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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6 03:28:00

데이비드 베컴/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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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데이비드 베컴 국가대표 경력을 작성한 문서

2. 데뷔

1996년 9월 1일, 몰도바와의 프랑스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글렌 호들 감독에 의해 잉글랜드 대표팀에 첫 선발되어 A매치에 데뷔했다. 이후 꾸준하게 대표팀에 선발되어 기회를 받은 베컴은 잉글랜드 선수 중 유일하게 유럽 예선 전 경기에 출전하며 팀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했다.

3.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들어가면서 생애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되었다. 그런데 잉글랜드 감독 글렌 호들이 대회 시작 전 방송 인터뷰에서 베컴이 대회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대놓고 저격한 것을 시작으로 까판을 펼쳐주고 삐걱댔으며, 호들이 조별리그 1차전 튀니지전과 2차전 루마니아전에서 베컴을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시키는 만행까지 저지른다. 그러나 베컴은 루마니아전에서 골에 관여하는 등 실력으로 본인을 증명했고, 콜롬비아와의 조별리그 3차전에서는 선발로 출전해 환상적인 프리킥골을 기록하며 잉글랜드의 2-0 승리와 16강 진출을 이끌었다.

그러나...

16강 아르헨티나전에서 그는 디에고 시메오네의 계속된 거친 플레이와 도발에 넘어가 주심이 바로 보는 앞에서 시메오네의 다리를 걸고 퇴장을 당하는 대형 사고를 쳐버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아르헨티나와 2대 2로 대등하게 맞섰음에도 불구하고 팀 사기 저하로 인해 승부차기에서 탈락했으며, 베컴의 실수가 없었으면 승부차기까지 갈 일 없이 연장전 안으로 경기를 마칠 수 있다는 여론이 드셌기에 모든 어그로가 베컴에게 쏠려버렸다. 얼마나 오죽했으면 그 당시 영국 신문 헤드라인이 10명의 용감한 사자와 한 명의 멍청이.

여기에 글렌 호들 감독이 결정적으로 아르헨티나전 패배 직후 인터뷰에서도 베컴의 퇴장이 큰 타격을 줬다는 말을 하여[1] 베컴은 이후 몇 년간 잉글랜드 국민들로부터 상상하기도 힘든 수위의 공격과 비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호들은 월드컵 마무리 기자회견에서 뒤늦게 베컴을 희생양으로 삼지 말아달라는 인터뷰를 했으나 이미 때는 너무 늦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인해 본인의 커리어 역사상 최악의 흑역사를 맞게된 베컴은 곧 이에 자극을 받아 이를 악물었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 대표팀 모두를 대표하는 선수로 자리잡기 위해 분투했다. 그 결과 이후 UEFA 유로 2000을 끝으로 주장인 앨런 시어러가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자 베컴이 차기 주장으로 선정되면서 잉글랜드를 이끌어가게 되었다.

4.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4.1. 예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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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침내 올드 트래포드에서 본인의 흑역사를 완전히 씻는데 성공한다. 당시 잉글랜드는 2002 한일 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독일을 원정에서 5대 1로 털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 흔들리는 모습을 많이 보였고, 심지어는 마지막 경기인 2001년 10월 그리스전마저 1대 2로 뒤지고 있었다. 만일 이대로 패배하면 독일에게 본선 직행권을 넘겨줄 위기였으나[2], 베컴이 경기 종료 직전 동점 프리킥골을 성공시키면서 순식간에 판세는 뒤바뀌었다. 이 극적인 골로 잉글랜드를 본선에 합류시키고[3] 본인은 두 팔을 들고 감격에 찬 세리머니를 보였다. 그야말로 잉글랜드를 넘어선 월드 스타로서의 명성을 얻어내는 순간이었다.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는 2002 한일 월드컵을 두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데포르티보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뛰다가 알도 두스체르의 태클로 중족골 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어 정작 월드컵 본선 엔트리에서 제외될 위기에 놓이게 된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절박했던 베컴은 산소 캡슐까지 동원하는 등 초인적인 노력 끝에 간신히 회복하여 본선 무대를 밟을 수 있었다.

4.2. 본선

결국 본선 첫 경기 스웨덴전에서 코너킥으로 선제골을 어시스트했고,[4] 2번째 경기인 아르헨티나전에서는 명배우가 얻어낸 결승골이 되는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승리로 이끌어 4년 전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 냈다. 이 때 반칙을 범해 페널티킥을 허용한 아르헨티나 수비수가 후에 토트넘 홋스퍼 FC의 감독이 되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였다.[5] 물론 잉글랜드는 지역예선에서 독일을 대파하던 포스는 어디로 가고 정작 본선에서는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로도 조별리그에서 이긴 경기라고는 논란의 PK골로 아르헨티나를 겨우 이긴 것 하나에 불과했으며, 당연히 이길 줄 알았던 나이지리아와도 0대 0 무승부를 하며 나이지리아의 유일한 승점을 챙겨주는 등 체면을 구겼다. 조별리그에서 꼴랑 두 골만을 넣었기에 토너먼트에서 가망이 없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잉글랜드 팀은 16강 상대인 덴마크를 전반 초반부터 밀어붙인다. 그리고 베컴은 선제골의 빌미가 되는 골키퍼의 실책을 유도하는 등 활약했고 헤스키의 추가골까지 어시스트 하며 팀이 일찌감치 승기를 잡게 해준다. 결국 전반전에 터진 세 골을 잘 지켜내며 8강에 진출했고, 8강 상대는 브라질이었다. 역대급 빅매치에서, 잉글랜드는 오언의 선제골에도 불구하고 1대 2로 역전패했다. 그러나 베컴은 이 경기에서도 공격의 선봉에 서며 마지막까지 분투했다.

5. UEFA 유로 2004

UEFA 유로 2004에서도 베컴은 팀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디펜딩 챔피언인 프랑스와의 조별리그 1차전에서는 프리킥 세트피스 찬스에서 프랭크 램파드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해 앞서가는 중에 페널티 킥을 얻어냈지만 실축했고, 추가 시간에 벌어진 지네딘 지단의 3분 매직으로 1대 2로 역전패했다. 첫 경기부터 지단과 비교당하는 등 다소 심적인 고생을 했지만, 다행스럽게 다음 경기에서 팀이 스위스를 3대 0으로, 크로아티아를 4대 2로 각각 크게 잡아낸 덕분에 조 2위로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그리고 8강 포르투갈전에서는 역시나 연장 후반에 한 골을 주고받는 등 접전 끝에 2대 2를 만들고, 승부차기에 다다랐지만 첫번째 키커로 나선 베컴이 엉킨 스텝으로 똥볼을 차버리면서 승부차기 패배의 빌미를 제공했다. 이 페널티킥은 런던 대공황 슛이라고 불리며 간간히 조롱당했지만, 이미 이전부터 잉글랜드 팀에 공헌한 바가 커서 그런지 여론은 오히려 베컴에게 수고했다고 위로하는 분위기였다.

6. 2006 FIFA 월드컵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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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여전히 주장으로 조별리그부터 전경기를 모두 선발 출장하며 팀을 8강으로 이끌었다. 특히 16강 에콰도르전에서는 심하게 무더운 날씨에 경기 중 구토까지 할 정도로 컨디션이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프리킥을 결승골로 만들며 1대 0으로 승리, 주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16강전에서 무리한 것이 빌미가 되어 8강 포르투갈전에서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었고, 잉글랜드는 지난 유로 대회에 이어 다시 한 번 승부차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승부차기 징크스도 극복도 못하고 2년 전의 설욕 또한 실패한다.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을 못 하고 늘 8강이 한계였던 잉글랜드라 2006년 이후부터 베컴을 중심으로 한 전술에 한계가 왔다는 의견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독일 월드컵 종료 후 새 감독으로 취임한 스티브 맥클라렌은 대표팀의 체질 개선을 위해 베컴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정말로 베컴 없이 대표팀을 꾸렸다. 주장 완장도 존 테리에게 넘긴 것은 덤. 그러나 전혀 개선된 것은 없었고, UEFA 유로 2008 예선전에서 잉글랜드는 크로아티아에게 0대 2로 패배하는 등[6] 죽을 쑤기 시작했다. 결국 할 수 없이 2007년 여름부터 베컴을 대표팀에 복귀시켰으나 이미 때는 늦었고, 결국 거스 히딩크가 이끌던 러시아에 유로 본선 진출권을 내어주고 만다.[7] 정말로 베컴 중심의 전술이 한계가 왔는지 여부는 둘째치고, 확실한 대안도 없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베컴을 배제한 댓가치곤 참혹했다.

7.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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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간으로 2008년 3월 27일 스타드 드 프랑스에서 벌어진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 100경기 출전을 달성해 센츄리 클럽에 가입했다. 당시 잉글랜드의 주장인 존 테리가 이 경기만큼은 베컴에게 주장 완장을 양보하려 했으나, 자신에게만 관심이 쏠리는 것을 원하지 않는 베컴이 거절했다고 한다.

국제대회 우승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 이제 나이가 제법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표팀 승선을 원하고 있다. 맥클라렌의 후임인 파비오 카펠로 감독은 유럽 무대에서 검증된 선수만 대표팀에 발탁한다는 입장이었고, 베컴은 MLS 오프시즌마다 AC 밀란으로 단기 임대를 가면서까지 카펠로의 눈도장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비록 둘은 레알 마드리드 시절 한때 껄끄러운 관계였지만 이후 카펠로가 베컴에게 사과하고 후반기에 재중용하여 리그 역전 우승을 이루면서 화해한 사이였다. 베컴의 노력에 화답하듯 카펠로는 월드컵 최종예선 10경기 중 9경기에 베컴을 출전시키며 베컴을 중용했다. 하지만 밀란에서 경기를 뛰던 도중 키에보 베로나와의 경기에서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당해서 아쉽게도 2010 남아공 월드컵 국가대표에는 뽑히지 못했다.[8] 부상당한 순간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 출전의 꿈이 날아가버렸다는 것을 안 베컴이 오열하는 장면은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하지만 카펠로 감독이 어떤 형태로든 베컴을 본선에 데려가고자 했고, 결국 선수가 아닌 코칭스태프 보좌역으로 대표팀에 승선해 잉글랜드 대표팀의 경기를 벤치에서 지켜보았다. 이때 골키퍼 로버트 그린의 실책을 지켜보다 급정색하는 표정이 중계 카메라에 잡혀 화제가 되었다. 골키퍼 저걸 그냥 확! 그리고 현피 직전까지 갔던 스티븐 제라드 존 테리를 잘 다독여서 화해시키는 등 알게 모르게 많은 역할을 했다.

남아공 월드컵 이후 카펠로가 UEFA 유로 2012 플랜으로 새로운 대표팀 구성을 위해 더 이상 베컴을 발탁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대신 2010년 11월 프랑스와의 친선 경기 때 베컴의 대표팀 은퇴 경기를 열어주겠다고 제의했지만, 베컴은 대표팀에서 은퇴할 의사가 없으며 10경기가 되든 1경기가 되든 반드시 대표팀에 필요한 선수로 돌아가고 싶다며 카펠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2012 런던 올림픽의 영국 단일팀 출전을 열망했고, 와일드카드 최종 후보 명단에까지 올랐으나 끝내 최종 엔트리에는 발탁되지 못했다. 다시 한번 좌긱스 우베컴을 보고 싶어했던 전 세계의 축구팬들은 멘붕. 베컴 뛰었어도 우리나라가 영국 잡았으려나[9]

대표팀 감독이 로이 호지슨으로 교체되었고, 마침 베컴이 파리 생제르맹과 계약해 유럽 무대로 복귀하며 대표팀 복귀설이 나왔지만 호지슨 감독은 베컴을 뽑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후 2013년 베컴이 현역 은퇴를 선언하면서 역대 출전 3위 기록을 남겼다.

8.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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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잉글랜드 황금세대 안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존재였다.[10] 200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상당수의 국대 주요 선수들은 클럽팀 축구를 우선으로 생각하여 국가대표 차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클럽팀에서의 라이벌리 감정을 국대 소집 기간 도중에도 떨쳐내지 못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은 구성원 각각의 훌륭한 면면과는 달리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는데, 베컴만큼은 그야말로 애국자의 전형을 보여주며 국가대표 차출을 늘 커리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겼고, 그 영광에 보답하는 활약을 보여주었다.

베컴의 초정밀 킥과 크로스는 잉글랜드의 상징인 킥 앤 러쉬 스타일에 반드시 필요한 옵션으로, 프리키커와 대형 스트라이커가 없는 잉글랜드 대표팀의 강력한 공격 수단 중 하나였다.

베컴처럼 정밀한 크로스를 올릴 윙어와 이를 높은 확률로 득점으로 연결해줄 타겟 스트라이커 조합이 갖춰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강력한 공격 옵션이 된다. 때문에 대형 스트라이커 부재에 시달리는 잉글랜드 대표팀으로선[11] 베컴의 프리킥과 더불어 크로스는 세계 무대에서 통할 몇 안되는 유효한 공격 수단이었다. 하지만 모든 잉글랜드의 공격 패턴이 베컴의 킥에서부터 시작되는 부작용 또한 컸기 때문에,[12] 베컴의 크로스를 두고 지금 당장 잉글랜드에 가장 필요하지만 장기적으로 잉글랜드의 경기력 개선을 위해선 점차 사라져야 하는 것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몇 년째 잉글랜드에서 그보다 확실한 플레이를 하는 선수는 없다. 말썽 많았던 폴 개스코인이라는 잉글랜드 역사에 남을 테크니션이 아웃되고나서 잉글랜드 공격진, 혹은 전방 중원 미들진은 창조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조 콜 폴 개스코인의 뒤를 이을 천재라고 평가 받았지만 잦은 부상으로 기대치에 미치지 못했고, 중원에 스티븐 제라드 프랭크 램파드가 창조성이 있긴 있지만 서로 겹치는 스타일과 동선 때문에 활약이 미미했다. 폴 스콜스도 일찌감치 대표팀 조기 은퇴.

그런 상황에서 베컴만큼은 순간의 시간만 있으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크로스 혹은 땅볼 패스 혹은 중거리를 때려 버린다. 흔히 베컴이 크로스만 날린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땅볼 패스 역시 명품이다. 압도적으로 뛰어난 크로스에 가려져 눈에 띄지 않을 뿐. 이런 베컴의 발끝은 1998년부터 10여년간 잉글랜드의 가장 확실하게 보장된, 유일한 창조적인 공격 수단이었다.

[1] 물론 베컴의 퇴장이 예상치 못한 엄청난 변수였던 것은 맞고 베컴 본인도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였다고 인정했기 때문에 해당 발언 자체가 아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불과 23살에 불과했던 어린 선수를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지도 못할 망정 어떠한 필터링도 없이 책임을 돌리는 듯한 발언은 한 팀의 수장으로서 좋지 않은 행동이다. 또 베컴의 행동이 멍청했던 것과는 별개로 그의 퇴장을 유도해냈던 디에고 시메오네가 직접 인정했듯이 그것은 절대 퇴장감이 아니었으며 잉글랜드는 베컴 없이도 승부차기까지 끌고갔기 때문에 상황을 만회할수도 있었다. [2] 마지막 경기 전 잉글랜드와 독일은 똑같이 5승 1무 1패를 거둬 승점에서 동률이었고, 잉글랜드가 독일과의 상대전적에서 1승 1패 5득점 2실점으로 앞서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상대인 그리스를 상대로 잉글랜드는 실점을 한 반면, 독일은 핀란드를 상대로 0대 0으로 비기고 있었던 터라 언제 결승골이 터져서 순위가 뒤바뀔지 모르는 일이었다. [3] 독일은 핀란드를 상대로 0대 0으로 묶이며 주저앉았고, 우크라이나와의 플레이오프를 준비해야 했다. [4] 이 때 헤더로 선제골을 얻은 선수가 솔 캠벨이었다. 단, 후반전에 스웨덴이 알렉산드르손의 중거리 슛으로 동점을 만들며 결과는 1대 1 무승부가 되었다. [5] 잉글랜드전의 패전으로 인해 아르헨티나는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은 에르난 크레스포눈물겨웠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의 투혼에도 불구하고 비겨,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을 겪었다. 이후 포체티노는 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그래서 아르헨티나 출신이 영국에서 지도자를 하고 있는 건가? [6] 이 경기에서 백패스를 폴 로빈슨 골키퍼가 헛발질로 자책골로 만들어버리는 최악의 실책이 나왔다. [7] 2000년 이후의 메이저 대회 중 잉글랜드가 유일하게 예선에서 탈락한 기록이다. [8] 당시 베컴의 월드컵 대표팀 발탁 가능성은 반반이었지만, 카펠로는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베컴을 뽑는 쪽으로 거의 마음먹고 있었다고 한다. [9] 저땐 폼이 확 떨어진 상태여서 베컴의 출전은 상징성 그 이상말고는 냉정히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저 때 팀 자체가 스코틀랜드,북아일랜드 빠진 반쪽 단일팀을 감수할 정도로 고국에서 열린 올림픽 메달을 따고 말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강하기도 했다. [10] 엄밀히 얘기하자면 잉글랜드의 황금세대는 80년 전후로 태어난 선수들( 리오 퍼디난드, 프랭크 램파드 -78년생, 마이클 오언 -79년생, 스티븐 제라드, 애슐리 콜, 존 테리 -80년생, 조 콜 -81년생)이기 때문에 75년생인 베컴은 그들보다 반세대 정도 앞이다. [11] 웨인 루니가 있긴 하지만, 전형적인 타겟형 공격수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베컴과 조합이 잘 맞지 많는다. 명실상부 월드 클래스 공격수인 해리 케인이라도 있었다면 잉글랜드의 메이저 대회 부진은 달라졌을지도... [12] 하비에르 마스체라노 같은 대인 마크가 뛰어나고 활동량이 많은 선수에게는 지워지는 경기가 몇 번 있었다. 실제로도 베컴을 막는 전술 중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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