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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그룹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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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대
김상문 (1973~1981) |
제3대
민경중 (1981~1990)[1] |
||
[1] 아시아자동차 사장 겸직 |
이름 | 김철호 (金喆浩) |
호 | 학산 (鶴山) |
본관 | 김해 김씨 (金海 金氏) |
출생 |
1905년
1월 13일[1]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상동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사망 |
1973년
11월 22일 (향년 68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
형제자매 | 3남 2녀 중 장남 |
가족 | 부인 및 슬하 3남 3녀 |
경력 |
기아산업 사장 기아산업 회장 서울상공회의소 의원 한국철관공업협회 이사장 한국경영인구락부 회장 경향신문사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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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기업인, 기아그룹의 창업주. 그의 호인 학산(鶴山)은 고향 칠곡군 학상동에 있는 마을 뒷편인 유학산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진다.2. 생애
1905년 1월 13일, 경상북도 칠곡군 가산면 학상동에서 빈농인 아버지 김태용과 어머니 파평 윤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차강(此江) 김성달(金聲達, 1844~1918)은 판서공 김불비의 16세손으로서 한학자, 시조시인으로서 고을에서 명성을 날렸고, 구한말의 기울어져가는 국운 속에서도 서당을 세워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1910년 경술국치 뒤에는 시와 술로서 망국의 한을 달래기도 했다.김철호 자신은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돌봐야 했다. 그럼에도 조부로부터 한학을 배워 배움에 뜻을 두어 12세에 한시를 능숙히 썼으며, 13세에는 인동보통학교에 입학한 후 4년간 다녔다. 18세 되던 1923년에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진로가 막막했던 그는 궁리 끝에 부친에게 하직을 고한 후 모친으로부터 8원 30전을 들고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 초기에는 부두 하역장과 공사장 등지에서 막노동을 해가며 생활을 꾸리다가 일본인 십장(작업반장)의 추천으로 니시나리구 츠모리쵸에 있던 볼트/너트를 만들던 오사카철공소의 견습공으로 취직하여 자전거 기술을 배웠고, 1924년 3월 이마미야 공업학교(현 오사카부립 이마미야 공과고등학교) 야간부에 입학해 기계공학을 배웠지만, 동년 7월 부친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장례를 치렀다. 거기에 모친이 병세가 악화되자 간병을 위해 고향에 머물렀고, 인동보통학교 시절 친구인 김동석 당시 장천사립보통학교 교장의 권유로 그 학교의 교원(교사)으로 일하기도 했다.
1925년에는 모친의 병세가 호전되자 동생 김명호와 함께 일본으로 다시 떠나 오사카철공소를 다시 찾았지만, 그 사이 주인은 김철호가 떠난 후 자식 없이 병으로 죽었으며 부인이 경영해왔다. 이마저도 제1차 세계대전 뒤에 터진 불황과 2년 전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사업이 어려워져 휴업 상태였다. 당시 여주인은 김철호에게 이직을 권했으나 그는 이 철공소에 그대로 남았고, 월급을 제대로 못 받았음에도 열심히 볼트와 너트를 깎으며 거래처를 찾아가 몸소 열심히 일거리를 맡았다. 이에 여주인의 신임을 받은 그는 1926년 이마미야 공업학교를 졸업하자 지배인 자리를 넘겨받았다.[2] 이에 그는 볼트/너트 제작 외에 당시 대중화 추세에 접어들던 자전거 판매에 손을 대기 시작해서 돈을 많이 벌었고, 가족 전원을 오사카로 데려오기도 했다.
1928년에 동향 출신의 독립투사 장진홍을 숨겨준 바 있으나, 이듬해 그가 체포됨으로써 김철호 자신도 일본 경찰에게 잡혀 취조를 받았다. 이에 철공소 여주인이 신원보증을 해서 풀려나긴 했지만 지배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또한 모친의 병세도 악화되어 아내로 하여금 모친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게끔 했다. 1930년에 이장렬 등 동향 출신 2명과 함께 삼화제작소를 세워 볼트/너트 등을 만들었다. 하지만 같은 해 세계경제공황과 일본 정부의 금 수출 해금 등으로 인해 불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경영을 시작했으며,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볼트/너트의 수요가 늘어나자 종업원 수를 300여명까지 늘렸고, 중일전쟁 중이던 1938년부터 일제가 국가총동원령을 내려 삼화제작소도 조선용 볼트/너트 등을 생산하는 군수 산업으로 강제로 편입되었다. 1941년에는 '삼화정공'으로 법인화하여 자전거 제조 및 판매업에도 손을 대는 한편, 일본인 자전거 기술자 와다 에이이치를 기술고문으로 영입했다. 1942년에는 자회사 취전철물을 세웠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및 1943년 과탈카날 해전에서 미군이 승리한 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짐을 예견해 회사를 정리하고 1944년 한국으로 귀국해 서울 영등포에 경성정공을 설립한 뒤 당시 비포장 도로에 전차와 역마차가 주요 수송수단이였던 환경에서 자전거 사업을 시작했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핵심 설비를 옮겨 부산으로 피난하여 지금의 영도대교 부근에 전쟁으로 인해 보류했었던 자전거 사업을 재기했으며, 1952년 회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변경하고, 국내 최초의 자전거인 3000리호를 출시했다. 1953년에는 한국자전거공업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으로도 선출됐다.
휴전 뒤 후 영등포공장으로 돌아갔다가 1957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에 새 공장을 세운 후, 1959년 일본 혼다와 마쓰다의 오토바이 및 삼륜차 생산을 위한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그러나 1961년에 회사가 부도나 은행관리를 받고 전체 사원의 절반인 200여명이 떠나는 와중에도 1961년에는 기아혼다 C-100, 이듬해 기아 K-360을 생산하여 회생시켰으며, 자진 사퇴한 종업원들을 다시 불러들이기도 했다. 이를 통해 확보한 수익과 1960년대 초반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동차 공업 보호 육성법'이라는 정부 정책에 힘입어 1970년 국내 최초의 일관공정 시스템을 적용한 소하리 공장을 착공시켰다.[3] 다른 한편 그는 1966년 회장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이듬해 다시 사장으로 복귀했다.
경영 외적으로 1960년 서울상공회의소 의원을 비롯해 1961년 한국외원산업진흥회 회장 및 한국철관공업협회 이사장, 1962년 한국경영인구락부 회장 등을 각각 역임했으며, 1966년에는 경향신문사를 인수해 회장으로 재직한 바 있다. 1970~71년 들어서 지병인 기관지 질환을 치료하려고 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척추가 손상되어 걷지 못해 휠체어를 타야 했고, 그런 몸으로 소하리공장 건설현장을 찾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다.
1973년 11월 22일, 서울 청운동 자택에서 그는 유가족 앞에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8세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장남인 김상문을 거쳐 민경중, 김선홍 순으로 회장직을 이어받았다. 기아산업 측은 그의 유지에 따라 새마을성금 1억원을 청와대에 기탁했고,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치하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동월 26일 소하리공장에서 영결식을 거행한 뒤 유해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안장됐다.
3. 가족 관계
자세한 내용은 범기아가 문서 참고하십시오.4. 어록
- "기업이 발전하려면 주변의 모든 기업이 함께 발전해야 하고, 또한 경쟁자가 있어야 한다."
5. 상훈
- 은탑산업훈장 (1973)
6. 여담
- 기아그룹의 마지막 회장인 김선홍을 1958년 기아산업 공채 1기로 입사시켰으며, 여럿 엔지니어들도 고장의 원인을 모른다는 기계를 고쳐 작동시키는 등 도깨비 잡는 놈이라며 인정과 신임을 주었다고 한다.
- 삼천리자전거 회장 김석환은 김철호 회장의 손자이자 김상문 전 회장의 아들이다. 기아그룹이 해체되기 전까지는 삼천리자전거를 범 기아그룹의 일원으로, 기아그룹 임직원도 삼천리 자전거를 살 때 할인을 받을 수 있었다. IMF 사태로 기아그룹이 공중분해되고 기아가 현대자동차로 인수되어, 마침내 기아 간판을 그룹 이름에서 떼어내버리고 만 현대자동차그룹에서는 통합 이전의 기아 역사를 흑역사 취급하는 반면, 삼천리자전거에서는 기아그룹과 공통이던 사훈 등을 아직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그룹의 정통성은 이제 삼천리자전거쪽에만 남아 있는 셈이 되었다.
- 의외로 4.19혁명 직후 실시된 총선에 그의 고향인 칠곡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지만 낙선했다.
7. 출처
- 기아 사십년사 - 기아산업. 1989.
- 기아 오십년사 - 기아자동차.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