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8-11 21:30:27

도말용

<colbgcolor=#0047a0> 출생 1899년 11월 5일
경상북도 고령군 하미면 대곡동
(현 경상북도 고령군 우곡면 대곡리)
사망 1988년 11월 10일
인천광역시
산남(山南)
이명 도성오(都聖五), 도섭(都燮)
영문식 이름 Thomas Doh
본관 성주 도씨
직업 독립운동가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clearfix]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9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도말용은 1899년 11월 5일 경상북도 고령군 하미면 대곡동(현 고령군 우곡면 대곡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4월 8일 작은 외할아버지 박기로가 만세시위를 결행하기로 결의하고 도말용 등 청년들을 포섭했다. 도말용은 외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마을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4월 8일 밤 11시경 나팔을 불어 주민 50명을 집결시킨 뒤 거리를 행진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경찰이 투입되어 주도자들을 체포했고, 그 과정에서 도말용 역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5월 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도말용은 출소 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소속된 한국독립당에 입당하여 초급행정위원을 지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운영난을 겪자, 그는 1926년 초급행정위원을 사퇴하고 한국독립당을 탈당한 뒤 상하이를 떠나 대만으로 건너가 타이베이 소재 농장에서 소작농을 지냈다. 이후 1929년 귀국하여 안동군, 성주군 등지에서 소작농으로 일하는 한편 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1931년 만주로 건너가 재만 한국독립당에 입당해 군사첩보행정위원을 지냈지만 1년만에 사퇴 및 탈당했고, 다시 대만으로 건너가 와이셔츠 공장에서 일했다.

8.15 광복 후 서울로 돌아왔고, 1947년 5월 한국독립당에 복당하여 대표행정자치위원을 지냈으며, 1948년 6월 직위를 퇴임한 뒤 다시 탈당하고 1956년 1월 30일부터 1959년 1월 23일까지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보훈행정특보위원을 역임했다. 1959년 11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로 건너가서 21년간 그곳에서 거주하면서 미국에 사는 한인 교포들을 상대로 민족의식을 고취시시키기 위한 사회운동에 종사했다. 1980년 12월에 한국에 돌아와 인천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88년 11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도말용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