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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9 00:01:21

김준(1896)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본명 김용재(金容宰)[1]
이명 김준(金俊)[2], 김종(金鍾)[3], 김종(金宗), 김복돌(金卜乭)[4]
출생 1896년[5]
전라남도 담양군 금성면(金城面) 대성리(大成里)
사망 1945년 12월
학력 황포군관학교 제 4기[6]
독립운동 경력 만주 애국청년혈성단
의열단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군사교관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제 1특별구당부 선전부
조선의용대 전방공작대원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1구대 구대장
묘소 중국 상하이시 어딘가
기념관 경상남도 밀양시 내이동 901 의열기념관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1977)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광복 이후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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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20년 만주 애국청년혈성단 활동, 이후 의열단 활동, 1930년대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가입, 1940년 조선의용대 대원, 1942년 한국광복군 입대

2. 생애

1898년 4월 22일 전라남도 담양(潭陽)에서 태어났다. 김준(金俊), 김종(金鍾), 김종(金宗), 김복돌(金卜乭)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3. 독립운동

1919년 만세운동 후 만주로 넘어갔다. 1920년 헤이룽장성(黑龍江省) 냐오윈현(鳥雲縣) 페이다둔(倍達屯)에서 조직된 애국청년혈성단(愛國靑年血誠團)에 가입하여 서무부에서 활동하였다.

그 후 난징(南京)으로 옮겨가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6년 의열단의 노선이 의열투쟁에서 정규전으로 전환되자, 김원봉(金元鳳) 등과 함께 광저우(廣州)의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로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고 졸업하였다.

졸업 후 중국군 고급장교를 지냈다. 중국 북벌군의 우한(武漢) 점령 후 우한 지방의 한인 통일기관인 유악(留鄂)한국혁명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0년대 초반 의열단계열이 항일군사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 조선혁명간부학교의 군사교관으로 전술학과 사격교범 등을 가르쳤다.

1934년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의 국민혁명군 제 3군 교도사 장교로 복무하였다. 1935년 난징에서 성립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중앙집행위원을 역임하였다. 1941년 3월 충칭(重慶)에서 김원봉 등과 조선민족혁명당 제 1특별구당부를 조직하고 선전부에서 활동하였다.

1940년 조선의용대 전방공작대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자 제 1지대 제 1구대장(韓國光復軍 第一支隊 第一區隊長)으로 선임되었다. 그는 중국군과 긴밀한 협조 아래 일본 점령지역에 대한 초모공작 및 대적선전공작, 일본군포로 심문과 일본문서번역, 적의 정보수집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한편 신임대원에 대한 교육을 수행하였다.

4. 광복 이후

광복 후 귀국하지 못하고 1945년 12월 상하이시(上海)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5. 참고문헌

김준의 공적정보
국외용의조선인명부(총독부경무국) 53면
조선민족운동연감 114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07면
한국민족운동사료(중국편)(국회도서관) 827 860 863 868 88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291 374면
명치백년사총서(김정명) 제2권 518 526 549면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3권 132면
[1] 김준엽, 장준하 회고록에서는 김준 구대장으로 알고 있다. [2]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1구대장 라오하커우에서 사용한 이름 [3] 황포군관학교에서 사용한 이름 [4] 중국으로 탈출할때 썼던 이름으로 추정된다. [5] 김원봉보다 2살 많다. 의열단에서는 김원봉의 나이가 제일 어렸다. [6] 김원봉과 동기이다.『황포군교동학록(黃埔軍校同學錄)』에 따르면 김종(金鐘)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