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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전 金起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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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6월 13일 |
평안남도 구성군 천마면 대성동 | |
사망 | 몰년 미상( 월북)[1] |
사망지 미상 | |
호 | 소춘(小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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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종교인, 소년운동가, 독립운동가, 페미니스트. '한국의 페스탈로치'로도 불린다. 약 7년간 '개벽'지의 주필을 역임했다.2. 생애
2.1. 초년 시절
1894년 6월 13일 평안북도 구성군 천마면 대성동에서 김정삼(金鼎參)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정삼은 한학자였다가 1900년에 동학에 입교하여 대접주로 활약했을 정도의 거물이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동학이라는 종교의 분위기에서 성장하였으며, 동학 교리강습소에서 신식 학문을 배운 후 서울로 올라와 1913년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1917년 고학으로 보전 법과를 졸업했다. 23세 때인 1917년에 매일신보 평양 통신원으로 일하다가 1919년 3.1 운동 직후 서울 본사로 올라왔다.
2.2. ' 개벽'지 주간으로서의 활동
1920년 6월에는 천도교 청년회가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월간지 ' 개벽'을 창간하였는데, 이돈화, 차상찬과 함께 그 창간작업을 주도하였고, '개벽'지의 초대 편집국장 겸 주필로 취임하였다. '개벽' 창간사도 직접 썼는데, 거기서 천도교의 후천개벽이란 곧 민중해방이며 민족독립임을 우회적으로 밝혔다."철인은 말하되 다수 인민의 聲은 곧 神의 聲이라 하였나니 신은 스스로 요구가 없는지라 인민의 소리에 응하여 그 요구를 발표하는 것이오. 신은 스스로 渴仰이 없는지라 인민의 소리에 응하여 또한 그 갈앙을 나타내는 것이라. 다수 인민이 갈앙하고 또 요구하는 소리는 곧 신이 갈앙하고 요구하는 소리니 이 곧 세계개벽의 소리로다." ('개벽' 창간사에서)
이러한 창간사 외에도 여러 반일적 기사때문에 '개벽'은 발행금지조치를 받아 창간호부터 호외로 발행되는 운명을 겪었다. 그래서 당시 종로경찰서를 제 집 드나들 듯 불려다녀야 했다. 얼마나 경찰서 유치장을 자주 드나들었는지 그의 손은 물론이고 가족들의 손까지 다 꽁꽁 얼어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2.3. 소년운동가로서의 활동
그 후 1921년 3월에 진주의 청소년 40명이 진주소년회를 결성하여 3월 27일에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계획하였으나 검거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이에 깊이 감명을 받아 1921년 10월 '개벽'지에 '可賀할 소년계의 자각'이란 글을 썼다. 이때부터 소년운동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하기 시작하였다.그 전부터 천도교 청년회에 몸담고 있다가 1921년 4월부터 소년부를 조직해 5월부터 천도교 청년회 소년부 총재를 역임했다. 그때부터 박내홍, 방정환과 의기투합하여 어린이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어린이에게 경어쓰기 운동'도 펼쳤다.[2] 1922년 5월 1일에는 보성전문 5년 후배 방정환과 함께 '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세계 최초의 어린이헌장인 '소년운동의 기초사항'을 선포하였다.
본 소년운동협회는 이 어린이날의 첫 기념되는 5월 1일인 오늘에 있어 고요히 생각하고 굳이 결심한 나머지 감히 아래와 같은 세 조건의 표방을 소리쳐 전하며 이에 대한 천하 형제의 심심한 주의와 공명과 또는 협동 실행이 있기를 바라는 바이라.
①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②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③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이날 서울 도심에는 “어린이 해방”이라는 붉은 글씨가 선명하게 쓰여진 깃발이 나부꼈다. 선전문 20만장이 전국에 일제히 배포되었고,[3] 어린이날 제정 기념식장에는 1천여 명의 소년들과 소년운동 관계자들이 가득 모였다.[4]①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대한 완전한 인격적 예우를 허하게 하라.
②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무상 또는 유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③ 어린이들이 고요히 배우고 즐거이 놀기에 족할 각양의 가정 또는 사회적 시설을 행하게 하라.
당시 어린이날이 5월 1일이었던 이유는, 그날이 국제 노동절(메이데이)이라는 데 있었다고 한다. 소춘과 소파는 어린이날의 제정이 어린이의 인권존중과 압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운동적 의미가 강하다는 이유로 일부러 어린이날을 노동절(메이데이)과 같은 날로 택했던 것이다. 그 후 어린이날은 5월 1일에서 5월 5일로 바뀌었는데, 그 이유는 5월 5일이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라는 데 있었다고 한다. 관련 글 참조
그의 어린이운동에 대한 이념은 수운 최제우의 ‘사인여천’(事人如天), 즉 한울을 공경하듯 사람을 공경하라는 가르침에서 비롯된다. "어린 아이를 때리지 말라.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리라"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유교의 장유유서 윤리를 비판하였으며, 어린이해방이야말로 민족의 진정한 해방을 가져다주는 열쇠라고 주장하였다.
"우리는 민족으로 정치적 해방을 부르짖고 인간적으로 계급적 해방을 부르짖는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되 우리가 먼저 우리의 발 밑에 있는 남녀 어린이를 해방치 아니하면 기타의 모든 해방운동을 사실로써 철저하지 못하리라 한다. ('개벽' 35호, '개벽운동과 함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에서)
어린이운동의 이념을 다지는 데만 열과 성을 다한 게 아니라 생활 속에서 이를 실천하기로도 유명하였다. 동네 아이들뿐 아니라 집안에서도 아들딸에게 꼬박꼬박 존대말을 썼다. 그래서 동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기도 하였다. 물론 어린이들에게 존댓말만 하는 데서 그친 것은 아니고, 유소년 노동 금지, 어린이 모두에 대한 취학 기회 부여, 어린이 존재를 염두에 둔 각종 시설 설치 등을 주장하였다.2.4. 페미니스트로서의 활동
당시 대표적인 남성 페미니스트로 불릴 만큼 여성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개벽'에 기고한 약 30여 편의 글을 통해 당시의 여성차별을 강력히 비판했다. 관련 기사예를 들어 당시 부모들이 딸에게 “저 ㅅ다위년은 더러 죽어도 조흐렷만은”이란 말을 일상적으로 쓰면서, 딸을 쓸모없는 자식으로 차별하고 천대하며, 자신의 영달을 위해 딸의 혼사를 마음대로 정하고 혼인을 강요하는 것부터가 그에게는 비판대상이었다. 또 여성이 결혼 후에 남편과 시집 식구들에게 복종해야 하고 과도한 가사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면서 “여자의 경우야말로 과연 참혹하의다”라고 한탄했다.
그는 “밤낮없이 일하는 여자는 사회의 맨 밑층에 쓸어 넣고 그 등에서 살아가는 사내놈들은 적반하장(賊反荷杖)으로 도리어 일반 여자를 압박하고 무시”하는데, 남자들만큼 “남을 무시하고 엎누르기 좋아하는 패는 없다”고 주장해 남성들이 여성들을 억압하는 주체임을 분명히 하였다. 여성차별문제의 해결은 어느 한편이 다른 한편을 “내리누르거나 쳐다보는데 있지 않고 서로 어우러져 서로 보충해 나가는 데에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남녀는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인격적으로 존중하면서 보완해나가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남녀 상호간에 사람성을 인정”하고, 남녀가 제각기 경건한 마음으로 서로 대해야 하며 서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5]
그 밖에 소유관념에 기반한 결혼에 대해서도 이를 ‘송장혼인’ ‘허튼 혼인’이라 명명하고 이를 구원해내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결혼 생활의 일생은 한없는 창조의 기쁨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결혼 후에 남편이 첩, 오입이라는 이름 밑에서 축첩과 성매매를 자행하는 것도 비판했다. 이러한 혼외관계는 근본적으로 여자를 무시 경멸하는데서 생긴 일종의 ‘놀림수’이며, 남편이 아내를 차지하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관념 때문에 생겨난 폐단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여성에 대해서는 위로와 격려의 말을 많이 하였다. “부지런한 생활을 한 사람이 한층 진리(眞理)에 가까운 생활을 한 사람이라 말할 수가 있다 하면, 조선의 여자는 조선의 남자보다 한층 이치(理致)에 맞는 생활을 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던 것. 그는 나아가 “사내놈들은 뭐, 정치니, 세도니, 윤강이니, 도덕이니 하며 그 밑에서 온갖 협잡, 온갖 불의(不義), 갖은 음탕을 다 부려 오는 그 중에 오직 여자 된 그들만은 고요히 고요히 집을 지키고, 향토를 붓 안고, 농사를 짓고 옷을 지으며, 또는 자손을 양육하여, 단 하루 일지라도 놀고먹은 적이 없었나니, 우리가 특히 조선 남자 된 우리가 조선여자의 역사적 근로(歷史的 勤勞)를 생각하면, 죄송스러운 맘과 감사한 눈물이 아울러 흐름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라고 평가하면서, 조선 여성들은 “옛 사회의 혈육이오. 새 사회의 골격이올시다”라고 했다.
결국 여성 억압에 있어서는 사회 제도가 가장 근원적인 요인이라고 지적했으며, 사회제도 변혁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한 조선 여성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여성해방을 주도할 신여성을 기르는 데 있으며, 교육 받은 신여성들은 여성 현실에 대해 인식을 하고 번민을 느끼며 여성해방을 위한 사회제도 변혁 운동의 선봉에 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여성해방론은 당시 조선 여성들이 그간의 억압된 삶을 극복해 새로운 삶을 살기를 기대하는 획기적인 담론이었다.
2.5. 정치투쟁 및 독립운동
한편 발행금지 34회, 정간 1회, 벌금 1회라는 수난을 당하며 7년 동안 일제에게 '가장 악질적인 잡지'로 불리고 있던 '개벽'지는 1926년 8월 1일 마침내 잡지로는 사형이나 다름없는 발행정지 선고를 받았다. 그것도 마지막 제72호를 전부 압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미 제본된 책을 일일이 작두로 썰어버리는 참형을 당했다.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기존의 어린이운동과 함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계속 펼쳐나갔다. "반만년 동안을 짓밟히고 쥐물리고 눌리우고 속히우고 빨리워서 항상 큰 불안과 공포와 빈천에 결박되어 살아오던, 전 조선인구의 9할이나 되는 농민대중의 인격적 해방"을 위해 조기간, 이돈화 등과 함께 '조선농민사'라는 조직을 결성하였고, 잡지 '조선농민'을 발간하였으며, 1929년 1월~4월 원산대파업이 100일의 파업 끝에 실패로 돌아가자 이에 자극을 받아 '조선노동사'라는 조직까지 결성한 것이다.
1926년에는 "향후 예상되는 일본의 국제적, 정치적 위기를 포착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기존의 천도교청년회를 모태로 한 오심당을 조직하여 스스로 당수가 되었다. 1926-1927년에 자신은 중국으로 가고, 조기간은 소련으로, 박사직은 일본으로 보내 각국 정세를 탐색하는 등 주도면밀한 독립활동을 했다. 물론 외부적으로는 종교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천도교의 정신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지방 순회길에 오르면, 역전에 마중 나오는 사람이 구름 같았을 정도로 천도교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간의 독립운동을 위한 행적이 일경에 의해 발각되어 1934년 9월 19일부터 사흘에 걸쳐 자신을 비롯, 전국 230명의 핵심당원들이 검거되었다. 이른바 '오심당 사건'이었다. 그 뒤 무려 3개월 동안이나 일경의 취조를 받았으며 폐 결핵이라는 병을 얻었다. 때를 같이 하여 그가 관여하던 어린이 대상 잡지인 “어린이”, “신소년”, “영데이” 등이 폐간되었다.
2.6. 말년의 시련
1936년 마흔셋의 나이로 해주요양원에 들어갔다. 1937년에는 경주 근처의 용담정에서 3개월 여 동안 머물렀다. 그래도 완쾌가 되지 않자 서울 우이동으로 올라와 생식으로 수행하며 병마와 싸웠다. 그렇게 10여년동안 투병생활을 하면서 일제의 숱한 탄압과 회유에 응하지 않았으며, 창씨개명을 비롯한 그 어떤 반민족행위도 거부하며 살았다.[6]몸이 거의 완쾌되었을 즈음인 1945년에 조선이 해방되자, 천도교 청우당(청년당)을 부활시켜 위원장으로 취임하고, '개벽'을 속간하는 등 다시 정력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당시 남쪽보다 북쪽이 천도교세가 더 컸으므로, 북쪽 천도교 지도자들의 요청으로 1946년 11월 북쪽으로 건너갔다.
그러다가 1948년 3월 북한에서 반공의거운동(3·1재현운동)이 일어났을 때부터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아들 김석범의 증언에 따르면 북에서 온 심부름꾼 하나가 천도교 서울총부로 찾아와 " 조만식 선생과 같이 감방(모란봉 형무소)에 있다고 전해주오. 그렇게만 말하면 알 것이오."라는 말을 전했다고도 한다.
다른 증언에 따르면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기 위해 월북했다고도 한다. 그런데 북한에서 김달현의 밀고로 동지들 삼천여 명과 함께 체포되어 지하 감옥에 갇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도 끝까지 투항하지 않고 빙그레 미소 하나로 버티다가 마지막에 허공을 보고 '우리가 그것을?'이란 한 마디를 외치고 숨졌다 한다.
3. 여담
- 평생을 정치운동과 언론운동에 몸바친 그였지만, 집안에서는 '무능한 가장'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집안살림은 모두 그의 부인인 전봉규의 몫이었다. 부인이 옷감 행상을 하며 5형제를 키웠고(2명은 일찍 사망), 그래서 끼니조차 잇기 어려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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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히 과묵하고 언행일치에 철저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의 평소 삶에 관해 후배 삼암 표영삼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한 달 동안 생활을 같이 했죠. 그런데 그 양반이 하루 종일 말씀을 안 해요. 몇 가지 물어봐도 말을 아주 한참 있다가 그저 서너 마디하고 딱 끊어요. 수행을 해서 그런지 잔말을 안 해요. 누가 여럿이 와서 물어도 별로 관여하지 않아요. [...] 그리고 해방 후 북한에서는 전기료를 안 냈거든요. 그런데 소춘 선생이 일어서서 직접 꺼요. 여기서 돈을 안 물지마는 어느 사회에서나 다 전기세를 무는데 습관을 그렇게 하여야 된다고 일어서서 당신이 꺼요. 그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생각하라. 그리고 생각하면 미루지 말고 빨리 하라고 하셨어요."[7] -
시인
김지하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고 한다. 김지하의 시(詩) '우리가 그것을!'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우리가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 / 김기전(金起田) 선생 최후의 말씀 / '우리가 그것을?'
평양 감옥 지하실에서 / 선생이 / 혼자 외쳤다는 / 이 한마디가 / 간수를 통해 나에게까지 / 온 것은 수십 년 뒤
우리가 / (우리처럼 쪼각쪼각 흩날리는 사람 사람이) / 그것을? / (한꽃 빛깔로 통일될 수 있다면?)
아 / 내가 이 말씀 전해 듣고 / 서대문 감옥 캄캄한 독방에서
울고 또 운 것은 / 감상이 아니었다 / 무슨 반공사상도 아니었다 [...] - 2010년 4월 '소춘 김기전 전집' 제1권과 제2권이 발간되었다. 2011년 8월에는 제3권이 발간되었다.
[1]
한국전쟁 이전에 사망한것은 확실하나 정확한 날짜는 불명.
[2]
“아동 중에는 조선 아동의 꼴이 세계 중 제일 너저질”하다면서, 어린이들을 ‘이놈’, ‘저놈’하고 부르는 대신 경어를 쓰자고 제안했다. 천도교 중앙대교당 정문에서 어린이들이 들어오면 늘 공대어로 맞이하였다.
[3]
그 선전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었다. "① 어린 사람을 헛말로 속이지 말아 주십시오. / ② 어린 사람을 늘 가까이 하시고 자주 이야기하여 주십시오. / ③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 ④ 어린 사람에게 수면과 운동을 충분히 하게 하여 주십시오. / ⑤ 이발이나 목욕 같은 것을 때맞춰 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 ⑥ 나쁜 구경을 시키지 마시고 동물원에 자주 보내 주십시오. / ⑦ 장가와 시집보낼 생각 마시고 사람답게만 하여 주십시오.
[4]
천도교소년회·조선소년단·조선소년군·불교소년회 등 40여 개 소년운동단체 대표가 모여 조선소년운동협회라는 하나의 연대체를 결성했다. 이 날 행사는 바로 조선소년운동협회가 개최한 것이었다.
[5]
특히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서는 결혼하는 그 즉시 “한 개의 주인과 한 개의 몸 팔이 꾼이 서로 모여서 기계적으로 생산과 싹바듸로 품팔이를 하고 있는 셈”으로 규정하고, “이 한편이 저 한편을 내리누르거나 쳐다보는 데”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남녀관계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종속적으로 의존하면서 살고 있는 것에 대해 비판하고 부부관계는 서로 어우러져 보충해나가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6]
김기전이 일제의 회유를 일체 거부하고 극도의 가난 속에서 은둔생활을 할 동안 그의 동지 이돈화는 일제에 타협하였다. 천도교 중앙종리원 편집과 주임종리사·지도관장·상주선도사·종법사·현법사 부도령·천도교 총부대령 등 행정상의 여러 중책 역임하였으며, 만주제국 건국 10주년을 기념하여 신징에 있었던 친일 우리말 신문인 만선학해사에서 1943년에 발행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천도교 발생사와 삼대장생관’이라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7]
성주현, 동학과 동학혁명의 재인식, 8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