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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6:59:41

나카센다이의 난

中先代の乱

1. 개요2. 내용3. 여담

1. 개요

겐무 2년(1335년) 7월, 호조 다카토키의 차남 호조 도키유키가 어내인(御内人)[1] 스와 요리시게 등에게 옹립되어 가마쿠라 막부 재흥을 위해 거병한 반란.

호조 도키유키는 겨우 10세의 소년이었지만 아시카가 다다요시를 꺾고, 가마쿠라 탈환에 성공했다. 선대(호조씨)와 후대(아시카가씨) 사이에 있었고, 일시적으로 가마쿠라를 지배했기 때문에 나카센다이의 난이라고 불리고 있다. 또한 가마쿠라 지배가 20여일밖에 지속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카센다이라는 별명도 있다.

2. 내용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겐무 신정에 따라 가마쿠라에는 고다이고 덴노의 황자 나리요시 친왕을 장으로 다카우지의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가 집권하여 이를 보좌하는 형태의 가마쿠라 쇼군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겐무 정권은 무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호조 일족의 잔당 등은 각지에서 봉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호조씨가 수호를 맡고 있던 시나노도 그 중 하나로, 지쿠마가와 주변에서는 자주 봉기가 반복되어 아시카가의 세력인 시나노 슈고 오가사와라 사다무네등이 진압에 임하고 있었다.

겐무 2년(1335년) 6월에는, 가마쿠라 시대에 칸토 신지를 맡아, 호조씨와 연결되어 있던 공가귀족 사이온지 긴무네 등이 교토에 잠복하고 있던 호조 다카토키의 동생 호조 야스이에를 숨겨, 지묘인통의 고곤 상황을 옹립해 정권 전복을 기도한 음모가 발각된다. 킨무네 일당은 고다이고 천황의 암살에 실패하여 주살되었지만, 야스이에는 도망쳐 각지의 호조 잔당에 거병을 호소했다.

시나노에 잠복해 있던 호조 도키유키는 어내인 스와 요리시게와 시게노씨, 니시나씨 등에게 옹립되어 거병하였다. 도키유키의 시나노 거병에 응하여 호쿠리쿠에서는 호조 일족의 나고에 카네가 거병한다. 스와씨의 연이 계속되는 호시나 야사부로나 시노미야 사에몬타로, 세키야씨 등 도키유키는 아오누마 전투에서 후나야마 슈고관저를 습격했다. 이 사이에 스와씨, 시게노씨 등은 시나노 고쿠시 관저를 화공 습격해, 겐무 정권이 임명한 공가의 고쿠시 기요하라를 전사시킨다.

그런데 교토의 겐무 정권은 당초, 반란군이 도키유키를 가지고 있다는 정보를 파악하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교토에서는 반란군은 기소로에서 오와리국으로 빠져나와 최종적으로는 정권이 있는 교토로 향할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가마쿠라 쇼군부로의 연락이 늦어져, 그것이 후의 가마쿠라 함락으로 이어졌다고 보여지고 있다.

기세가 오른 때 반란군은 무사시국으로 들어가 가마쿠라를 향해 진군한다. 7월 20일경에 오나가하라에서 시부카와 요시스에, 이와마쓰 쓰네이에가 인솔하는 가마쿠라 쇼군부의 군대를, 고테시가하라에서 이마가와 노리미쓰의 군대를, 무사시부중에서 구원하러 달려온 시모노쿠니 슈고 고야마 히데토모의 군대를 무찌르고, 이것들을 전사 혹은 토사시켰다. 이어서, 이데노자와에서 가마쿠라에서 출진해 도키유키군을 요격한 아시카가 다다요시도 깨뜨린다. 다다요시는 다카우지의 아들인 어린 아시카가 요시미쓰나,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나리요시 친왕 등을 데리고 가마쿠라를 피한다.

가마쿠라에는 겐무 정권에서 실각한 고다이고 천황의 황자 모리요시 친왕이 유폐되어 있었지만, 다다요시는 가마쿠라를 떠날 때 몰래 가신인 후치노베 요시히로를 시켜 모리요시 친왕을 살해한다. 가마쿠라에 모리요시를 쇼군, 도키유키를 싯켄으로 하는 가마쿠라 막부가 재흥하여 겐무 정권에 대항하는 존재가 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7월 24일, 가마쿠라 쇼군부 측은 쓰루미에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지만, 사타케 요시나오 등이 전사, 다음 25일에 도키유키는 가마쿠라에 들어가 일시적으로 지배한다. 또한 도키유키는 도망치는 다다요시를 스루가국 데고시가와라에서 격파했다. 다다요시는 난의 보고를 교토에 전함과 동시에 나리라 친왕을 반환하고, 8월 2일에 미카와국 야하기에 거점을 마련했다.

도키유키의 침공이 알려진 겐무 정권에서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고다이고 천황에게 도키유키 토벌의 허가와 동시에 무가 정권의 설립에 필요한 총추포사와 정이대장군의 직책을 요청하지만, 고다이고 천황은 요청을 거부한다.

8월 2일 다카우지는 칙장을 받지 않은 채 출진하고,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를 따라 정동장군의 호를 부여한다. 다카우지는 다다요시와 합류하여 9일에 도오에국 하시모토, 12일에 고야의 나카야마에서 다카우지와 동도해 온 이마가와 요리쿠니의 손에 의해 나고에 다카쿠니 전사, 14일에 스루가국의 키요미세키 및 국아에서 스와 고지로 긴자 요리히데가 전사, 17일에 사가미국 하코네, 18일에 사가미국 사가미가와에서 다카우지는 요시쓰네기의 호조방에 유한을 가진 나카무라 쓰네나가가 사자분신의 역할을. 시세는 점차 열세가 되어 전선은 서서히 후퇴. 19일에는 사가미국 쓰지도에서 패배한 스와 요리시게가 가마쿠라 가쓰장수원에서 자결하고, 도키유키는 가마쿠라를 수성하는 것을 포기하고 20여일 만에 도망친다.

고다이고 천황은 다카우지에게 출진 허가는 내주지 않았지만, 8월 30일의 오야마 도모씨에 대한 시모노 고쿠시 겸 슈고에 대한 보임은 다카우지의 주청에 응한 것으로 생각되며, 또 늦었다고는 하지만 규슈의 오토모 사다아키에게 출진을 요구하는 윤지를 낸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다카우지와 천황의 방침에 큰 차이는 없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그런데 9월 27일 다카우지는 가마쿠라에서 난의 진압에 따른 무사에게 마음대로 은상을 분배하기 위해 소판하문을 발급하고 겐무 정권의 상락명령을 무시하는 등 겐무 정권에서 이반한다.

호조 도키유키를 따르는 무사들은 나고에씨와 같은 호조씨 일문도 있었지만, 대부분 스와 요리시게와 같은 어내인이었다. 이들 중에는 지바씨, 우쓰노미야씨, 미우라씨 등 관동 유력무가의 서류 출신자가 다수 포함되어 있어 결과적으로 관동무사가 다수 포함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사타케씨, 고야마씨 등 관동의 고케닌이 가마쿠라 쇼군부측에 가담하고, 게다가 이미 쇼군부에 출사하고 있던 구 막부이료나 어내인의 대부분도 도키유키의 움직임에는 따르지 않고, 다다요시와 함께 가마쿠라에서 탈출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에 들어간 도키유키는 공식 막부 문서를 발급할 수 없어 어내인만으로 낼 수 있는 도쿠쇼의 봉행인 연서봉서로 명령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겐무정권을 섬기던 구 막부이료나 어내인 중에도 다키우지와 함께 도키유키 토벌에 참가하는 자가 있어, 도키유키 및 어내인의 거병은 결과적으로는 어내인끼리의 싸움이 되어 가마쿠라 막부 재흥의 가능성을 잃게 함과 동시에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공방을 지탱하는 이료층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여담



[1] 호조씨와 주종관계를 맺은 이들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