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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4 08:03:59

니콜라 바후셰

파일:니콜라 바후셰.webp
성명 니콜라 바후셰
Nicolas Béhuchet
생몰년도 1288년 ~ 1340년 6월 24일
출생지 프랑스 왕국 르망
사망지 플란데런 백국 슬로이스 항구 앞바다
배우자 알리에노르 드 드뢰-보사르트
직위 프랑스 제독, 프랑스 왕실 재무관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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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프랑스 해군 제독.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해안지대를 연이어 습격했으나 슬로이스 해전에서 패사했다.

2. 생애

1288년경 르망에서 출생했다. 그는 부르주아 출신으로,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의 4번째 아들인 샤를 드 발루아의 금융 대리인을 역임했다. 1328년 필리프 6세로부터 "물과 숲의 주인"으로 지명되었으며, 같은 해에 플란데런 백국의 수비대 조직을 수행했다. 이후 뮤지, 라루페 및 에스크리뇰의 영주가 되었으며, 왕국을 떠나는 물품에 대해 파운드 당 4데니어의 관세를 매기고 관리하는 회계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1331년 왕실 재무관으로 발탁되어 몇년간 프랑스 왕실의 재정 관리를 맡았다. 그는 이 시기에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의 후손인 알리에노르 드 드뢰-보사르트와 결혼하면서 귀족으로 승격했다.

1338년 2월,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1337년 11월에 월터 매니가 이끄는 3,500명의 병사를 프랑스에 예속된 플란데런 백국의 카잔트 섬에 파견해 카잔트 전투에서 현지군을 격파한 것에 보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프랑스 제독으로 발탁되었고, 3월 24일 소형 갤리선으로 구성된 함대를 이끌고 칼레에서 영국해협을 건너 포츠머스에 접근했다. 그들은 잉글랜드 국기를 걸어서 잉글랜드인들을 속여 포츠머스에 상륙한 뒤 배에서 내려서 눈에 띄는 사람을 모조리 죽이고 교회와 구호소를 제외한 모든 건물을 약탈하고 불태웠다. 이후 채널 제도에 상륙하여 건지 마을에서도 약탈을 자행했다. 미처 프랑스와의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잉글랜드군은 이에 대해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잉글랜드 당국과 국민들은 포츠머스 습격 사건에 심대한 충격을 받았고, 잉글랜드 남부 해안선을 따라 방어 요새를 설치하고 군대 및 함대를 배치하는 조치가 잇따라 내려졌다. 이로 인해 프랑스에 상륙할 병력 모집은 차질을 빛었다. 심지어 영국 남부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데본과 콘월 영주들도 프랑스군이 여기까지 들이닥칠 수 있으니 수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면서 프랑스로 원정갈 병사들을 지원할 물자와 자금을 달라는 왕의 요구를 거부했다. 이후 노르망디, 피카디, 브류타뉴의 영주 및 상인들이 각자 전함을 사들여서 잉글랜드 해안을 종종 습격해 약탈을 자행하고 포로들을 돌려주는 대가로 몸값을 뜯어내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프랑스군의 공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338년 5월, 필리프 6세가 제노바와 카스티야에서 고용한 갤리선 80척이 칼레에 이르렀다. 바후셰는 이들을 이끌고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잉글랜드 상선들을 탈취했다. 그 해 9월, 프랑스 원수 로베르 8세 베르트랑 드 브릭퀘벡이 이끄는 프랑스-제노바 연합 함대는 먼저 채널 제도를 공격했다. 사크 섬은 전투 없이 함락되었고, 건지 섬은 제놔 선박 2척이 침몰한 짧은 전투 끝에 함락된 뒤 수비대 전원이 처형되었다.

1338년 9월 23일, 니콜라 바후셰는 또다른 프랑스 제독 위그 키에레와 함께 전함 48척을 이끌고 양모를 팔기 위해 플란데런의 아르네뮤이덴 항구에 접근하던 잉글랜드 상선 5척을 습격했다.( 아르네뮤이덴 해전) 잉글랜드인들이 대포를 처음으로 해전에서 사용하는 등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끝내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니콜라 바후셰는 이 해전에서 900명 이상 잃은 것에 단단히 화가 나 존 킹스턴 선장을 비롯한 잉글랜드 선원 전원을 몰살하고 상선 5척과 대포 및 화물을 포획했다.

1338년 10월 5일,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가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수천 명의 프랑스, 노르만, 제노바, 카스티야 수병들을 사우스햄튼 항구 인근에 상륙시킨 뒤 육지와 해상에서 동시에 사우샘프턴을 공격했다. 대부분의 마을 민병대와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시골로 도망쳤고, 일부 수비대는 끝까지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사우샘프턴 전역이 파괴되고 수천 파운드 상당의 물품과 선박, 포로들이 프랑스로 끌려갔다. 다음날 뒤늦게 조직된 민병대가 마을 외곽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벌이자, 프랑스군은 함대에 몸을 싣고 프랑스로 귀환했다. 이 공격으로 인해 사우샘프턴의 상업은 1년간 마비되었다. 이후에도 두 사람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는 영국해협을 수시로 들락거리면서 영국과 보르도 사이의 해상 보급을 수행하고자 식량을 수송하던 영국 선박들을 나포했다. 이로 인해 필리프 6세를 상대로 반기를 일으켰던 가스코뉴 주민들의 저항 의지는 갈수록 약해졌고, 1339년 7월 보르도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이 프랑스군에 넘어갔다.

에드워드 3세는 잉글랜드 남부 해안 지대를 다스리는 백작들에게 민병대를 대폭 강화해 프랑스 함대가 또다시 쳐들어오는 것을 막게 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처벌하겠다고 위협했다. 이에 백작들은 최선을 다해 수비에 임했고, 프랑스 함대의 사우샘프턴과 플리머스, 저지 섬에 대한 재침은 격퇴되었다. 다만 헤이스팅스가 급습당해 파괴되고 그곳에 살던 어선 몇 척이 나포되고 살해당한 어민들의 시신이 칼레 거리에서 전시되었다. 1339년 여름, 몰리 남작 로버트 몰리가 이끄는 잉글랜드와 플란데런 함대가 반격에 착수했다. 그들은 프랑스 해안에 상륙한 뒤 올트와 르 트레포르 마을을 파괴하고 내륙으로 좀더 들어가면서 여러 마을을 황폐화했다. 뒤이어 볼로뉴 항구에 있는 프랑스 함대를 기습해 파괴했다. 한편 필리프 6세에게 반기를 든 플란데런 함대도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그들은 그 해 9월에 디에프 시를 파괴하고 약탈을 자행했다.

1340년, 필리프 6세는 에드워드 3세가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항구인 슬로이스를 공략한 뒤 플란데런 백국에 들어가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에게 이를 중도에서 가로막아 궤멸시킨 뒤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끝장을 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프랑스 전함 213척과 2만에 달하는 병력을 슬로이스 항구에 집결해, 장차 에드워드 3세의 해군을 분쇄하고 잉글랜드에 상륙할 준비를 갖췄다. 에드워드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이들이 잉글랜드로 쳐들어오기 전에 자신이 선제공격을 가해야겠다고 판단하고, 1340년 6월 22일 120~150척 가량의 함대를 이끌고 슬로이스 항구로 진격했다.

위그 키에레와 니콜라 바후셰는 에드워드 왕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함대를 끌고 왔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화들짝 놀랐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한 끝에 함대를 3개 대열로 나란히 배치하고 작은 나무 발코니인 브레타슈(bretasches)로 배들을 묶어놓은 채 3마일 너비의 항구 입구를 틀어막고 버티기로 했다. 이에 일찍이 지중해에서 무슬림을 상대로 해적 행위를 오래도록 벌였으며, 당시 프랑스 해군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피에트로 바르바네로가 만류했다.
"영주님들, 부디 제 말을 믿으십시오. 함대 전체가 바다로 이동해야 합니다. 여기에 가만히 있는다면 바람, 태양, 그리고 물의 흐름을 너무 많이 받게 되어 배를 최소한으로만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적에게 고스란히 갇히고 말 겁니다."

그러나 바후셰와 키에레는 그를 단순한 평민이자 해적이라며 무시하고 자신들의 생각대로 밀어붙였다. 바르바네로는 자신을 무시한 이들에게 격분해 전투 전날에 휘하 함대와 함께 이탈했다. 이후 1340년 6월 24일에 벌어진 슬로이스 해전에서 프항스 해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위그 키에레는 중상을 입고 체포된 뒤 에드워드 3세에게 끌려가기 전에 목이 베어져 배 밖으로 던져졌고, 니콜라 바후셰는 에드워드 3세 앞으로 끌려와서 자비를 호소했지만, 지난날 자신이 아끼던 크리스토퍼호를 빼앗은 데다 잉글랜드 남부 해안을 수시로 공격해 막대한 피해를 안긴 그를 용서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는 가차없이 교수형을 선고했다. 그 후 바후셰의 유해는 에드워드 왕이 탑승한 토마스 호의 돛대에 매달렸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