했다고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