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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긍정적 평가
- 이 드라마에서는 국가로서 조선의 역동적 능력이 묘사되어 있다. 가령 정보력의 경우 불멸의 이순신에서 일본의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조선의 정보력을 대왕 세종에서는 한 에피소드를 들여 제대로 표현해냈다.[1] 군대 묘사의 경우도 그러한데, 포졸복 입고 삼지창을 든 병사라는 나약한 묘사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2]
- 이 외에도 중동계 인물을 정부 고관으로 등장시킨다든가[3], 당시 조선의 정치과정과 과학기술력을 드라마 내에서 주요 소재로 활용하고 당시의 과학수사 과정 등을 에피소드화 한 것을 볼 때 각본가 역시 그동안 폄하되어 왔던 조선에 대한 인식을 수정하는 것이 나름의 목표였던 듯하다. 실제로 이 사극은 복식이나 군복, 세트 등에서 가장 고증에 투철한 사극으로 꼽혔다. 이러한 조선왕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작품 외적인 부분에서 그 의미가 크다. 이를 통해 다소 조선까적인 감이 있었던 대중들의 평가를 상향시키는 효과를 노림직했다.
- 인물들을 선역과 악역으로 단순히 이분하지 않고 각자의 입장을 최대한 설명하려 했으며,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물러날 때의 연출이 훌륭하다. 부패했지만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최대한 이용하지 못하는 태종을 꾸짖고 사직하는 하륜이라든지, 군대를 이끌고 제멋대로 출병한 양녕대군을 잡아오는 일을 양녕대군에게 동조한 인물이었기에 맡겨서는 안될 자신[4]에게 맡기려는 태종을 바로잡고 귀양가는 이숙번 등이 좋은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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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의 한복을 볼 만 하게 재현해냈다.
가체 역시 그 시대에 적합하게 잘 재현했다는 평. 칠적관을 두 개나 제작한데다 송아지 가죽으로 갑옷을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의상의 그 수많은 문양들을 직접 수놓기까지 해서 높은 퀄리티를 뿜어낸다. 복식을 고증하고 제작하는 것에 작정하고 엄청난 정성과 제작비를 쏟아부은 만큼 대왕세종의 의상들은 KBS의
좋은 수입원이 되었다. 의상을 자주 대여해줘서 가끔 다른 사극에서 대왕세종의 의상을 찾아볼 수 있다. 원래
KBS는
용의 눈물 때부터 여말선초 사극 제작 노하우가 쌓여있었기때문에 그 노하우를 여기에서 다시 발휘한 거라고 볼 수 있다. 게다가 기존의
용의 눈물에서 활용된 의상이 아니라 거액을 들여 처음부터 의상을 죄다 새로 제작한 것이라 그만큼 떼깔도 장난아니었고, 심지어 몇몇 의상은
용의 눈물때보다 고증이 더 개선되어서 선보여지기도 했다.[5] 이는 그당시
KBS사장이었던
정연주가 이 드라마 지원에 거의 몰빵하다시피해서 가능했던 것이기도 했다.
너무 몰빵한 나머지 문경에 있던 멀쩡한 고려왕궁 세트장까지 부숴버렸을 정도
- OST 곡들에 대한 평가가 좋아 지금까지도 종종 배경음악으로 사용되곤 한다.
- 출연진들 중 당시에는 사실상 무명이었으나 이후 가치가 급격히 상승해 네임드급, 혹은 나름의 인지도 있는 배우가 된 사례들이 많이 보인다. 대표적인 예시로 다연 역의 정유미, 어리 역의 오연서, 최만리 역의 이성민, 평도전 역의 배성우, 문종 역의 이상엽 등이 해당된다.
- 이전에도, 이후에도 대왕 세종만큼 대마도 정벌을 자세하게 묘사한 사극이 없다보니 대마도 정벌 관련 얘기가 나올 때마다 대왕 세종에서 촬영한 부분이 인용된다. 기존에 대마도 정벌을 다룬 용의 눈물도 대왕 세종에 비하면 대마도 정벌 묘사가 자세하지 않은 편이었다.
- 일부 인물들에 대한 신선한 묘사 역시 호평 요소이다. 충녕대군의 경우 비록 실제 역사에서처럼 왕위와 권력에 대한 욕심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수준은 아니어도 자신만의 이념을 가지고 형 양녕대군에게 맞서는 것으로 묘사하였는데, 사실상 처음으로 양녕과 충녕의 대립구도를 적용하였으며, 이는 형의 양보로 어쩔 수 없이 세자가 된 것처럼 묘사했던 용의 눈물의 세종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묘사하였다. 세종의 아들인 문종도 기존의 문약한 왕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세자 시절부터 총명하고 강단 있는 왕재의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역대 사극에 나온 문종 중 가장 실제 역사에 근접한 문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정종 역시 유약한 바지사장이었던 용의 눈물과 달리 태종조차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지닌 상왕으로 그려냈다.[6]
2. 부정적 평가
- 방영 도중 대하사극을 광고유치를 위해 KBS 2TV 채널로 옮겨 방송하는 무리수를 두는 바람에 초반부 20%까지 기록하던 시청률이 중반부 들어 한자리 수로 급락하더니 최종회 13.1%(AGB 기준. TNmS에서는 13.6%)까지 떨어지며 좋지 않았다.
- 한국어 용법을 생각하면 대본 자체도 그리 질이 좋지 못하다. 예를 들면 작중에 '국본은 나라를 이어받을 몸, 헌데 넌 어찌 그 모양이냐' 라든가 '전하의 그 행보, 납득할 수 없습니다' 등 '명사 + 쉼표' 가 많이 나오는데, 한국어는 서술어가 굉장히 중요한 언어다. 말을 계속 잇든 도중에 잠깐 끊든 간에, 명사로 매듭을 짓는 것. 특히나 작중의 인물이 너나 할 것 없이 이렇게 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색하다. 문제는 이런 식의 어투가 가장 많이 나오는 장르가 일본산 번역물이라는 점. 이거야 사소한 트집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태종이나 양녕이 직접 검을 들고 고려부흥세력이나 강상인 등을 베려 한다거나[7] 정치적 라이벌인 윤회가 죽자 조말생이 통곡을 한다거나[8] 음모를 깨부수는 일반인 여캐의 활약 등 일본 서브컬처물 테이스트가 묻어나오는 장면이, 그것도 본작 뿐만 아니라 윤선주가 집필한 작품들마다 진하게 묻어나오니 문제다.[9]
- 조선군 장수들과 균형을 맞추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의 영주들에 대한 호칭이 다이묘가 아니라 쇼군이어서 일본 역사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시청자들에게는 오히려 혼란을 주었다. 차라리 주군이나 도노(どの)라고 부르는 게 나았을 것이다.
- 61, 62화에서 자막을 이용하여 '권도(權道)' 라는 단어를 '임금의 절대 권력' 이라고 소개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권도란 평소에는 안 될 일이지만 특이하고 예외적인 상황에 한정하여 정당성을 얻을 수 있는 일을 가리키는데, 맹자의 경우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서로 손을 잡는 것은 禮가 아니나 물에 빠진 형수를 구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은 權이다' 라고 설명한 바 있다. 즉 자막을 달려면 제대로 달든가, 아예 대사에서 권도라는 단어를 빼든가 해야 했다.
- 명나라 사람이나 일본인의 대사에 한국어가 아닌 중국어와 일본어를 썼는데, 배우가 한국인들인 만큼 발음이 어색했던 문제는 넘어간다 쳐도 일본어의 경우 고어가 아닌 현대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굉장히 어색했다.[10]
2.1. 고증 오류
이 사극의 가장 큰 문제점은 수많은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하거나 뒤바꿈으로서 정통 사극으로서의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한 것이다. 용의 눈물, 왕과 비 이후 한동안 제작되지 않았던 정통 정치 사극이 부활한다는 것에 열광했던 사극 매니아층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작품을 외면했고, 정치 사극이라는 것 자체가 자칫하면 진행이 너무 무거워질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대다수 시청자들로부터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게다가 A와 B가 대화하는 것을 C가 듣고 있다가 행동한다거나 왕이 경호를 물리치고 죽창과 칼로 무장한 폭도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거나 특정인이 다른 인물과 대화를 나누었던 장면이 당시에는 보이지 않고 나중에 회상 신으로만 등장하는 등의 지나치게 진부한 감성 연출이 거의 매 화 반복되었을 뿐 아니라, 세종의 일처리가 신하에게 문제에 대하여 묻고 대책을 마련한 뒤 행하는 것이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이나 대책없이 무리한 시책을 강행하여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고 그걸 다시 감성에 호소하고 극적인 연출로 극복하는 모습[11]의 반복은 비판받아 마땅했다.무시하거나 극작가 마음대로 바꿔치기한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다.
- 초중반부 주요 키워드가 되는 것은 옥환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이끄는 고려부흥세력인데, 이러한 세력은 아예 실존하지 않았기에[12] 사극 매니아들의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 드라마적인 완성도는 높았으나, 이러한 완전한 가공의 요소를 드라마 내의 핵심요소로 등장시킨 것은 정통 사극이라는 이름 자체를 버리는 행위였다.
- 세종대, 보다 넓게는 조선 전기의 사회상을 그려내는 데에도 간간이 오류가 보인다. 가령 극 초반부에는 명나라 사신들이 보기에 안 좋으니 육조 거리의 난전들을 싹 없애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거나 왜구들이 조세창을 약탈해가자 대상인들의 재산을 털어서 메운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거 적어도 17, 18세기 이후 상업이 어느 정도 발달한 다음에나 있을 법한 소리들이다[13]. 세종대의 조선은 명백한 농업국가로, 아직 상업은 그닥 발전하지 못했던 때다. 또 세종의 4군 6진 정벌과 여진족에 대한 회유정책에 대해 다루는 대목에서 '5천년간 단일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켜 온 조선에서 이 무슨...!' 이라는 식으로 반발하는 모습이 그려지는데, 여진 출신인 이지란이나 위구르족인 설장수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민족이라는 말 자체가 근대 일본에서 생겨난 말이다. 게다가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각국 사람들이 동족이란 생각이 오늘날보다 미약했다. 또 64화에서 묘사된 한성의 대화재는 1426년이라는 자막으로 보아 실록의 이 기사를 모티브로 한 듯 한데, 여진족 회유정책에 반발한 북방민들의 소행으로 의심받았다는 근거는 전혀 없다.
- 극의 긴장도를 위해서인지 태종 대 조선과 명의 관계가 껄끄러운 것으로 묘사했는데, 실제로는 항목에도 나와 있듯이 전반적으로는 굉장히 좋은 편이었다. 각자 보위에 오르기 전에 태종과 영락제가 직접 만났던 적도 있고, 조선으로서는 이득이 많이 남는 공무역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조공을 1년에 3회 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으며 태종 스스로가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으로 명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앞장서서 참여했다. 세종 대에도 명과의 관계가 급격히 악화되지 않았으니, 극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명이 조선의 병조판서를 암살한다거나 세종 본인을 해하려 한 것 등은 말도 안 되는 소리. 굳이 옹호를 한다면 조선에 파견되어 온 명 사신들의 횡포가 아주 없지는 않았고 영락제의 명에 따라 공녀를 차출하느라 백성들이 피해를 입은 사실은 있으나, 사신이 조선을 대놓고 오랑캐라 부르거나 세자 시절의 양녕대군을 사실상 모욕하는 따위는 실제와 맞지 않는다.
-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물러난 뒤 지병으로 몸이 악화 되던 중 조말생에게 뒷통수를 당해 군권을 통째로 빼앗기고 그 충격에 쓰러지는 장면이 있는데, 실제로 조말생은 태종과 세종의 총애를 받은 관료 중 하나였을 뿐이지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다. 용의 눈물에서는 심온이 사사된 이후 소헌왕후를 폐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는 데 조말생도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종이 "그 친구 많이 컸구먼..." 이라고 혀를 차는데, 딱 이 정도가 적절한 묘사다. 특히 세종 집권 당시 "금상을 제대로 밟아줄 생각이다." "금상이 돌았군" 이라는 왕을 말 그대로 개무시하는 언사를 대놓고 하는데, 실제로 이런 소리를 했다면 세종대가 아니라 왕권이 나락으로 떨어졌던 세도정치기 였다고 해도 그대로 역적으로 몰려 처형 되었을 것이다. 사실 조말생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신하들이 왕이나 세자를 두고 자격이 없다, 폐해야 한다는 말을 거의 입에 달고 사는 수준인데, 왕이나 세자를 폐하는 것은 중전을 폐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폐세자는 애초에 왕이 확정짓기 전까지는 신하들이 함부로 논할 수 있는 게 아닌데다가, 폐위는 정말 그 왕이 막장이 아닌 이상 일개 신하들이 함부로 논했다가는 바로 역모죄로 몰려 처단당할 수 있다. 후술하듯 이 드라마 자체가 실제 조선시대의 정치판을 그려내는 것보다도 현대 대한민국에 필요한 이상적인 지도자로서의 세종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신하들이 왕을 대하는 태도 역시 실제 왕정국가에서의 그것보다는 민주 국가에서 정치인들이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에 더 가깝게 그려졌다는 느낌이 강하다.[14]
- 이수가 충녕대군에게 대학연의를 강하자 '제왕학의 교과서를 세자가 아닌 왕자가 배우다니 이는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하며 뒤집어지는 묘사가 있는데, 일단 대학연의는 제왕이 나라를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기본적으로는 사서 가운데 하나인 대학의 내용을 설명하는 보충 교재쯤 되는 것이지 '제왕학의 교과서' 라고 할 수는 없다[15]. 실제로 중종의 경우 대학연의를 중시하면서 선비라면 무릇 이 책에 밝아야 한다고 선언했으며 그 뒤로 문과의 기본 시험 과목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중종은 선비들에게 반역을 부추겼다는 것인가? 또 한 발 양보하여 '제왕학의 교과서' 가 맞다고 한다면, 현대 한국인 가운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는 자는 모두 제왕이 되기를 꿈꾸고 있다는 뜻인가?
- 명나라의 관모로 전작 대조영에 나온 당나라의 복두가 재탕되었는데, 초기의 명나라 관모는 당나라 복두와 뿔의 형태에 차이가 있는 연각사모였으므로 본작에서 조선의 관모로 나온 연각사모 소품들 중 일부를 명나라 관모로 돌려막기하는 게 나았다.
- 대마도 원정 즈음인 42화에서 동래 왜관에 대해 언급하면서 일본인들이 '적게는 몇 년, 길게는 수십 년' 동안 왜관에서 살았으며 조선인과 혼인한 경우도 많다고 했는데, 적어도 조선 후기의 경우 둘 다 어림없는 소리다. 왜관에는 일본인 여성이 거주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몇 년 정도는 몰라도 수십 년 동안 산다는 것은 후손 남기기 싫다는 소리였으며, 일본인 남성이 조선인 여성의 성관계는 양쪽 모두 처벌하는 규정[16]이 마련되어 있었을 정도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이러니 조선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혼인은 무리다.
- 46화에서 대마도 원정의 첫 전투였던 두지포 전투를 묘사할 때 불태우거나 노획한 일본 함선이 129척에 달했으나 일본 측 전사자는 130명에 지나지 않았으니 살상을 되도록 자제한 것을 알 수 있다며 '인도적인 전투' 였다는 말을 썼는데, 이거 자원봉사나 교류가 아니라 전쟁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이없는 표현이다. 따지고 보면 원인이야 어쨌건간에 전쟁이라는 것 자체가 인도적이라는 말에 들어맞지 않으며, 당시 조선 측이나 대마도 측이나 '아무리 적이 왜구라도 가급적 인도적으로 싸우라' 라든가 '조선 놈들 인도적으로 좀 공격하지' 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은 없다. 또 일본의 가옥 1939호를 불살랐다는 실록의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인도적' 으로 행동하기는커녕 왜구를 철저히 섬멸코자 했음을 알 수 있으며, 전사자가 적은 것은 일본군의 배를 모두 없애버리고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전투가 벌어지자마자 일본군이 퇴각해버렸다고 이해하면 충분히 설명이 된다. 대마도 원정을 묘사한 다른 사극인 용의 눈물 같은 경우 인도적의 인 자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주인공이 태종인 만큼 단시일 내에 승리를 거둔 점과 함께 세종의 업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태종의 업적이라고 할만 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 대마도 정벌 장면에서 대마도의 일본군 병사들이 전국시대 갑옷을 입고 나온다. 소 사다모리와 가신들은 전국시대 사무라이마냥 갑옷 위에 진바오리를 입었고, 일반 병사들은 전국시대 아시가루 차림인데, 대마도 정벌 당시 일본은 무로마치 시대였으므로 용의 눈물에서처럼 무로마치 시대 갑옷을 입는 것이 고증에 맞는다. 임진왜란을 다루었던 기존 사극들에서 고증에 안 맞게 일본군 갑옷이 헤이안 시대, 가마쿠라 시대, 무로마치 시대의 갑옷이었던 것과는 정반대인 고증 오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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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행실을 보면 그저 망나니였던
양녕대군은 열혈 쾌남아에 요동 정벌을 꿈꾸는 사나이로 대책없이 미화되고[17] 신하들은 쪼개져 각각 양녕대군과 효령, 충녕에게 지지를 보낸다.
용의 눈물에서도 '비정한 정치에 뜻이 없어 충녕에게 세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놀아제꼈던 인물' 로 미화된 감이 있었지만, 이건 조선왕조실록을 보려면 비싼 CD롬을 사야 했던 1996년 작품이고 대왕 세종은 인터넷에 치면 바로 실록이 뜨는 2008년 작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에서의 양녕대군은 풍류만 좋아할 뿐 딱히 광기있게 놀아제끼는 모습은 나온 것이 없다.[18] 더군다나 무인으로서의 보여주는 모습도 실제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활쏘기 등을 좋아했고 실력도 좋았지만 어디까지나 노는 수준이었지 극 중에서 나오는 모습처럼 대놓고 전투에 나서려고 할 정도는 아니었으며, 활쏘기 자체도 정신 수양의 방편으로서 문무관 막론하고 인기가 있었지 무인들만 익히는 특별한 기예는 전혀 아니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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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방영시점(1409~1410)에서 이미 죽었거나 제주도에 귀양가 있어야할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멀쩡하게 살아남아 효령과 충녕을 제거할 음모를 꾸미는데, 이건 태종이 민씨 형제를 제거할 때 써 먹었던 명분일 뿐 사실이 아니다. 또한 민무휼과 민무회는 양녕대군 편에 서서 권력을 추구하며 사병까지 끌고 다녔는데[20], 연도를 따져보면 사병은 진작에 혁파되고 그에 반발하던 공신들이 귀양간 지도 이미 한참 지난 시점이다. 이 외에 심온이나 강상인 등의 죽음도 창작적인 요소를 듬뿍 집어넣었고[21], 충녕대군이 북변에서 유배생활을 하거나 태종이 양녕에게 충녕을 죽이라고 권하거나 하는 등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전개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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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괜히 너프당하는 게
태종. 남성적 카리스마가 두드러졌던 용의 눈물에 비해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잘 드러났다는 평도 있으나 막상 극중에선 외척과 신료들이 왕자별로 파벌을 가르고 있지도 않은 고려부흥세력이 궁을 습격하며 툭하면 사람 마구잡이로 죽여 일 크게 만든다고 까인다.[22] 물론 작중에서도 신하들을 찍어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는 모습이 나오긴 했지만 실제보다 너프 되었고[23], 아들을 귀양보내고 죽이라고 권하는 모습에선 자식들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웠던 역사 속에서의 인간다운 면모도 보이지 않는다.[24] 작중 묘사를 보면 태종은 힘없는 백성들은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아주 잔인하게 탄압하면서, 정작 왕권을 위협할 만한 적이 될 수도 있는 권신들은 어찌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본인이 바로 그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으며, 중신들을 통해 세종을 견제하는 등 실제 역사의 태종이었으면 바로 거품 물고 까무라쳤을 짓들을 벌이며,[25] 말년에는 본인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했던 것처럼 조말생에게 통수를 맞고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한다.
이쯤되면 작가가 태종까인 것 같다.또한 충녕이 어린 시절 신문고에 먼지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 이러니 백성들이 아바마마를 폭군이라 부르는 것 아니냐고 독백하는데, 이건 완전 개소리다. 일단 신문고에 먼지가 쌓였다는 것은 정말 태평성대이거나, 아니면 백성들이 불만을 품는 것을 강제로 반대하고 탄압했다는 뜻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이를 후자로 해석했는데, 정작 신문고 설치하라고 한 사람이 태종이다. 또한 왕자인 충녕이 백성들을 대표하여 신문고를 울렸다고 궁 안이 발칵 뒤집히는 묘사가 나오는데, 애초에 힘없는 백성들이 불만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설치한 것이 신문고임을 감안하면 이런 묘사 자체가 엉터리다.
- 작중에서의 조선은 '숭유억불' 을 FM대로 철저히 실천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숭유억불이라는 방침을 내세운 것 자체는 사실이고[26] 세종 대에 불교 종파를 통폐합한 것도 사실이나 불교를 무작정 탄압만 하지는 않았다. 작중에서도 변계량이 유학자이면서도 사찰에 기부하는 모습이 나오고,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세종의 명으로 월인천강지곡이 출판되는데 이건 공자나 주자가 아니라 부처의 공덕을 찬양하는 찬불가다. 또 세조도 불교를 진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7] 실록을 보더라도 흥천사 탑을 수리하려는데 효령대군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라는 기사나 승려 행호라는 자에게 염주나 지팡이 등을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효령의 청을 듣고서 따르는 기사 등이 나올 뿐이지 태종이나 세종, 기타 관료 등이 효령이 불교에 관심을 보이는 것을 만류하거나 타이르는 기록은 일체 없다. 즉 세종이나 다른 관료들이 변계량에게 '일개 서생도 아니고 고관대작이라는 자가 사찰에 공공연히 기부하다니 좀 자제할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하는 식으로 가볍게 핀잔을 주는 것은 있을 법한 일이지만, 사찰에서 백성들 구휼한다고 모조리 때려부순다거나 국왕이 모후를 모신다고 사찰로 행차한 것을 문제삼는 것은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28]
- 사실상 이 드라마의 가장 큰,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점으로, 이 드라마의 주제 자체도 역사속의 인물 세종대왕을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는 조선시대 배경으로 현대 한국사회를 그려내고 현대 한국에 필요한 지도자를 세종대왕에 투영했다고 보는게 정확하다.[29] 문제는 드라마에 투영된 한국사회의 문제점과 이상향이 어디까지나 윤작가 개인의 생각이었다는 거. 때문에 작가가 원하는 인물상을 그리려는 시도에서 전형적인 주인공의 시련을 주는 과정에서 충녕대군을 귀양보낸다는 사실과는 정반대의 내용을 집어넣었다.[30] 참고로 이것은 현대사를 풍자한다는 것을 대놓고 밝혔던 무인시대와도 일치하는 제작 의도이다. 그러나 무인시대의 것은 호평을 받은 반면에 대왕 세종은 비판을 받은 이유는, 무인시대는 작가의 의도에 들어맞는 실제 사건을 정확히 묘사한 반면 대왕 세종에서는 작가의 의도로 인해 실제사건이 왜곡되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윤선주는 이런 행보 때문에 이미 불멸의 이순신 시절부터 역밀덕들에게서 윤뷁이라 불리며 증오의 대상이 되었을 정도였고, 불멸의 이순신의 온갖 왜곡에 치를 떨던 이들은 대왕 세종도 처음부터 기대를 안했다.
- 작중에서 상왕 시절의 태종이 세종에게 말을 낮추거나 천인이 된 소헌왕후의 어머니가 소헌왕후에게 반말을 쓰는 사례가 많은데, 작가로서는 임팩트를 주고 싶었음이 드러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반말을 쓸 수가 없었다. 특히 소헌왕후 모녀 같은 경우 노비가 왕비에게 반말을 쓴 것인데, 모녀간이라는 사적인 관계보다 왕비와 노비라는 공적인 관계가 우선이었기 때문에 불경죄 적용받기 딱 좋은 짓이다. 차라리 서로에게 존댓말을 쓰는 걸로 묘사해야 했을 것이다.
- 이와 정반대되는 고증 오류로는 태종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강상인을 자기 집 노비 부르듯이 '상인이' 라고 부르는 부분을 들 수 있는데, 강상인이 원래 태종의 가신 출신이기는 하지만 그가 즉위하면서부터 관직에 나아갔다. 또 처형당했을 당시에는 병조참판이었는데, 이 자리는 미관말직이 아니라 종 2품의 고위 관직이었다. 즉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강 대감' 이라 불러야지 '상인이' 라고 부르는 것은 어색한 일이다. 설령 '상인이' 라고 부르더라도 사적인 자리에서나 잠깐 그렇게 부르는 게 그나마 비판의 여지가 적었을 것이다. 이와 대조되는 부분이 용의 눈물에 등장하는 조영무인데, 이쪽도 태종의 가신 같은 캐릭터로 그려지나 '영무' 와 '조 대감', '우상' 등의호칭이 적절하게 혼용되어 있다.
- 심온의 아내이자 소헌왕후의 어머니가 노비 일을 하는 장면이 잠시 나오는데, 실제와 다르다. 세종 8년 기록에 따르면 태종이 심온의 아내와 자녀를 천인에 속하도록 했으나 천역. 즉 천인들이 하는 일은 시키지 말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태종의 입장에서는 외척을 배격하고 싶었겠지만 소헌왕후의 위신을 깎을 이유도 없었는데, 용의 눈물 같은 경우 심온의 아내가 다른 노비들에 의해 곤욕을 치르는 장면을 잠시 보여주지만 곧바로 태종의 밀명을 받고 온 내금위장이 노비들을 꾸짖고 심온의 아내에게 국모의 어머니로서의 대우를 하라는 명이 있었다고 고하는 대목이 바로 뒤따라 나온다.
- 칠정산이 만들어지는 것과 관련해서 조선이 사용하고 있던 명의 역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연출로 조정이 며칠 몇 시에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예보하지만 예측이 틀린 것으로 나오고, 그를 지켜본 백성들이 "하늘의 뜻을 저렇게도 몰라...ㅉㅉ" 하는 장면이 있다. 그런데 이것은 현대 대한민국 국민들이 보일 법한 반응이지, 극중 배경이 조선시대임을 감안하면 대단히 비현실적인 모습이다. 애초에 천문학은 농사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으로, 하늘의 뜻을 읽어내기 위한 수단이라는 종교적, 철학적 성격이 있었기에 중시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31]. 즉 현대처럼 단순히 내일 날씨가 맑네 비가 오네 하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이었고, 아래와 같이 "하늘은 명의 것인데" 운운했던 것도 결국 이 때문이다. 따라서 "하늘의 뜻을 저렇게도 몰라..." 하며 혀를 차는 게 아니라, "주상께서 천명을 올바르게 받지 못하고 계신데, 앞으로 어떤 재앙이 일어나려나..." 라며 두려움에 떠는 것이 훨씬 사실과 가까운 모습이다.
- 칠정산이 만들어지는 대목에서 '하늘은 명의 것인데 어찌 조선이 감히...!' 하는 식으로 독자적인 역법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는 관료들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이랬을 가능성은 낮다. 임진왜란 때 명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독자적인 역법을 쓰고 있음이 알려질까 두려워했던 선조가 명의 역법을 그대로 따를 것을 지시했다가 효종조에 이르러 다시 조선만의 역법을 만들게 되는데, 이 때 어떤 역법이 맞느니 틀리느니 하는 이 야 기만 하지 하늘은 명의 것이니 조선의 것이니 하는 이야기는 일체 없다.
- 59화에서 장영실에게 관직을 내리는 대목에서 고위 관료들은 물론 집현전까지 '노비에게 관직을 준다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므로 불가하다!' 라고 맞서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허조가 반대한 것은 극중에서 묘사된 대로이나 악역 중의 악역으로 묘사된 조말생은 오히려 찬성을 표했으며, 영의정 유정현도 찬동했고 황희도 태종 대의 김인을 비롯해 노비 출신으로 호군 이상의 관직에 임명된 자가 많다며 찬성했다. 노비 제도 자체를 고치자는 것도 아니고 하고많은 노비들 가운데 공이 있는 자 몇몇에게 관직을 준다는데야 반대할 이유가 없었으며, 실록 전체에서 면천(免賤)이라 검색하면 관련된 기사가 수두룩하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32]. 그런데 이러한 사실을 전혀 소개하지 않고 노비 출신의 장영실을 중용한 것을 세종만 시행한 이례적인 일로 몰아간 것은 문제이다.[33]
- 세자 충녕과 효령의 스승이었던 이수는 아예 가공인물이라고 해도 좋은데, 극에서는 그가 고려의 유신으로서 조선의 창건에 내심 불만을 품고 있는 듯한 묘사가 있다. 그러나 그는 고려의 멸망을 슬퍼하며 은둔하기는커녕 1396년(태조 5)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것에서 볼 때, 조선의 창건을 지지한 사람이었거나 적어도 절개를 지키려 한 인물은 아니었다.[34] 또 그의 죽음은 어이가 없을 지경인데, 극중에서는 병조판서로 재임하던 중에 세종의 비밀 임무를 받아 요동에 잠입하여 공험진 정계비를 찾아냈으나 돌아오던 도중 명 제국 환관들의 비밀정보기관에 발각되어 독살당하는 것으로 그렸다. 그런데 병조 판서 재임 도중 죽은 것은 역사적 사실이나 실록에는 취중에 말을 달리다가 떨어져 죽었다고만 되어 있을 뿐 공험진의 공 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 문종의 두 번째 세자빈이었던 봉씨가 퇴출되는 과정에서 봉씨 스스로 궁녀와 동성애를 했던 것을 뉘우치고 스스로 자신을 내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한 마디로 줄이자면 쓸데없는 감성적 연출에 불과하다. 봉씨가 퇴출되는 이야기는 실록에 두 번에 걸쳐 나오는데, 특히나 세자빈 폐출에 대해 세종이 관료들에게 설명하는 두 번째 기사에서는 세종 스스로 ' 봉씨의 어리석음은 비록 부지런히 가르쳤지마는 마침내 고치고 뉘우치는 뜻이 없었다' 라고 밝혔다. 물론 이를 세자빈을 축출하는 것을 어떻게든 납득시킬 필요성에서 과장했다고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근거 없는 추측은 역사학계에서든 다른 학계에서든 진지한 학술 토론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35]
- 문종에 대한 묘사도 잘못되었다. 그는 세자 시절부터 국방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직접 훈련법을 적은 병서를 저술하기도 하고 무기를 개발하기도 했다. 또 아버지 세종의 정책을 깊이 이해하고 지지했으며, 따라서 세종 후반부의 업적은 사실상 문종이 주도했다고 보더라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그런데 작중에서는 대책없는 평화주의자로 등장하여 조선군의 무장 강화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 정종과 최만리를 비밀리에 암약하는 악역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정종은 충녕 대신 효령을 즉위시키려다 효령이 사양하는 바람에 뜻을 접었고 최만리는 진양대군( 수양대군), 명과 손을 잡고 세종을 폐위하려 했다. 그러나 용의 눈물에서처럼 정종을 유약하게만 그리지 않은 점은 평가할 만 하나 효령 즉위 운운은 도가 지나쳤고, 최만리 역시 훈민정음 창제 반대로 유명하지만 유능한 관료였으며 세종의 폐위는 그만두고 그의 뜻을 거스른 적조차 없다.[36]
- 본작에서 최해산과 장영실은 부자 관계에 버금간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같이 붙어다니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는 세종실록에 최해산이 등장하는 기사 39건과 장영실이 나오는 기사 14건 가운데 서로 중복되는 것이 없다. 즉 실록에 따르면 둘이 붙어다니기는커녕 그리 친하지 않은 사이였거나 데면데면한 관계였을 가능성도 높다.[37] 또 이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기여했다는 것도 완벽한 판타지이고, 최해산이 그 도중 명나라 환관들에게 해를 입었다는 것도 한 마디로 무협지.
-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사물의 그림을 그려 놓고 좌측 하단에 '朝鮮語', 우측 하단에 '漢字' 라고 써 놓은 종이가 벽에 여러 장 붙어 있는데, 한자야 실록에서도 용례가 확인되므로 문제될 것이 없지만 문제는 조선어. 일단 세종은 언어가 아니라 문자를 만들었던 것이므로 語라고 해서는 안 되며, 조선 후기 통신사들의 사행록을 보면 자신이 지나간 지방이나 마을의 이름 등을 한문으로 써 놓고 '倭音으로는 ㅁㅁ라 한다' 라고 한글이나 한자로 병기해 둔 경우가 종종 있다. (예 시) 즉 세종이 정말 저런 종이를 만들었다면 '朝鮮語' 가 아니라 '朝鮮音' 이라 했을 것이며, 실제로도 극중에서 세종이 열심히 고민하던 것이 '조선만의 소리' 였다.[38]
- 마지막화에서 명 제국이 훈민정음 반포를 막고자 군사적 대응까지 주저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이나 실제로는 그런 거 전혀 없었으며, 따라서 세종 암살 시도도 없었다. 더불어 소헌왕후가 문종 이외의 왕자들을 거느리고 명 영종을 친히 알현하는데, 극중에서는 소헌왕후 가족 몇 사람만 나왔지만 실제로 이런 사행을 하려면 사행단이 수백 명 규모는 되어야 했던 만큼 군사적 긴장 상태에서 파견할 수가 없었다.[39] 그 밖에 환관 왕진이 명의 사신으로서 남긴 '한 사람의 눈먼 자가 만인을 눈뜨게 하였다' 라는 대사는 나름 인상적이나 완전히 눈이 멀지 않은 세종을 장님으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 문제.
- 총통등록을 장영실이 최해산의 유지를 이어받아 편찬한 것처럼 묘사해 놓았는데,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먼저 이 책은 세종의 명을 받은 군기감에서 편찬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즉 세종의 가마가 부서진 사고 이후 파직되었던 장영실이 복직이라도 되지 않은 이상 편찬에 참여할 수가 없는데, 극중의 장영실만 놓고 본다 하더라도 그가 다시 관직을 받았다고 볼 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또한 장영실은 뛰어난 발명가였음은 사실이지만 화약 무기 기술자는 아니었기 때문에, 설령 열 번 양보하여 복직이 되고 편찬에 참여하기를 희망했다 하더라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 세종이 진양대군을 수양(首陽)대군으로 고쳐 부르면서 왕족의 머리(首)로서 문종을 잘 보필하라는 뜻이라고 당부하는데, 어거지로 짜맞춘 것에 불과하다. 수양은 황해도 해주의 옛 지명으로, 세종 때부터 황자를 각 지역의 왕으로 봉하는 중국의 예에 따라 각 고을의 이름을 대군에게 붙여 주었다. 진양(晉陽)은 경상도 진주의 옛이름. 또 짜맞춘 것조차 말이 안 되는데, 양녕대군에 효령대군이 멀쩡히 살아 있는데[40] 어떻게 항렬이 아래인 수양이 '머리' 가 된다는 말인가?
- 실록에 '평도전' 과 '평망고' 라고 기록된 일본 측 인물을 일본인이 각각 '다이라노 도젠', '다이라노 모코' 라고 했는데, 실제 다이라 씨는 일본 황실의 후손들이기 때문에 대마도 같은 오지에 사는 인물이 다이라씨였을 가능성은 낮다. 1655년의 통신사행록에 보이듯이 조선 측에서는 일본에 源, 平, 藤, 橘씨밖에 없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평씨가 아니었더라도 평씨로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다[41]. 이 밖에 실록에는 조선을 배반했다고만 짧게 기록된 평망고가 조선으로 되돌아오려 했다거나 규슈 지방 세력가가 가지고 있는 부채에 에도 시대 후기의 화가인 가츠시카 호쿠사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거나 천황이 제정한 고유한 연호를 쓰던 일본[42]이 기해년 운운하는 등 오류가 많은 편.
- 극중 충녕대군(후일 세종)에게 대군부인인 심씨부인(후일 소헌왕후)이 ‘대감’이라 부르지 않고 ‘마마’라고 부르는 모습이 많이 나오는데, ‘마마’는 왕과 왕비, 상왕과 대비, 세자(동궁), 세자빈 정도에게만 쓰이는 극존칭이다. 후일 세자가 되기는 하지만 당시에는 세자가 아닌 대군이었으므로 잘못되었다.
- 후반부에 세종이 한글 창제를 위해 인체의 구강 구조를 알아보고자 인체 해부를 지시하는 말도 안되는 장면이 있다. 시청자들도 이 장면만은 이구동성으로 말이 안된다는 반응이다.
[1]
실제로 임란 직전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선 정보원의 숫자가 적었던 것도 아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의 전후사정을 정보원을 통해, 비록 완전치는 않아도, 파악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2]
물론 조선군의 갑옷 착용 비율이나 주로 착용한 갑옷의 종류는 명확히 밝혀낼 자료가 없기에 요는 어느 정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걸 밝혀낸다면 그 연구자는 바로 역사에 이름을 남길 것이다. 조선 전기가 그 이후에 비해 갑옷무장비율이 더 높았을 가능성은 높지만, 유물은 극히 부족하며
류성룡의 갑옷이나, 동래성 해자유물로 보아 임란 당시까지는
찰갑 계열이 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그나마도 조선군이 갑옷을 벗고 싸웠다는 기록도 흔하다. 그리고 입고 싸웠다는 기록이나 그림은 한참 후에나 그린 것이나 주워 들은 것이다. 다만 조선군이 다 벗고 싸웠다고 단정짓기도 힘들고, 입고 싸웠다는 기록도 분명히 있으므로 단정은 금물. 어쨌든 기존 사극에서 조선군을 쾌자로 통일한 것은 단순한 고증의 선택이니 무작정 잘못되었다는 비판은 맞지 않다. 오히려
17세기까지 전군에
군복을 입힌 나라가 얼마나 있었는가 생각하면
쾌자, 일명
포졸복을 폄하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드라마에서 조선 병졸들이 입고 있는
두정갑은 조선 중기가 되어서야 개발되어 조선 후기에 보급됐던 갑옷이므로, 제대로 고증하려면 찰갑이 나왔어야 했다.
[3]
해당 인물은 설순이라는 사람인데, 실제로 배우를 중동계 사람을 출연시켰다. 설순의 할아버지인
설손은 고려 말엽에 고려로 귀화한
위구르인. 설순의 아버지 설장수도 조선 초기 조정에서 일했다. 다만 위구르인은 중동인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문화권의
유라시안 민족이기 때문에, 고증에 제대로 맞추려면 중국의 실제 위구르족 배우를 캐스팅하거나, 실제 위구르족까지는 아니더라도
우즈베키스탄이나
투르크메니스탄의 유라시안 튀르크인(
우즈베크인,
투르크멘인) 배우를 캐스팅해야 했다. 하다못해 중앙아시아계가 아닌 한국계 유라시안(한미혼혈, 한러혼혈 등) 배우를 캐스팅했어도 일단 유라시안 배우라는 점에서 인종에는 맞는 캐스팅이 되었을 것이다.
[4]
당시 병조판서였기에 잡으러 가는 군대를 이끌고 오히려 세자에게 가담하면 어쩌려느냐는 식으로 되려 힐문하고는 절대 반역은 일으키지 못할
이종무를 대신 보내라고 한다.
[5]
용의 눈물에서는 시대적 배경이 여말선초인 점을 반영하는 차원에서 주로
고려식 한복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대왕세종의 경우
중국
명나라색도 꽤 짙은 의상이 많이 선보여지기도 했는데 이는 실제로 조선 왕실이
명나라로부터 여러 관복을 하사받은 역사적 사실을 어느정도 반영한 것이다. 다만 2020년대들어
반중감정이 국민적으로 강해진 걸 염려한 탓인지
태종 이방원에서는
용의 눈물때처럼 고려식 한복이 더 많이 선보여졌다.
[6]
물론 후술하듯 그 정도가 지나치기는 했다.
[7]
이렇게 왕족이 직접 무기를 들고 적과 싸우려 하는 내용이 일본 서브컬처에 많이 나오는 것은 무인 중심이었던 근세 일본(특히
전국시대와
에도 시대)의 영향이다. 물론 한국 사극이라도
삼국시대나
후삼국시대가 배경이면 해당 시기는 전쟁이 워낙 잦아서 왕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던 만큼 전혀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8]
적이지만 훌륭하다며 적을 높이 평가하는 캐릭터가 많은 일본 창작물의 영향이다.
[9]
이 밖에 본작에서 고려부흥세력 지도층 가운데 자결하는 인물이 셋이나 되는데, 이 역시 일본 문화의 영향이다. 실록에서 자결이니 자진이니 하는 단어로 검색하더라도 '왕명으로 자결하게 했다' 라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스스로 원해서 배를 갈랐다는 이야기는 거의 없다. 특히나 전행수 같은 경우는 다른 동지들에게 짐이 된다는 이유로 자결했는데, 이는
일본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조선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자살에 대한 인식이 관대한 것 자체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영향을 받은 면이 강하다. 일본에서 자살에 대한 인식이 관대한 것은
할복의 영향이었다. 물론 전근대 한국에서도 자신의 뜻을 드러내기 위한 자살에는 관대한 편이었지만, 이마저도 전쟁에서의 패배 같은 극단적 상황에 내몰렸을 때의 자살 한정이었으며 단순히 동지들에게 짐이 되기 싫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좋지 않았다.
[10]
당장 세종과 신하가 대화하는데 하오체와 하소서체가 아니라 해체와 해요체를 쓴다고 생각해 보자.
[11]
이것도 당시 상황을 뜯어 보면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리한 시책으로 등장한 것 가운데 몇 가지를 들면 장영실에게 관직을 내리려 하는 것이나 칠정산을 만드는 것, 연분 9등법을 제정하는 것, 4군 6진 개척 등인데, 이 가운데 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그 누구의 지지도 받지 못하다가 감성적으로 해결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12]
왕씨성을 가진 고려 왕족 세력은 이미 태조 때 철저한 숙청을 당했기 때문에 이후 두 번 다시는 고려 부활과 같은 움직임을 일으키지 못했다.
[13]
애초에 금난전권이 세종 때가 아니라
정조 때에 나오는 이야기라는 점을 떠올려보자. 또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자면 화폐가 없으면 안 되는데,
상평통보가 발행되기 시작한 게 언제였더라?
[14]
아예 신하가 왕하고 맞먹어버리는 모습들을 보여주는데 이는 명백한 역사왜곡이다. 같은 작가의 후속작인
비밀의 문에서는 왕과 신하가 대놓고 야자타임을 시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5]
실제로 제왕학의 교과서라고 할 만한 책은
정관정요다.
[16]
조선인 여성은 유배 내지 사형이었으며, 일본인 남성은 대마도로 돌려보내 대마도주가 처형토록 했으나 이쪽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유교적 관점에서 간통을 중죄로 간주했던데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을 경계하게 된 상황에서 민간인끼리 사사로이 만나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던 반면(같은 맥락에서 왜관을 감독하는 관리의 입회 없이 하는 밀무역도 엄금되었다), 일본에서 성매매는 드문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7]
가장 단적으로 보이는 게 32화인데, 자기가 세자 자리까지 내놓을 기세로 싸고 돌던 외척 민무휼과 민무회가 사사당한 뒤에 반성 한 점도 없이 '나한테 반대하는 놈은 다 간신임. 간신이 어떻게 숙청되는지 똑똑히 봤지?'라고 한다. 언제는 충신이라며? 게다가 이후에는 여진을 정벌하고 국경을 넓히겠다며 수천명의 중앙군을 꼼수를 써서 멋대로 함경도에 이끌고 가버리려 한다.
[18]
개차반처럼 광기있게 놀아제끼는 모습은 오히려
용의 눈물이 훨씬 자세하게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의 양녕은 덕이 아닌 힘으로 이루어진 조선의 역사를 어려서부터 보아 온 나머지 자신도 왕이 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회의감을 느끼고, 그 결과 잡인들과 기방에 드나들기 시작하더니 태조의 제를 지내러 절에 보내졌을 때 술과 고기를 즐기고 상여놀이를 한바탕 벌이기도 한다. 원경왕후와 세자빈이 양녕의 정신을 차리게 한답시고 대궐에서 굿판을 벌이자 여기에 뛰어들어 신나게 깽판을 치며 굿판을 망치기도 하며, 급기야는 재상을 지낸 사람의 첩을 빼앗기도 한다. 폐세자가 된 뒤에도 달라지지 않아서 아예 대놓고 당당하게 기방 출입을 하며, 거지 옷을 기꺼이 입고 거지들과 어울리면서 노자도 없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기도 한다. 다만 본작에서의 양녕은 왕위에 올라도 태종의 뒤를 이어 훌륭하게 나라를 이끌 수 있었음에도 훗날의 왕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던지고자 그러는 것으로 그려지는, 야사의 해석을 따르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19]
이런 모습 역시
용의 눈물에 나왔다. 태조에게서 그가 여진족이나 왜구를 상대할 때 쓰던 활을 선물로 받으면서 활솜씨를 보여 달라는 청을 받아들여 그 앞에서 백발백중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이며, 표창을 양 손으로 동시에 던져 까마귀 두 마리를 한꺼번에 떨어뜨리는 장면도 있다. 다만 이런 장면들은 "양녕은 원래 왕의 자질이 있었으나~" 를 부각시키는 정도로만 사용되었지, 양녕이 전장에 나아가는 모습은 물론이고 호전적인 성격으로 그려지지도 않았다.
[20]
그나마 작중에 사병이 직접 나오지는 않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죽임을 당한다는 정도. 다만 가상 인물이자 노비 시절 장영실의 연인으로 나오는 다연의 아버지 한영로가 장영실을 처벌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에서 창을 든 군사들이 도열해 있는데 아무리 봐도 사병이다.
[21]
가령 강상인이 죽음을 마다하지 않은 것을 동래 왜관에 사는 일본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설정했는데,
실록을 뒤져보면 군권 이야기만 나오지 왜관의 왜 자도 언급이 없다.
[22]
대마도 정벌 부분에서 윤회가 아주 대놓고 깐다.
[23]
거의 매 화마다 관료들이나 고려 부흥 세력이나 일반 백성들의 입에서 '폭군' 이니 '폭정' 이니 '압제' 니 '통치력 부재' 니 하는 말들이 나오는 수준인데, 정말로 이랬다면 태종의 뒤를 잇는 국왕이 세종이 아니라 고려 왕이었을 것이다.
[24]
용의 눈물에서의 태종은 카리스마로 누를 때와 그러지 않을때가 잘 구분되어 있는 편이다. 정책을 집행할 때는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용의 눈물은 역대 그 어느 사극보다 국무회의 장면이 많이, 그리고 상세하게 나오는 작품이다.) 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며 공신숙청 등 뭔가 큰 일을 벌릴때는 밑밥 깔기부터 시작해 판을 철저하게 짜놓고 뚝심있게 추진하는 모습을 보인다. 또 소리 한번 안지르고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노회한 책략가의 면모도 잘 나타난다.
[25]
애초에 태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뒤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이유는 권신들이 함부로 세종을 꼭두각시로 만들지 못하게 막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심온을 숙청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는 오히려 태종 본인이 신하들을 동원해 세종을 견제하며 결국 상왕 태종의 지지로 힘을 얻은 조말생은 아예 권력의 기반이었던 태종 본인을 통수칠 정도로 과하게 성장하여 도리여 세종 치세에 왕권을 위협하는 정적이 된다. 이와 같은 묘사는 사실상 태종의 업적과 생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26]
다만 이것도 불교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자는 것이었지, 본작에서 나오는 것처럼 아주 씨를 말리자는 것은 아니다.
[27]
월인천강지곡 자체가 수양대군이 세종대에 지은
석보상절에서 출발했다.
[28]
더욱이 우스운 게 극중의 태종조차 세종이 사찰로 행차했다는 말을 듣고 혀를 차는데,
실록을 보면 태조가 숨을 거둘 무렵 禮가 아니기는 하나 승려들을 불러모아 기도를 드리고 싶다고 말하고 향을 피우고 팔뚝을 지지기까지 한 사람이 태종 본인이었다.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비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을 것이라는 황희의 진언은 덤. 이 대목은
용의 눈물에서 아주 충실히 고증되어 나온다.
[29]
이 경우 군신관계에 대한 묘사를 마치 현대 정치인들이 국무총리나 대통령을 대하는 태도와 비슷하게 그린 것도,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을 똥군기에 백성들 죽이는 정책으로 묘사한 것도 어느 정도 맞아떨어지게 된다.
[30]
더욱이 극중 충녕대군의 귀양 사유는 조선의 왕자가 조선 왕실을 부정하는 발언을 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서 귀양에 처해진 것인데, 더 골 때리는 것은 그 발언이라는 게 조선 왕실이 고려 왕족들에게 충분한 사죄를 하라는 발언이라는 것. 작가가 주인공이 15세기의 군주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작가 개인의 이상적 지도자를 투영하여 그려낸 사례 중 하나다.
[31]
이것은 조선 뿐 아니라 세계의 수많은 문화권에서 볼 수 있다.
[32]
장영실 외에 구체적인 예를 하나만 들면, 중종 때의 정막개라는 인물이 있다. 그는 역적 모의를 사전에 고발한 공을 인정받아 정 3품 상호군에 제수되었는데, 장영실도 대호군까지는 올랐지만 상호군에 임명되지는 못했다. 다만 반란을 고변했다는 이유로 고위직을 받아서는 앞으로 거짓으로 고변하는 사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제기된데다 정막개 자신의 성격이 영 개차반이라 나중에 관직을 박탈당하긴 했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건 "천것에게 고위직을 주면 안 됩니다" 가 아니라 "역적 모의를 고변한 공으로 고위직에 앉혀서는 앞으로 비슷한 사례가 또 있을 수 있습니다" 였다는 것. 다시 말해 천민이라도 공을 세우면 고위직에 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 것이다.
[33]
덧붙여 관직에 임명된 직후의 장영실이 관상감 관료들이나 천체관측도구를 제작하는 목수들로부터 인정받는 과정은 대본 작가가 이미 썼던 '불멸의 이순신' 에 등장했던 가상인물 조수창이 조선소 지휘장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과 거의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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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은둔했던 인물이 드문 것도 아닌데, 당장 대표적인 예만 들어도 이색이나 길재, 원천석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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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히 '내 생각에 그랬을 것 같다' 라는 식이라면, '내 생각에 세종은 여성이었을 것 같다. 근거는 없지만 내 생각에 그랬을 것 같다' 해 버려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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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만리라고 하면 무엇보다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한데, 이에 대해 세종은 격분하기는 했지만 하루 동안 옥에 가둔 뒤 풀어주었다. 즉 최만리가 세종 폐위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극렬한 반대파였다면 상소를 얼마든지 다시 올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두 번째 상소는 올라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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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도 그럴 게 최해산은 화약과 화포 기술자였고, 장영실은 천문기기, 시계, 활자 등을 발명했다. 즉 두 사람의 행적을 철저히 사실대로 그렸다면 서로 엮일 이유가 없으며, 실제로 이후에 방영된 드라마
장영실에 최해산은 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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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사행록까지 갈 것도 없이, 한글의 원이름이 '훈민정음' 인가, '훈민정어'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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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왕족도 아니고 정상급 관료들로 구성되지도 않았던 통신사행단이 수백 명 규모였는데, 명 같은 대국과 전쟁이 임박한 상황인데 수백 명의 인원을 차출할 여유가 없었을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설령 모은다 한들 왕족들의 안위를 보장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밖에 왕비가 사행단에 속했다는 것도 문제가 되는데, 국왕의 적통 왕자도 아니고 서자를 파견할지언정 왕비를 외국으로 보냈던 예는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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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은 계유정난은 물론 세조 8년인 1462년에 졸했으며, 효령은 세조에 예종 지나서 성종 17년(1486)까지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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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사행록에도 당시 조선에 '平調興' 이라고 알려졌던 일본인 柳川調興을 만나고 나서 柳川이 성씨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調興의 별호(別號)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실록도 예외가 아니라 '
豊臣秀吉' 이 '平秀吉' 로 기록되거나 '
小西行長' 이 '平行長' 으로 바뀌어 있으며, 도요토미의 경우 실록에 '豊臣秀吉' 이라고 기록된 기사는 세 건에 불과한 반면 '平秀吉' 으로 나오는 기사는 85건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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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인 1607년에 파견되었던 첫 번째 통신사(회답겸쇄환사)의
사행록을 보면, 일본 측이 조선의 국서에 대해 답서를 보낼 때 명의 연호를 쓸 것이냐 일본의 연호를 쓸 것이냐를 두고 잠시 고민하다가 정미년이라고만 썼다는 기록이 있다. 이 말인즉 일본 내에서 통용되던 문서에는 일본 연호를 썼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