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 멜버른 풋볼 클럽 | |
North Melbourne Football Club | |
정식 명칭 | North Melbourne Football Club |
별칭 | 캥거루즈 (Kangaroos) |
팀컬러 | 파란색 ■ 흰색□ |
창단 | 1869년 |
연고지 |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 시 노스 멜버른 |
홈구장 |
도클랜즈 스타디움(Docklands Stadium) 블런드스톤 아레나(Blundstone Arena) [1] |
연습구장 | 아덴 스트리트 오벌(Arden Street Oval) [2] |
회장 | 밴 버클리(Ben Buckley) |
감독 | 리스 쇼(Rhyce Shaw) |
주장 | 잭 지벨(Jack Ziebell) |
공식 홈 페이지 와 SNS | http://www.nmfc.com.au |
기록 | |
우승 (4회) |
1975, 1977, 1996, 1999 |
최다 출전 | 브렌트 하비(Brent Harvey) - 432 경기 (리그 최다) |
최다 득점 | 웨인 케어리(Wayne Carey) - 671 골 |
So join in the chorus and sing it one and all,
Join in the chorus, North Melbourne's on the ball.
Good old North Melbourne, they're champions you'll agree,
North Melbourne is the team that plays to win for you and me.
Join in the chorus, North Melbourne's on the ball.
Good old North Melbourne, they're champions you'll agree,
North Melbourne is the team that plays to win for you and me.
1. 개요
오스트레일리안 풋볼의 AFL 팀. 멜번 시 북부근교 노스 멜번에 위치한 클럽.원래 별명은 신보너(Shinboners)였으나[4] 1950년대에 캥거루즈로 개명.
2. 역사
2.1. 창단과 수난
1869년 처음으로 경기한것으로 알려져 있다.[5] 노스의 창단은 성 마리아 성공회 교회의 크리켓 클럽이랑 관련되는 설이 있는데, 이유는 팀 컬러가 청색과 백색이였는데, 이는 노스의 현 컬러이기 때문. 창단했으나 문제는 성인 팀이 없었고, 몇몇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클럽들이 참가하는 VFA는 이후에야 호썸 크리켓 클럽이랑 결합하면서 아덴 스트리트 오벌로 옮긴 다음 1886년에 참가하게 되었다.VFL이 창단되기 전 시즌의 순위 13위중 6위였으나, 여러 이유들이 붙잡게 되는데, 이는 에센던과 같은 지역[6]이였고, 게다가 노스 멜번은 훌리건 이미지가 있었고, 또한 우승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초청이 거부되었다. 그러나 강호들이 VFL으로 옮기면서 노스 멜번은 패디 누난(Paddy Noonan) 아래 VFA의 강호가 되어 1903년부터 1918년 사이 6번 우승을 경험한다.
그러나 계속 VFL로 이전하기 원했던 노스 멜번은 주변의 웨스트 멜번이랑 결합하여 VFL에 참가하려고 시전했지만 정작 VFL은 리치몬드와 유니버시티를 받아드리고 게다가 이를 알아낸 VFA는 결합한 팀을 해산해버렸고, 1908년에 재창단된다.
VFA에서 승승장구를 이루던 노스 멜번은 VFL 참가를 위해 에센던과 결합을 시도했으나 시민들이 반대하여 계획은 무산되었다. 대신 에센던 협회랑 결합했는데, 그로 인해 1921년 시즌의 반을 쉬게 되었다.
4년후에야 드디어 계속 시도하던 VFL 신청과 참가가 허락되었고, 같은 해 참가한 풋스크레이와 호손과 함께 VFL에서 뛰게 된다. 첫 시즌인 1925년에 첫 경기에 질롱을 잡았지만[7] 일어났지만, 풋스크레이와 호손보다는 순위는 높았지만 뒤에서 3등으로 마쳤다. 그러나 실력차 탓인지 승리를 얻어내는데 실패하였고 오랫동안 하위권였다가 20년쯤 후에야 처음으로 승률이 반 넘었고 다음 시즌 1945년에야 처음으로 파이널에 진출하게 된다.
1949년에는 처음으로 선두로 시즌을 마쳤으나 파이널 시리즈에서 탈락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결승에 진출했으나 이웃이자 당대 강호였던 에센던에게 패배하였다.
그후 노스 멜번은 30여년동안 파이널 진출을 2번밖에 못했다. 당시 선수가 있다면 앨런 아일렛과 노엘 티스데일. 그 사이에 세인트 킬다가 드디어 우승하면서, 같이 참가한 풋스크레이와 호손을 포함한 모든 팀들은 우승을 경험했는데 노스만이 우승을 못한 팀이였다.
2.2. 1번째 전성기
60년대 후반에 앨런 아일렛의 지휘 아래 변화가 시작되었다. 특히 에센던에서 배리 데이비스, 질롱의 골게터 도그 웨이드랑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 리그 WAFL의 퍼스[8]에서 날고 있던 배리 케이블을 대려오게 된다.
그리고 1973년에 레전드 감독 론 바라시[9]를 데려오게 된다. 바라시는 퍼스에서 다시 케이블을 불러오고 사우스 오스트레일리아 리그 SANFL 우드빌[10]의 골게터이자 유명 선수 맬컴 블라이트를 영입. 또한 2번의 브라운로 메달 수상자 키스 그레이그까지 있던 노스는 1974년에 드디어 우승할 기회를 노리지만 당대 최강이였던 리치몬드한테 패배한다. 다음 시즌은 한 순위 낮았지만, 꾸준히 결승으로 다시 진출했고 이번 상대는 1위이자 신흥강호 호손. 첫 파이널 시리즈 경기에서 패했지만, 결승에서는 다른 결과와 호손은 압승하여 드디어 우승.. VFL 진출 거부 등 여러 수난을 겪었던 노스 멜번이 정상에 올랐다.'''
그후 노스는 3번의 결승에 진출하였고 다음해 다시 호손과 맞붙었으나, 이번에는 패배하고 말았다. 호손은 고환암을 겪고 있던 주장 피터 크리민스를 위해 싸워 이겨 그를 위해 바쳤으나 우승한지 3일 후 크리민스는 만 28세의 나이로 요절.
1977년의 상대는 콜링우드. 콜링우드는 지난해 최하위였으나 그 해 선두로 시즌을 마쳤고, 리치몬드를 최정상에 올린 헤이피 감독 아래 도약하던 팀이였다. 결승전에 붙었을 때 3쿼터 때 점수차가 많이 났기 때문에 경기는 콜링우드쪽으로 기울었으나 마지막 쿼터에 역전에 성공한다! 그러나 막판에 동점골을 내줘 무승부. 게다가 다음주에 재경기를 한다는게 문제였지만, 재경기는 노스 멜번에게 한수였고 처음부터 압도한 노스 멜번은 또 한번 우승하게 된다.
다음해에는 선두로 시즌을 끝내 결승전에서는 다시 호손이랑 붙었지만 전해 부임한 파킨 감독 아래 또 호손한테 지고 말았다. 그 후 노스 멜번은 기세가 떨어졌고, 다른 임팩트를 못남긴 바라시는 클럽을 떠나게 된다.
2.3. 리빌딩
우승은 못했지만 노스는 결과는 꾸준히 내고 있었다. 맬컴 블라이트는 당대 최고의 골키커 중 하나였고 1982년 득점왕 수상과 다음해에는 로스 글레네딩이 브라운로를 수상하는 등 1983년시즌은 1위로 끝냈으나 파이널에서 부진하여 결승 진출에 실패하였다. 다음 노스는 레전드 감독 존 케네디 감독을 불러왔고, 어보리진 크라크어 형제을 영입하였고 팬들에서 인기스타로 올랐지만 결과는 시원한 편이였다.노스는 또한 금요일 저녁경기를 고안하여 실행했는데, 1985년부터 모든 일정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는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다.
1989년에 젊은 골키커 존 롱마이어와 웨인 케어리가 데뷔해 새로운 감독이자 전 선수 웨인 쉬멜부쉬 아래 롱마이어는 득점왕 수상. 그러나 다음 시즌부터 결과가 떨어지자 1993년 초에 쉬멜부쉬를 경질하고 데니스 페이건을 감독으로 데러오게 된다. 먼저 페이건은 젊던 케이리를 주장으로 임명하여 팀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2.4. 케어리와 페이건 아래 2번째 전성기
캐어리의 포스는 말그대로 그의 별명이였던 왕이였다. 압도적인 실력으로 그에게 간접할 수 있던 선수는 사실상 없었다[11] 물론 노스 멜번도 글렌 아쳐, 데이빗 킹, 코리 맥커낸, 피터 벨[12][13], 아담 심슨[14], 믹 마틴과 앤토니 스티븐즈를 보유했지만, 캐어리는 존재감 자체로 팀을 이끌었기 때문. 그래서 캐어리가 없으면 노스는 없다라는 말이 많았다. 그래서 캐어리와 페이건 아래의 성적은 7년동안 2번의 우승과 준결승에 꾸준히 참전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캐어리는 평론가 사이에 최고의 선수 중 손가락 안에는 꼭 들 정도.
1993년에는 3위로 마쳤으나 전년 우승팀 웨스트 코스트 이글즈한테 탈락. 다음해에는 1994년에는 처음으로 8강 진출 파이널 시스템 아래 또다시 3위로 마쳤다. 첫 상대는 호손으로 처음으로 실행한 파이널 경기의 연장전에서 승리하였고 가장 순위가 높은 승자로 프릴림 파이널로 진출. 그러나 신 개리 애블렛에게 골을 내주며 결승행을 물넘어갔다. 다음해에는 6위로 마쳤지만, 3위였지만 오랫동안 파이널 미경험이였던 리치몬드 상대로 승리하고 전해 우승팀 웨스트 코스트을 이겨 다시 4강에 들었으나 금년 최강팀 칼튼에게 격파당한다.
1996년에는 1위 경쟁하다가 시드니 스완즈 아래 2위로 마감. 먼저 노스는 질롱을 격파하고 실력이 확실히 올라간 브리즈번 베어즈[15]를 이겨 시드니를 상대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성적이 안좋았던 시드니 스완즈였지만, 토니 롯켓, 폴 루스[16]와 폴 켈리를 보유하던 강팀이였다. 먼저 초반에는 밀렸지만 그후 노스는 승승장구하면서, 19년만에 우승하였다.
게다가 100주년 기념으로 황금 우승컵을 수상.
1997년은 아쉽게도 7위로 마감했으나 꾸준히 이겨 4강에 진출. 그러나 1위 세인트 킬다에게 패배.
1998년에는 마지막 경기에서 웨스턴 불독스를 상대로 이기면서 오랜만에 1위로 마감하고 결승에 진출. 상대는 애들레이드 크로우즈. 전 선수 맬컴 블라이트 지휘 아래 작년 우승팀이였으나, 전력은 노스에게 유리하였다. 그러나 열어보니 부진하였고 특히 케어리는 케이븐에게 지워져 안타깝께 준우승으로 마쳤다.
1999년에는 캥거루즈로 개명하였다. 필드 위에는 강호였지만, 밖에서는 다른 이야기였고 재정상 노스는 타 팀들에 비하면 약한 편이였다. 사실상 연고지 멜번의 홈경기뿐만 아니라 캔버라에서도 홈경기를 시전하였다. 그후 8년동안 떠돌이 신세였고, 반대운동으로 다시 완전히 노스 멜번에 돌아왔다. 재정과 달리 도약한 에센던 아래 2위였으나 에센던이 4강전에서 6위 칼튼을 상대로 삽질하면서 탈락하자 노스는 이 기회로 또 다시 우승.
2000년에는 약간 아래였던 4등했으나, 2001년에는 오랜만에 파이널에서 탈락했다. 특히 에센던한테 경기 내 69점차로 이기다가 져버려 치명타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시즌 시작하는데 가장 큰 충격은...
2.5. 캥거루즈 시절
[17]케어리가 부주장 스티븐즈의 아내랑 불륜을 시전. 케어리는 할 수 없이 팀을 떠나게 되었다. 케어리는 실력만은 뛰어났지 사생활은 막장 한번 미국에서 입국 금지도 당하는 등...
케어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2002년에는 파이널 시리즈에 다시 올라왔으나 멜번에게 탈락. 그 시즌 이후로 페이건 감독도 떠나게 된다. 후임은 전 선수이자 1996년 우승팀에 속해있던 딘 레이들리.
다음 두 시즌은 겨우 8강 드는데 실패했고 다시 올라가긴 했으나 작년 우승팀이였지만 겨우 올라간 포트 애들레이드한테 탈락. 그 다음 시즌은 운동장 아덴 스트리트를 화재로 인해 잃어버리는 불운 아래 뒤에서 3위로 마감감. 다만 뒤에서 1,2순위했던 칼튼과 에센던이 워낙 막장이여서...
이듬해에는 첫 3경기를 지면서 다시 부진스러운 면모가 보일려 했지만 최종순위 4위로 마쳐 90년대 리즈시절 이후 오랜만에 4강으로 올라왔지만 먼저 그해 우승팀 질롱한테 먼저 크게 패하고 다음주 호손을 논란 사이에서 겨우 이기고 포트한테 지면서 마감. 그리고 아쳐로 이 시즌 이후 은퇴. 다음 시즌은 7위로 끝나 시드니를 상대하지만 패배.
2.6. 브래드 스콧 지휘 초기
2009년 시즌 실망스러운 모습을 남기고 레이들리는 시즌 도중 팀을 떠나게 되고 전 팀메이트이자 부감독 크로커가 임시로 맏게 되었지만 제대로
승리를 못따면서 최종 순위는 13위. 다만 그해 1위로 마감한 세인트 킬다를 막판에 이겨서 체면은 챙겨 시즌을 마감하였으며 다음해부터 브래드 스콧(Brad Scott)이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스콧 아래 첫 두 시즌은 내내 8강에 못 들어갔지만 지난 시즌보다 개선스럽지만 실망하다 못해 둘다 9위로 마감.
그 다음해 2012년에는 초반의 부진을 겪고 8강에 들어가지만 웨스트 코스트 원정에서 대패를 당하면서 후반의 활약에 비해 실망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주면서 시즌을 마감하였다.
2.7. 약진에서 추락, 활약과 실망
2013년 시즌에는 지난 시즌처럼 괜찮은 모습을 보여줄려 했지만 2골 이내 점수차로 패배한 경기 때문에 유난 아래 파이널 진출에 다시 실패하였다. 특히 시즌 중반 경기 이후 골로 인해 패배한 웨스트 코스트 원정과 5골 점수차를 날려버려 1점으로 진 애들레이드 전이 못을 박아벼렸다.2014년에는 두 퍼스원정, 그 해 결승팀 시드니와 호손을 이기는 활약을 보여줬지만 다른 중요한 경기를 못이겨서 8강 탈락 위기에 있었지마느 마지막 4경기를 이겨 시즌을 6위로 마감.
파이널 첫 상대는 동네 라이벌이자 첫 라운드에서 패배를 입힌 에센던. 한때 39점으로 지고 있다가 막판에 역전을 성공하면서 6강으로 진출.
다음 상대는 쌍둥이 형이 지휘하는 강호 질롱을 상대하게 되는데 기적적으로 승리를 얻게 되면서 사상 3번째로 4위 밖으로부터 준결승으로 진출하게 되었지만 시즌 1위이자 초반에 승리했던 시드니를 상대하였지만 내내 빌리며 최종 4위로 마감하였다.
2015년에는 16라운드까지 8강에 못들면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후반에 좋은 모습으로 분위기를 반전시켰지만 마지막 2경기를 패하면서 시즌 8위로 마감했지만 리치몬드와 시드니를 연속으로 승리하면서 사상 처음으로 8위에서 준결승으로 오르는 활약을 보여줬지만 웨스트 코스트한테 아쉽게 패하면서 결승 진출은 실패. 그러나 지난 2시즌동안 좋은 활약을 보여준것때문에 팬들의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그래서 다음 시즌 첫 9경기 연승하면서 중반까지 1위로 있다가 2경기밖에 승리 못하면서 전 시즌 반대의 활약을 보여주면서 다시 8위로 마감하였다.
후반의 실망스러운 경기력과는 달리 브렌트 하비는 리그 최다 출전 (427경기)이라는 역사적인 기록을 갱신하면서 노익장은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파이널 시리즈 전 하비, 피트리, 피리토와 달 산토 등의 노장들을 세대교체 한다면서 계약을 해지해버렸다. 물론 세대교체는 팀의 젊은 선수들을 위하면 필수지만, 후반 부진이라는 최악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면서 클럽과 스콧을 까이게 되었으며, 8강 첫주 애들레이드 원정에서도 깨지면서 파이널 시리즈에서 탈락하게 된다.
정확한 이유는 없지만, 인기많던 노장들의 계약해지로 팬들의 반발이라는 상황이 겹쳐, 2017년 노스 멜버른은 4년 전 패배의 데쟈부와 지난 시즌 중반부 이후로 부터 계속된 부진까지 겹쳐 스콧 부임 전으로 성적은 도로아미타불이 되어 버리면서 겨우 마지막 경기에 승리하면서 시즌 15위라는 처참한 모습을 보여줬다.
3. 상징
4. 문화
4.1. 유니폼
5. 라이벌
6. 유명 선수
7. 기타
[1]
벨러리브 오벌(Bellerive Oval)로도 불린다. 또한 이곳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빅 배시 리그(BBL)의 T20 크리켓 프로팀인
호바트 허리케인즈와 경기장을 공유하고 있다.
[2]
노스 멜번의 원 홈구장.
[3]
AFL의 원조 클럽들의 테마송은 자작이 아니기 때문에 원곡이 있다. 원곡은 A Wee Deoch an Doris.
[4]
아직도 노스 멜번을 가리킬 때 쓰인다. 신보너 정신(Shinboner Spirit)이던가. 신보너라는 뜻은 도살장에서 일하던 선수들이 고기 정강뼈에 팀 컬러를 칠한 설에서 유래.
[5]
첫 이름인 호썸은 노스 멜번 근교의 구명.
[6]
특히
중산층
개신교계였던 에센던한테 유리했다.
[7]
그 해
질롱은 우승하였다.
[8]
별명은 악마들(Demons). 지금은 동네북이지만, 6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팀.
[9]
호식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임팩트를 끼친 선수이자 감독. 지역의 선호하는 코드를 가르는 바라시 라인도 이 분께서 유래.
[10]
별명은 워리어즈(Warriors). 나중에 웨스트 토렌스랑 결합하였다.
[11]
캐어리의 라이벌이였던 글렌 쟈코비치야말로 케어리를 막을수 있던 선수.
[12]
한국에서 태어난 선수이고 커리어 자체도 유명하지만...호주로 입양됐기 때문에 딱 그런 정체감은 없다.
[13]
벨은
프리맨틀 다커즈로 데뷔했으나 방출당해 노스로 오게 된것이다.
[14]
현재
웨스트 코스트 이글즈의 감독
[15]
참고로 브리지번의 첫 상대는 노스 멜번. 이게 브리즈번 베어즈의 명의로 뛴 마지막 경기였고, 핏즈로이랑 결합해 라이온즈로 개명. 그것도 두 경기를 MCG에서.
[16]
현
멜번 감독.
[17]
케어리가
애들레이드 크로우즈로 이적하면서 2003년 캥거루즈와의 경기. 일명 불륜더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