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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스털링

<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데이비드 스털링
David Stirling
DSO, OBE
파일:The_Special_Air_Service_(sas)_in_North_Africa_during_the_Second_World_War_E21340.jpg
본명 아치볼드 데이비드 스털링 경
Sir Archibald David Stirling
출생 1915년 11월 15일
영국 스코틀랜드 퍼스셔 레크로프트 브리지오브앨런[1] 케어하우스
사망 1990년 11월 4일 (향년 74세)
잉글랜드 런던 웨스트민스터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98cm[2]
가족 이름 (관계)
학력 앰플포스 칼리지 (졸업)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제적)[3]
종교 종교
직업 군인, 산악인
소속 영국 육군
계급 중령[4]
1. 개요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생애3. 제2차 세계 대전과 SAS 설립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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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영국 육군 장교, 산악인, 유명한 영국 육군 특수부대 SAS 창설의 주역.

2.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의 생애

스털링은 1915년 스털링 가문의 영지인 스코틀랜드 퍼스셔 지역에 위치한 가문의 종택, 케어하우스에서 영국 육군 준장 아치볼드 스털링과 로밧의 13대 남작인 사이먼 프레이저[5]의 딸 마가렛 프레이저 사이에서 태어났다.[6] 그리고 스털링의 조카인 15대 로밧 남작[7]의 이름 역시 시몬 프레이저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윌리엄 스털링 맥스웰 경[8]으로 준남작이었다. 이후 그는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영국의 명문 사립 앰플포스 칼리지를[9] 졸업하고,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예술가의 길을 걷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다녀오기도 했다. 1937년 7월 24일 학군사관(OTC) 장교로 영국 육군 Scots Guards 연대 소위로 임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직전에는 에베레스트 산을 등반하는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3. 제2차 세계 대전과 SAS 설립

1940년 6월에 그는 당시 영국 육군에 새로 창설된 코만도 부대 중 하나인 제8 코만도 부대(부대장, 로버트 레이콕 중령)에 지원했다. 그의 부대는 1941.1.31일 중동지역 전력 증강을 위해 제7, 8, 11코만도로 구성된 Force Z를 구성하여 중동지역에 파병되었다. 1941.3.7일 Force Z는 부대장 레이콕 중령의 이름을 따 Lay Force로 부대 이름을 변경했다. 스털링이 속한 8코만도는 Lay Force B대대로 크레타 섬 전투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교전 끝에 병력의 75%를 잃고, 이후 이어진 몇 차례의 전투에서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심대한 피해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4개 대대로 구성된 Lay Force는 거의 와해되기에 이르른다.

당시 Lay Force에는 사병 출신 장교인 로저 코트니 육군 대위가 소형 보트를 이용해 후방에 침투하여 소규모 기습공격을 하는 부대인 보트 특전분대( SBS)를 이끌고 있었다. 1940년 스털링과 같은 육군 제8코만도에 지원한 로저 코트니는 1940.10월 코만도 훈련소에서 SBS 부대를 구상하여 대위로 특진까지 했었다.

스털링은 기계화된 현대의 무자비한 전쟁에 자신의 부대가 와해될 지경에 이르자 크게 낙심하여 낙하산을 이용해 후방에 침투하여 소규모 기습공격을 하는 부대를 새로이 구상하여 로저 코트니처럼 사령부를 직접 찾아가[10]장군들에게 자신의 구상을 드라마틱하게 밝힌다.

당시는 와해 직전의 Lay Force 예하 4개 코만도 대대 잔존 병력과 신편 51코만도를 중동코만도로 재편 중이었는데, 스털링의 제안으로 중동코만도 1, 2소대는 공수특전단(SAS) L파견대라는 위장 명칭을 사용했다.(SAS라는 이름은 영국 본토에 있던 제11SAS 대대에서[11] 따온 것이다.) 중동코만도 3소대는 8코만도 잔존병력, 4,5소대는 51코만도 잔존병력, 6소대는 로저 코트니 대위의 SBS로 구성되었다.

1941.11.16일 실시된 스털링의 SAS 부대는 독일 공군 비행장에 대한 첫 번째 낙하산 기습침투를 실시했지만 중간 집결지에 공수낙하한 62명의 대원 중 40명이 강풍에 날아가 행방불명이 되거나 낙하산 착지 불량으로 부상을 당해 공격목표인 독일군 비행장에는 가지도 못하고 작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작전에 실패한 SAS를 구조하러 온 부대는 영국 제8군의 장거리 차량화 정찰부대인 장거리 사막단(Long Range Desert Group, LRDG)이었는데, 스털링은 이들을 보고 낙하산 기습침투 보다는 자동차를 이용해 후방에 침투하여 소규모 기습공격을 하는 부대를 다시 구상하게 된다.

LRDG의 전문가들이 SAS를 목표지점까지 안내해 주면 SAS가 적을 기습공격하고 LRDG가 SAS를 다시 부대까지 오는 길을 안내해 주면 된다는 것이다. 1942.6월 마침내 SAS의 첫 자동차 기습작전이 시작되었다. 3개 비행장을 기습공격한 SAS는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LRDG의 안내를 받으며 무사히 기지로 돌아왔다.

SAS 작전 중 최고의 성공을 거둔 작전은 1942.7.26일 실시된 시디 하니시(Sidi Haneish) 비행장 기습작전으로 SAS는 이날 폭격기와 수송기 37대를 파괴했다. 이후 SAS는 차량을 이용한 히트 앤드 런 작전으로 1943.1월 스털링이 독일군에 포로로 잡히기 전까지 250여대의 추축군 항공기를 파괴했다.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7년 예비군으로 편입된 스털링은 명예 중령으로 진급했다. 이 중령 계급은 1965년 예비군에서 퇴역할 때까지 유지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군축으로 남아도는 영국제 무기와 제대 군인들을 그들을 필요로 하는 해외로 보내주는 민간군사기업 Watchguard International과 KAS International을 설립, 1972년까지 이들 회사를 경영했다.

1960년대부터는 도박에 빠져 막대한 도박빚을 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금액으로 하루에 15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1억1천만원)를 잃기도 했다.

스털링은 1970년대 중반 영국의 정치상황에 불안감을 느끼고 귀족 모임을 중심으로 Great Britain 75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노동당 정부가 붕괴하면 이들이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계획이었다.

1970년 중후반 영국에 노동운동이 활발해지자 스털링은 정부 고위관료와 귀족, 기업인으로 구성된 비밀 사조직을 만들어 노동조합 와해활동을 시작했다.

1975년에는 막대한 도박빚으로 1,845만평(6,100 ha)에 달하는 스털링 집안의 영지와 역사적 문화유적인 스털링 집안의 거대한 저택을 아랍에미리트의 한 사업가에게 200만 파운드(당시 환율로 23억원)의 헐값에 팔아 버렸다.

1990년 11월 4일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5. 여담



[1] Bridge of Allan [2] Rogue Warriors. New York: Crown Publishing Group. pp. 48–49, 143–146, 149–154, 출처 [3] "Thrown out of Cambridge University after his first year." 출처 [4] Lieutenant Colonel [5] Simon Fraser, 13th Lord Lovat and 2nd Baron Lovat. 스코틀랜드에서는 Lord가 남작에 해당하고 Baron은 한 단계 낮은 영주를 의미한다. 한편 2nd Baron은 스코틀랜드가 아닌 연합왕국의 남작 작위다. 즉 2중 남작 [6] 스털링은 영국 스털링 지역(약 42 km2)을 다스리는 영주 집안의 자손이다. [7] 이 사람도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는데 코만도 부대 여단장까지 올라갔다. [8] Sir William Stirling-Maxwell, 9th Baronet [9] 이튼 칼리지처럼 귀족들만 다니는 명문 사립학교로 미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인사이더가 선정한 ‘입학이 어려운’ 영국 사립학교 전국 6위를 기록했다. 2016년 기준 연간 학비만 4,700만원 정도 된다. 입학을 위해서는 학비보다는 출신성분을 거르기 위한 다양한 사람들의 추천서와 인터뷰, 높은 성적과 학업성취도, 학업계획서 등을 제출해야 하는 진입장벽을 넘어야 한다. [10] 이 때 그냥 찾아간 게 아니라 경비원을 따돌려 아군 사령부에 침투를 하는 패기를 보였다 [11] 1940년 제2코만도 부대가 낙하산 부대로 개편되면서 부대 명칭이 제11SAS대대로 개칭되었고, 1941년에 다시 제1낙하산 대대로 개칭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