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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11 12:44:06

기원전 4세기, 축록중원은 시작되었다!/조선/등장인물


1. 개요2. 군주/태자3. 관료(to내 인재)
3.1. 기원전 432~403 3.2. 기원전 402~3733.3. 기원전 372~3433.4. 기원전 342~3133.5. 기원전 312~283
4. 기타 인물
4.1. 중원계4.2. 요동/예맥/청구계4.3. 유목/북방계4.4. 강남계
5.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

1. 개요

◆는 현재(202스레)기준으로 사망 ◇는 은퇴

2. 군주/태자

군주의 능력치 중 100에 달하는 항목이 있을 경우 그에 관련한 부분에서 치세 동안 조선 자체가 보정을 받는 시스템이 있다. [1]

3. 관료(to내 인재)

현재(50스레)기준 조선의 관직은 조선상(相) - 육경(六卿) - 아경(亞卿) - 대부(大夫) - 박사(博士)로 구분되며, 조선상은 타 중원국가의 상방과 동일한 직책이고 육경은 조선 시대 6조의 수장이었던 판서와 같은 위치에 있다. 육경의 수장 및 담당은 다음과 같다[30].

대총재(大冢宰) - 천관(이조) (인사,종합업무)
대사도(大司徒) - 지관(민조=호조) (재정업무)
대종백(大宗伯) - 춘관(예조) (외교업무)
대사마(大司馬)[31] - 하관(병조) (군정업무)
대사구(大司寇) - 추관(형조) (사법업무)
대사공(大司空) - 동관(공조) (공사업무)

원래 스타팅 시점의 조선은 중국식 관제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는데, 연나라 정벌 이후 조선상과 대사마대장군등의 직위를 만들어서 중국식 관제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중 대사마대장군 직위는 군사권을 한 관직에 몰아넣은 수준이였는데, 이는 세후가 구귀족들을 숙청하고 억누르기 위해 측근들에게 군권을 집중시켜서 그렇다[32][33]
또한 세후 때 조선상 문예의 제안으로 조선상을 보조하기 위한 비서직인 승상이, 유후 때 기라의 제안으로 감찰부서의 수장이며 군주의 비서직인 어사대부가 신설되었다[34]
승상은 조선상과 육경[35] 사이에 위치한 지위이고, 대사마대장군은 조선상 밑에서 군사업무 전반[36]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다. 어사대부는 아경과 동급의 직책이었다가 육경급으로 승진, 이후 대사마대장군,승상과 동격인 삼공급으로 지위가 올랐다.[37]
이들 승상,대사마대장군,어사대부 세 관직을 삼공이라고 부르며 조선왕(후), 조선상,삼공이 회의에서 국가의 큰 일들을 정한다.
유후 재위기 중반까지는 한 번 임관하면 부서를 어지간하면 멋대로 바꿀 수 없었고, 군사들이 실적이 없으면 말을 안 들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유후 때 공손앙,기라등이 실행한 개혁 이후 그런 제약이 약화되거나 사라졌다.
그리고 이후 장왕 때 소부[38]가 지관에서 독립해 어사대로 들어갔고, 대간을 만들어서 어사대 소속으로 배치하였다. [39]
전체적으로 조선상(상방)-삼공-육경(+소부)-아경-중외대부-상중하대부 순서의 관직 체계이며, 육경에 소부를 더한 칠경과, 아경을 경이라고 부르고, 중외대부와 상중하대부를 대부라고 부른다.
이 중 대부급은 현장직이라서 카이두의 경우처럼 현장에 대신 일할만한 사람이 없으면 실적이 쌓여도 대부 직위에서 오랫동안 머무르기도한다.
장왕 재위 말기와 기설 때는 조옹과 같이 오랫동안 한 관직에서 머무르며 권신화 되는 현상이 문제로 꼽혔고, 당시 대사마대장군이던 비비오가 은퇴하고 난 뒤로부터는 육경 급은 임기에 제한이 생기었다.[40]
190어장 기준으로 대사마대장군의 권한축소나 6관의 이름을 바꿀 관제개혁의 이론을 정리하고 실행하기 위해 대기중이다.

2부 기준 각 관의 명칭이 상기의 순서 순으로 이민예병형호로 전환이 완료되었다.

이후 하기를 끝으로 조선상이 명예직화 되고 기미부주를 3개 도호부[41]로 개편하며 그 장에 승상을 분할한 우승상을 두었다. 업무량, 해당 지역의 역량과 우선순위 등으로 인하여 기존의 승상 업무를 전부 보전한 좌승상보다는 반 수 정도 지위가 낮으며, 각 도호의 지위는 아경급이 되었다.

작중 이 항목에 추가된 인물과 추가될 인물이 계속해서 증가함에 따라, 이들을 태어난 연도 기준으로 세부 분류한다.

70여년이 지난 후일담 기준, 대사마대장군직의 해체를 비롯하여 수많은 무관 상설직들이 비상설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군부 자체를 제국 바깥과의 외교를 관할하는 번관이 생기는 등 점차 권한이 강화된 우승상부가 관할하게 되어 삼공은 유지되었다. 또한 위위라 불리우는 황실 경호 문관직[42]의 존재가 확인되며 경급 직위의 종류가 늘었음이 확정되었다.[43]

3.1. 기원전 432~403

3.2. 기원전 402~373


3.3. 기원전 372~343


* 충익군 하기 (기기) (AA: 히이라기 시노아 통/무/지/정/매: 98->100/94/93/100/42) 동관대부 -> 동관 중외대부 -> 하관 중외대부 겸 별부사마-> 하관상경-> 어사대부-> 대사마대장군->조선상 ◆ 기원전 352년
기화의 딸. 원래 이름은 기기인데 기유가 이름이 이상하다는 이유로 하씨를 내려줘서 하기라고 불리게 되었다(...)[89] 원래는 동관에서 일을 했지만, 묵가와 일하면서 군사에 재능이 있단 사실이 밝혀져서 하관으로 자리를 옮겨 승진했다. 이후 산동대전에서 세운 공과 선임 어사대부가 처형된 덕분에 어사대부로 발탁됐다.[90]
이후 하남대전의 대패로 이를 지휘하던 대사마대장군 곽전이 징계로 위장군으로 강등당하면서, 차상위자인 대사마 조하가 어리고 경험도 없었기에 대신 대사마대장군에 올랐다.
295년 2차 중원대전에서 그림같이 완벽한 기동전으로 망묘군이 하수를 넘기도 전에 하동을 완전 점거하는 공을 세워 조선상으로 내정되었고, 비의가 그해에 은퇴해 조선상에 취임했다.
양소룡의 죽음을 계기로 기설의 행보에 대해 마지막까지 확인을 거친 끝에 더 이상 곁에 자신이 필요없다는 명목으로 사직하였다.
후일 차후의 조선상은 누구인가의 문제로 조선왕에게 언질을 넣음을 계기로 사실상 최후의 조선상[91]이 되었다. 은퇴 후에는 가끔 대에 가서 조옹과 놀았고, 조옹까지 죽은 287년 시점부터는 이승에 남은 장왕사우가 되었다.
기원전 281년, 깐깐하게 조정의 기강을 돌아보고 당부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여 삶을 마쳤다.

3.4. 기원전 342~313

3.5. 기원전 312~283

4. 기타 인물


작중 해당 위치에 존재하는 인물이 다수가 됨에 따라 계통 위주로 세부 분류한다.

4.1. 중원계




4.2. 요동/예맥/청구계


4.3. 유목/북방계

4.4. 강남계

5. 이름이 없는 엑스트라


[1] 그 결과 1대에는 외교나 첩보 및 기책, 2대에는 점유지 안정화 및 본령화 및 조선 내를 개혁하거나 민간 대규모 시설 등을 축조하는 행동, 3대째에는 인재 등용, 인재 관리, 그 외 잡다한 행동 등에서 인재를 발탁하거나 확인하게 될 확률의 증가 등에서 이점이 있었고 그 이득을 보았다. 통솔과 무력은 아직 사례가 없어 유추는 해도 정확한 효과를 알 수 없다. [2] 원래 이름을 몰랐지만 1000 신청으로 기부루라는 이름이 생겼다. [3] 공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적인 자리에서도 비판 가능한 건 고거, 문예, 기이 세 명 뿐이였다는 듯. 다만 고거랑 기이는 과로로 성격 배린 문예와 달리 성격상 기식에게 딱히 사적으로 비판을 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4] 후에 굴린 다이스에 따르면 이 3명을 제외하고도 기이의 아버지 겸 자신의 남편은 무척이나 사랑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세후가 자신의 일가를 숙청해버린 탓에 자살을 한 남편을 보고도 어차피 저승 가서 다시 만날테고, 남편이 자신을 미워해도 자신은 여전히 남편을 사랑하고 있다는 심히 얀데레스러운 사랑인 것이 문제였지만(…) [5] 연나라와 조나라를 병탄하고 노나라에서도 공성부대를 투입하여 가장 핵심적인 전력을 담당했다 [6] 다만 있던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당시의 사정이나 시행착오 등의 요인이 있어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니며, 이것과 본인의 성정이 겹쳐 예견될 문제들을 태자를 비롯해 직접 길러내고 등용한 인재들이 끝끝내 원래의 스승 보다도 재빠른 속도로 정교하게 다듬고 운용하면서 해결해냈기에 빛이 바랄 일은 없다. 오히려 창업 군주로써 최대의 위업은 그녀의 사후에 이루어진 셈. [7] 원래는 92/51/83/45/80이었는데, 1000번대 효과로 정치력 상승 리다이스가 나와서 88로 상승했다. 이후 성장효과가 더해진 것이 위의 수치. [8] 관련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전부 당대 위나라의 전성기를 이끌던 실세 중의 실세들이다. 그런데 오기는 노년에 노망이 나서 기이랑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바람에 자신의 병법을 전수했다. 그리고 서문표는 바로 그 해에 제나라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9] 이건 이후 맹자에 의해서 조선의 복이었다며 찬양받기도 했고, 메타적으로는 진나라의 엄벌주의와 다른 길을 걷게 해서 진나라같은 엔딩을 피하는 첫 걸음이 되었다. [10] 이렇게 제도를 정비해둔 덕에 손자인 기유대까지는 기이가 정립해둔 체제를 큰 변형 없이 사용했고, 제나라도 놀랄 정도의 군사를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11] 그나마 제나라가 동맹을 제의해준 덕분에 최악은 면했다. [12] 고대에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군주의 몸을 갈아서 일을 해야 가능하다. 그만큼 기이가 신경을 많이 쓴것. [13] 본인이 생전에 원했던 시호는 옳은 것을 알았지만 그것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의미의 악시인 정(丁)이었다. [14] 태자교환의 인연으로 기이와 친했던 위무후가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주려 했으나, 기이가 옳은 싸움만 하라는 뜻으로 좀 수정해 적용한 것이다. [15] 사실 이것은 전인제에게 패자 체제를 끝낼 것을 종용한 것이다. 비록 전인제의 이상에 의해 이 체제 하에서 상당한 이득을 보았던 조선이었고 제나라와 조선이 힘을 합치면 대충 없던 일로 덮고 무마할 수 있었지만, 만일 체제의 유지를 억지로라도 거들어 결국 계속 이어진다면 외교권을 사실상 빼앗기고 시작한 데다 여전히 외교권에 제약이 있었던 조선에게 있어서는 체제를 완벽하게 굳히는 꼴이었다. 때문에 대세가 거의 기울어졌을 때를 놓치지 않고 이 체제의 유지에 동의하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그러나 전인제에게는 직설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16] 틀리는 것을 무서워 하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색, 이제 이 나라는 너의 것이니 죽이고 살리고까지 마음대로라는 말은 않겠지만 전적으로 너의 행동으로만 움직인다는... 착각은 하지 마라. 오히려 조금이라도 물러서는 순간 너의 색이 지워질 염려를 하는 쪽이 건설적일 것이다. [17] 다만 기토가 죽고 기유가 국군이 된 이후의 칭왕 회동에서 제, 조선, 위, 한, 진의 국군들이 왕으로 칭호를 올릴 것을 결의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첫 번째 왕이다. [18] 단지 여기에 더해서 부족하다면 자신의 비상금을 동원하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게 자신의 10년치 품위유지비 수준의 규모를 조선의 예산에서 꿍쳐둔 것이라서 어머니 기토에게 호되게 두들겨맞았다. [19] 정확히는 제나라와 대등한 세력인 조선을 무릎꿇리고 중앙군 원수 전기를 비롯한 주전파들을 잠잠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당연히 패구에 조상의 무덤이 있다는 사실은 거짓말. [20] 실제로 용담 출신의 개척민들이 대다수이긴 했으나 2세대나 중원 출신 역시 다수 섞여있었다. [21] 이는 당시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유독 기유에게만 나오는 저다이스 행진과 겹쳐 "역대 조선후/조선왕 중 가장 병신같은 녀석이다." 같은 말을 듣게 만드는 우행 그 자체였으나, 동시에 여론의 절반 정도가 자신들의 왕이 무릎을 꿇는 모욕을 받은 것을 열받아한 것을 포함하여 후일 제나라의 천하를 완전히 끝장내는 포석이 된다. [22] 이 때 기유는 그 옛날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다시금 떠올리고서, 본래 자신의 딸에게 하려고 했던 말을 남길 평정심을 얻었다. [23] 이 때 조옹은 감사를 표하는 장왕 기유에게 정 그렇게 고맙다면... 알지? 같은 투로 맥성 내 왕실 술창고의 술 절반을 하사받았다(...) [24] 이 때 어장주(진행자)가 사용한 묘사는 야인시대에서 김두한이 시라소니에게 딱 봐도 자기보다 위라서 싸움을 걸지도 않고 꿇는 그 묘사를 그대로 사용 ........조선 형님, 제나라 아우가 이렇게 무릎을 꿇습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할 정도였다. [25] 이 결과 전벽강은 치욕을 당한것에 더해서 동생 전영이 정치생명을 희생해 비난을 무마해줘서 멘탈이 나가버렸다. [26] 태왕의 태는 태산과 같은 한자로, 천황 지황 태황의 삼황 중 태황에서 따왔지만 태산에 올라서 봉선한다는 의미도 은근히 담겨있다 [27] 역으로 이런 선이 확실한 성격 덕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고 숙청을 자주하던 기식이나, 선이 지나치게 넓어서 오히려 당혹스럽게 만드는 유후보다는 신하들이 모시기에는 나은 편이라는 듯하다. [28] 특징으로 면면이 진행자의 최애캐다. [29] 시기상 기도의 딸 또는 손녀로 추정 [30] 이는 주례에 실려 있는 주나라의 관직구성 시스템과 비슷한데, 다소의 차이가 있다. 우선 상 혹은 상방은 문서에도 있지만 정식 관직이 아니기 때문에 언급이 없다. 그리고 천관의 수장은 대총재가 아니라 '대재'이고 이 사람이 실질적 수상이다. 주례의 편목상으로 천관총재, 지관사도, 춘관종백 등으로 이어지고 다른 직책은 그 편목명에 대를 붙여서 장관을 의미하는데, 천자 직속인 천관만 그 구성이 다르다. 동관은 고공기가 남아있으니까 내용이 다른 것이고 이호예병형공에 일대일 대응 되는 것도 아니지만, 저 내용도 그렇고 대총재도 그렇고 한참 후대의 조선시대 느낌이 난다. [31] ...지만 현재는 대장군과 통합되어 대사마대장군으로 이름이 넘어가고 실재로 하관업무를 보는 것은 하관상경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이것은 오류다. 해당 스레 내에서의 대사마대장군은 하관(병관)의 수장인 대사마와 군부의 수장인 대장군의 권한 모두를 행사할 수 있는 상위의 직책이며, 애초에 대사마 직함 자체가 하관상경을 뜻하는 직함이다. 다만 스레 내에서 대사마가 아니라 하관상경이라고 언급되는 이유는 대사마대장군이라는 직함과 혼동을 피하기 위해 스레주가 의도적으로 돌려서 표기했던 것이며 실제로는 하관상경 = 대사마가 맞다. [32] 대사마대장군이란 직함 자체가 군사행정을 맡는 문관직의 수장인 대사마와 실제 병사들을 이끄는 무관직의 수장인 대장군을 통합한 직함인데 쉽게 말해 군사행정과 병권을 포함한 일국의 모든 군권을 개인이 합법적으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엄청난 권한이다. 사실 고대에 군권 자체가 군사행정과 군사지휘가 세분화되지 않았기에 대사마 직함으로 병사를 지휘하거나 대장군이 군사행정에 개입하는 일은 흔했고, 이 때문에 훗날 한나라에서는 대사마와 대장군 중 한쪽이나 양쪽 모두 비상설직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 대사마대장군 직함이 특별한 이유는 편법이 아니라 아예 합법적으로 일국의 모든 군권을 장악 할 수 있는 직함이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에서 이러한 막대한 권한으로 권세를 누렸던 인물은 전한 시기의 곽광이 있다. [33] 비슷한 이유인지는 안 나왔으나 악자도 군주 직속의 별부사마로 오랫동안 많은 병사들을 통솔했다. [34] 중국역사에서 어사대라는 조직과 어사대부라는 관직은 진시황이 처음 만들었다. 이후 전한시대에 정착. 다만 이후 지위가 많이 떨어져서 단순 감찰역으로 변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서 고려시대의 어사대가 변한 것이 조선시대의 사헌부이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종2품으로, 정2품인 판서보다 낮다. 즉, 어사대부가 아경급이었던 것은 조선시대 대사헌의 위치와 비슷했던 것. [35] 군사 업무를 보는 하관 제외.원래는 하관의 업무중 군정계의 일도 보았지만, 업무가 너무 광범위해져 권한이 너무 강해지는지라 분리되었다. [36] 군사행정과 군사운용 이중 군사행정을 군정이라고 부른다. [37] 승상이나 대사마대장군과는 달리 어사대부는 조선상을 거치지 않고 군주 직속이다. [38]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 특이사항으로 아직 인물과 관직제도의 분화가 완전히 일어나지 않은지라 소부의 상경은 소부상경이 아니라 소부라고 불린다. 농지에서 나오는 수익 이외의 수익을 관리한다는 모양 [39] 대간의 수장은 간의대부인데 중외대부의 지위이다. [40] 삼공이나 조선상은 해당사항이 없으나 압박으로써는 작용한다는 모양 [41] 현재 운중, 오환, 거란 [42] 무관에서 위장군의 역할을 가져온 것이다. [43] 원역사에서는 9경 중 하나였다. [44] 이에 대한 이야기는 악양 항목 참고. [45] 참고로 조선 내에서 기병 만능론을 주창하여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한 건 태자교환으로 조선에 와 있던 위앵. [46] 세후 기식과 동갑이다. 이러니 수틀리면 자기 주군에게 이빨을 까지 [47] 나머지 둘은 기취와 기라. 모두 원칙주의자들이다(...) [48] 대표적인 예시라고 들기에는 뭣하지만, 문예가 점점 기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이유로 차기 조선상을 정할 당시에는 능력주의 기조가 조선에 그리 강하지 않아 연공서열에 의해 조선상이 될 처지에 놓이자, 정확히 3주 이내(20일...)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국가를 멸망시킬 국정을 혼란시킬 자신이 있다는 냉정한 자기 평가로 고사하였다. 세후가 이를 가납하여 두 번째 조선상은 기취가 된다. [49] 이때 기식이 말하는 게 흠좀무한게 중앙에서 일 안하면 조만간 출정할 조선군의 말발굽에 예맥 부족 몇이 밟혀도 난 모른다? 라고 하자 스어는 그저 데꿀멍... [50] 당시 스어는 지방의 관리인 상으로 실권은 몰라도 계급상으로는 엄연히 기취보다 낮았다. [51] 작중 기준으로 승상의 유래가 되는 일화가 이 때 생성된다. 기취가 조선상에 취임하는 조건으로써 자신의 비서로 들일 인물을 기라로 선정하는데, 그 관직의 이름을 무엇으로 하는가에 대해서 이미 기라 등이 생각해 둔 것이 그대로 적용되게 된 것이다. [52] 그래도 초나라의 기풍과 어머니의 원수 문제 때문에 결국 초왕의 고민을 이끌어냈고, 이는 월나라의 결례를 쐐기로 하여 제나라와의 거의 성사된 동맹을 재고하게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53] 안 씨를 사성받을 때 확정된 것이다. [54] 본디 조선의 말은 유목민의 것과 동등했으나 시작 시점에서는 누군가 인위적으로 온순하고 왜소하도록 개량하였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원상복구시킨 것 [55] 백두는 기식을 몰라보고 너 이름 대라 니 조선후한테 다 말할끼다! 이랬다가 옆에 있던 문예가 정체를 밝히자... 그리고 악마같은 조선후는 '너 대사공할래? 고자될래? 아니면 사형 받을래?라는 무자비한 선택지를 제시하고 그 이후론 이하생략. [56] 요구가 위대한 철학자였기 때문에 보정을 받았다. [57] 별부사마는 휘하 병력의 구성에 재량권이 있는데, 당시 거느린 병력은 속된 말로 자기 밑에 애들 중에서도 그나마 쓸만한 놈들(...)이었다. [58] 역덕후라면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 한데, 바로 충무공 이순신이 율곡 이이의 만남을 거절한 일화와 판박이. 그래서 스레주 공인 '충무공급 원리원칙주의자'란 별명이 붙었다. [59] 정왕 기토의 시대에 들어서는 조정의 원로이자 왕의 친척이었던 탓인지, 재위 직후부터 정왕은 문성군에게 심적으로 기대는 부분이 좀 있었다는 게 사후 밝혀졌다. [60] 심지어 자기 어머니인 공양군의 마지막 출정이었던 무성 공략전을 무익한 희생만 낸 전쟁이라고 대차게 깠다. [61] 공손앙은 본디 위(衛)나라의 공족이다. [62] 그나마 월이 뜯어말린 덕에 전후사정은 들어주고 처형했다(...). [63] 원래의 역사에서 맞이한 최후를 생각해보면 원역사에서보다도 나라와 주군을 2대씩이나 한참 잘 만난 덕을 본 것이다. 어장주(진행자)의 공언에 따르면 만약 당시의 조선의 군주가 기식이나 기설이었다면 쓰기는 커녕 본질을 간파한 뒤 통제가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숙청했을 것이라고. [64] 이러한 이유로 재능은 있지만 출신이 이민족의 하층민인 탓에 텃세와 멸시 등에 시달리는 마위의 상황에 분통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65] 제나라는 2인자인 추기, 위나라는 공자 위신과 부마 기람, 송나라는 공자 대언이 지휘를 맡았고 한나라의 경우 아예 한후가 직접 참전했다. [66] 하도 오래 살아서 누구 장례식에 고정이 나오면 어? 아직 살아 있었어요?!라고 놀라는 게 정형화된 패턴이 되기도 했다(...) [67] 일단 이름을 조선이나 중원식으로 변형하지 않고 아무로라고 그대로 사용하며, 조선후가 아닌 조선의 카칸을 찾아뵙고자 한다고 말하고, 기토가 술자리를 마련하였을 때 '카칸이 베푸는 술자리! 오오 감사' 같은 반응을 보인다. 이후 기토가 조선의 요동 지역을 순방할 때에는 왕(...)으로 부르는 정도까지 적응하였다. [68] 죽기 직전 살 날이 얼마 안 남음을 느끼고 퇴청을 신청했고, 이를 윤허받은 시점 이후 시스템 적으로 신하의 은퇴를 권할 수 있게 되었다. [69] 어디까지나 불의의 사고라고 점찍고 넘겼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인지라 사감이 완전이 지워지지는 않았는데, 당시 고씨의 식객이었던 장의가 혀를 함부로 놀려 다시금 불이 붙은 탓도 있었다. [70] 이 때 고질보다 10살 정도 연상이던 고정은 맨날 말 타면서도 멀쩡하단 사실이 나왔다(...) [71] 투제라는 이름은 일종의 별명이자 중원식 이름인데 삼황오제할때 그 제를 쓴 덕분에 중원식 이은 한자로는 쓰지 말란 소리를 들었다(...) [72] 훗날 비비오가 은퇴할 때에 보인 반응을 볼 때, 조옹은 측근이 아니라 친구라고 여기고 있었다. [73] 무력과 통솔 외에는 별 보정이 없다는 선택지가 걸렸는데, 정작 지력이 99가 나와서 어장주가 경악하기도 했다(...) [74] 단, 그때문에 가상인물로 판정되기 때문에 실존인물 보정은 가지지 못한 채로 시작했으나 손빈병법의 힘으로 이를 회복하였다. [75] 동시에 참치들도 조옹을 계속 활용하는 것이 국가에 더이상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고 판단해서 자를려고 하면서도 워낙 세운 공이 많아서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 [76] 일이 처리된 이후, 기도의 금령들은 본래 제후의 국과 대부의 가에서 행해지는 자치권과 독립권을 인정하는 것의 연장선상이니 철폐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는 말에 “제국이라는 이름의 일국(一國)에는, 종실이라는 이름의 일가(一家)외에 다른 가(家)는 필요가 없다고.”라고 답했다. 즉 제후령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말려죽여버릴 작정이었고, 대군에 건 제약을 풀어줄 생각따위는 조금도 없었다는 것이다. [77] 이로 인해 진나라 파견 법가가 학살당할 때 격분해서 끌려나가기도 했다. [78] 왕한테 올리는 문서에 나,너 라는 단어를 쓰거나 아무튼 목을 많이 뱄다! 수준의 문서도 올라왔다(...) [79] 조옹,비의,하기,카이두 [80] 조선 왕족이 자성 기씨라는 것이 복선이었다. [81] 그 덕분에 이 어장에서 자주 당하게 되는 괴상한 이름이 지어지는 것을 도리어 피한 실존인물이 되었다(...) [82] 위계서열 보다도 안다 관계를 그것도 공석에서 중시하여 말을 한 탓에 곽전이 뜯어말렸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이 행동을 안다로써의 관계를 버린 것으로 오해했기에 서러워했다 [83] 아버지의 부하들은 단지 초원의 법도에 충실했기에 이후 실력을 보이자 크라우를 따랐지만, 어찌되었든 크라우에게는 그 동안의 경험이 매우 뼈에 사무치게 되었다. [84] 다만 물증이 충분치 않은 것도 있었지만 당사자가 고자가 될 줄은 몰랐다고.(...) [85] 삼국지의 그 비의와는 동명이인이다. [86] 특히 산동대전 이후로는 돈 없는데 돈을 무더기로 써대는 무관들에게 열 받은 모앙(...) [87] 무려 파촉 제외한 모든 중원국가에 외교관으로 파견된 전적이 있다. [88] 상관인 비의보다 모든 능력치가 상위호환이다. 그런데 오히려 비의한테 공부 좀 하라고 혼나는 장면이 나와서 능력치가 절대는 아니라고 보여 주는 예시가 되기도 한다. [89] 덕분에 정작 기유는 별 생각 없었는데 태자의 측근으로 낙인찍혔다는 듯(...) [90] 어사대부 자리가 군주의 최측근임을 고려하면 하기가 기유의 최측근인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91] 하기 이후 태자인 기도가 잠시 맡았지만 조선의 업무를 가르침 받는 위치였으므로 본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92] 다만 대총재 직은 예전에 6경의 수장이였기에 6경 중에서도 특별한 면이 있어서 아무리 문씨라도 조금 더뎌질 수밖에 없어서인 면도 있다. [93] 조선상이 인재 추천하는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좀 노골적인 부분이 있었다 [94] 본인도 후견인 격이던 조옹에게 태클을 건 것은 자신의 입장에서 궁여지책이었던지라, 고씨와 문씨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고서는 자신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고 속으로 여러 번 쾌재를 불렀다(...) [95] 지금으로 따지면 관아의 비정규직이다. [96] 양수가 평양으로 이주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로는 참치들에게 출생지 메리트(?)까지 양수 하위호환이라고 놀림받기도 했다. [97] 제나라 군이 산적으로 위장해 기회를 보는 식으로 건설 중이던 장성의 동부를 점거하였다. [98] 본인이 딱히 색을 밝히는 건 아니지만 aa에 노출도가 넢은 종류가 많고 이름이 발가벗는다는(나체 할 때의 그 한자다.)뜻이 있어서 참치들 사이에서는 치녀 취급(...)을 받고 있다. AA적 문제도 더하여 나이를 먹고도 노출도가 높은 복장을 선호할 예정인 것은 덤. [99] 송 쪽이 요청한 것이 아니고 조선왕 기설이 송의 연종 참여에 붙인 조건으로 임명되었다. 사실상 조선에서의 국외파견직인데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시금 불려올 수도 있다는 언질 또한 있었고, 존재 자체가 송의 태도를 강요하는 역할을 하며, 본인도 이를 받아들이면서 언젠가는 다시금 조선군을 이끌고 싶다는 점을 계속하여 강조하는 만큼 송의 인물이라 할 수 있을 지에 대해서 무리가 좀 있다(...) [100] 가문의 보전과 이미지메이킹을 염두에 둔 결과인 것은 이미 장왕의 눈에는 안 봐도 비디오였다. [101] 조선의 성향과 그 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는 당대의 한계로 인하여 이는 대외적으로 20만 규모로 부풀려진다(...) [102] 이 때 한나라의 제안을 완곡히 거절하면서 사용한 표현은 원 역사 염파의 말년에 다시금 조국의 병사를 지휘해보고 싶다는 마지막 소망을 담은 그 문구였다. [103] 기원전 296년 탄핵 당한 이래 10년만의 대역전극 같은 복귀로, 자신의 비원을 이룸과 조선왕이 약속을 지켰음에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격하였다. 일말의 의심을 지니던 본인을 나무라기도 하면서. [104]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냐면 보통 4차전을 장기전,5차전을 초장기전으로 보고 5차전부터는 공자가 보급을 못받아 물러나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다. [105] 기설 딴에는 그래도 기회는 준다고 차후의 일이 바빠지는 자리로 보냈지만 어쨌건 그 근본 심상에는 의심으로 인한 경고가 존재하였다 [106] 이는 현 역대 능력치가 확인된 모든 인물을 통틀어 최상위에 달하는 것이다. 참고로 차상위자는 능력치 100 2개에 그 중 통솔에 진 트레잇이 붙고 실존인물 보정을 받는 악의. [107] 이 때의 일은 원칙 상 중형 내지는 거금의 속전을 벌로 치러야했고, 군주의 측근들도 포함해서 수많은 곳에서 모금을 받았기에 해결되었다. 후일 이 사실은 승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오래 갔는데, 이 문제로 아직도 살아있던 전 조선상 고정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당시에는 완전히 무마하지는 못했다. [108] 청년기 [109] 장노년기, 291년의 임치 공방전 이후 고생을 하면서 폭삭 늙었는지 291년부터 사용중 [110] 징계로 강등당한 상태였는데 왕인 기설이 다시 기회를 줘야 한다면서 강권하였다. [111]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직감한 진개가 일이 벌어지기 전에 임치를 내어주고 물러날 것을 권하였지만, 자신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기회까지 준 조선왕의 믿음을 차마 바래게 할 수 없어 정중히 거절하였다. 결과적으로는 믿음에 그 몇 갑절로 보답하게 되면서 빛을 보게 되었고. [112] 다만 킹덤과는 달리 사서를 따라서 지장겸 문관으로 묘사된다. [113] 원역사에서 극신은 방훤에게 패해서 죽었다(...) [114] 협 계통의 행보를 지향하는 편이며, 이 때문에 양수와도 죽이 좀 잘 맞았다. [115] 이 때문에 실질적(당시 위나라의 공격은 철저하게 기습이었기에 백기가 움직인 시점은 모든 게 확실하지는 않은 상태로 감을 따른 감이 있었다.)원군으로써 출진했던 백기는 상황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조우하여 자초지종을 알아보려는 중, 상식적으로 적장이 이리도 허무히 붙잡힐 일이 없기에 음진현 단독으로 위군의 2파까지 격퇴한 것으로 오인하는 일이 있었다.(...) [116] 이를 통보한 승상 가현은 이때 조선상의 자리를 태자가 받으면서 그 업무교육을 떠맡게 된 탓에 일이 앞으로 많아질 이유로 언짢아있었다. 때문에 조선왕에게 하라는 명을 들은 것을 그대로 인용하였다.(...) [117] 이로써 TO에 들지도 않은 상태로 삼공까지 오른 전무후무한 위업을 세우게 된다(...) [118] 당시 6경급은 조하와 양수정도였는데 양수는 반쯤 편법으로 소부가 되는 것으로 상경급으로 올라온지라 맡기기 어려웠다. [119] 이전 최연소 삼공은 조하의 어머니 조옹. [120] 다만 생일이 빨라 오라버니 취급중(...) [121] 진나라에서 상방에 해당하는 직위인데, 이 위치는 임명된다는 전제 하에 어디까지나 진왕족이 맡았다. [122] 치수에 정평한 정도의 뜻이 있는 사자성어이다. [123] 스레주에 의하면 패도를 지향하는 것을 제하면 후대의 맹자가 주창할 역성혁명론과 근접하다고 평했다. [124] 제환공 전오는 이제 질세라 돈을 뿌려가며 이를 따라잡으려 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저희는 묵가인이 아닙니다(...)' [125] 스레주의 말에 따르면 장수할 경우 석가모니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만날 수도 있다고(...) [126] 스승이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그 펜팔인 공수속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27] 현 조선후인 기토에겐 오라버니라 불릴 정도로 각별하며, 태자 기유 역시 조어를 숙부로 깍듯이 모시고 있다. [128] 이러한 조씨 문중의 사정 때문인지, 일단 한자상 성씨가 같(아진)다면 동족으로 볼 정도로 그 범위가 넓어, 후일 원 역사적으로는 더 말해 무엇할 정도의 남남이었던 조사가 조씨 문중의 일원으로 취급되어 후원을 받아 현령으로 천거되었다. [129] 악자의 손주이다. 즉 악양의 외증손주. 이 시점 와서는 할머니가 은퇴 후 당주로써 문중 관리에 힘썼던지라 영수 악가의 가문 내 파란도 사라져 딱히 어떤 위해도 없었다. [130] 다만 합횡과 연종등의 논의는 조선에서 활발히 일어나서 눈에 띄지는 않은 듯하다. [131] 본인은 모르지만 초나라에서 한 주장들이 영직에게 도박수를 던지게 만들어서 304년에 합횡이 결성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어떤의미로는 자기 일자리를 만든 격(...) [132] 조선 고관들이 쓸모 있다고 여겼고, 조선상이었던 고정의 손녀가 아니었다면, 애초에 기어이 고문을 동원해서 뜻을 꺾어버려서까지 살려두고 관직을 줄 이유조차 없었다. 비슷하게 종횡가였던 장의가 진나라에서 죽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133] 부고 소식은 제나라에 있었던 가족에게 전달되었다. 이 덕분에 제나라에서도 동초원 대전에 대한 정보를 알게되었다. [134] 오해방지차 언급하자면, "대 공" 이 좀 더 정확하다. [135] 조옹이 동초원대전에서 조장에게 일을 맡기도록 추천했지만 제대로 처리 못한 이유도 있다. [136] 악의는 인사치례로 또 보자고 한거였다. [137] 뒤늦게 자신을 힘든 수군에 짬처리 시킨것을 알고 악의를 원망하였다. [138] 평상시라면 최악의 사형내지 중벌을 내렸겠지만 하필 제나라가 엮어있어 함부로 징계를 내려 사과하는 형국을 피하고 싶어했기에 징계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39] 세번째 초청에서 찾아온 관리가 만일 거절시 강제로라도 끌고 가려고 벼르다가 추연이 시원스럽게 응하자 아쉽다는 반응을 보인다. [140] 원 역사를 생각하면 아마도 명가 [141] 한단 지부장은 그다지 탐탁치 않았지만 묵가내에서 공손룡이 다루는 연구에 지지를 하는이가 많은것으로 보인다. [142] 조선 조정에서 묵가의 중재로 임치에 있던 추연을 초대하고자 할때 서신을 맡아서 임치까지 갔다왔다. [143] 위의 조표와 다른 후대의 인물로, 조옹의 막내자식이다 [144] 이목이 아닌 이미라고 한 이유는 어장주가 이목이 이름이 아니라 이미의 오기라는 가설을 채택해 이렇게 된것이다. [145] 그러나 곧 엔딩이기에 활약을 볼수는 없을것 같다. [146] 북군은 염파가 지휘하여 순우에서 전단에게 가로막혀지만 남쪽은 진개가 이미 죽고 없어 이미에 대항할 인재가 없었다고 한다. [147] 전한의 어사대부를 지낸 주가 또는 그의 종제 주창으로 추정 [148] 아래의 문부처럼 기토의 최후 보정을 받았다. [149] 직계자손은 아니고 친척이다. [150] 메타적으로는 정왕이 죽은 이후 그녀의 매력치 100에 해당하는 인재 관리 보정의 최후의 불꽃이다. 이는 똑같이 능력치 100인 항목이 있던 세후 기식과 유후 기이 또한 보유하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기설도 보유했으나, 예상 적용 시점이 진행 종료 이후이므로 후일담에 영향을 줄 지언정 시스템 형식으로 적용되지는 않았다. [151] 적의 병사 수는 매우 정확하게 보고했는데 벤 머리 숫자를 그보다 터무니없이 많게 적어넣은 셈이니 부족분이 어디서 온 것인지부터 추궁당할 수밖에. [152] 조선 수군 전투력의 진실은 다름아닌 배를 너무 못만드는 바람에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전투원들의 수준이 높아진 것. 이걸 알게된 작 선장은 억지로 배를 못만들어서 전투원을 향상시킨다는 놀라운 발상이라고 감탄했다. [153] 월인들로 오랜만에 고향 사람과 만난 향 선장은 반가워서 큰 의심을 못 했다는 듯 [154] 이는 장왕 기유가 필요했기에 처벌을 행했으나 그 정도가 과했음을 생전부터 기설에게 강조한 것이 한몫하였다. 보물로써는 별 가치도 없었던 작 선장의 유품을 간수했던 것이 복선이라고... [155] 모녀관계로, BB가 퇴각해서 모친에게 의탁한 이후에는 행적이 분리되지 않고 직책을 승계하였다. [156] 요동과 중원을 잇는 통로. 그 유명한 산해관이 이 근방에 있다. [157] 이는 본의아니게 조선과 연관이 있는데 조선후 기식이 승하하고 기이가 계승하자 모든 나라에서 조문객을 보내는 와중에 월나라만 조문객을 안보냈다. 그 이유가 뭔가 하니 '제나라랑 적대관계니까 안보내도 되겠지?' 덕분에 중원 모든 국가들이 월나라는 물론 월나라 뒷배를 봐주고 있던 제나라를 의심하자 제환공 전오가 쇼미더머니를 퍼부어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다. 여기서 끝났으면 좋았는데 이후 기이가 양평에서 맥성으로 천도하자 모든 나라가 축하사절을 보내는 와중에 또 월나라 혼자 안보냈다(...)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외교적인 결례를 저지르자 월나라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제나라는 아예 양아치 국가로 찍혀버렸다. [158] 쉽게 말해 은혜를 넓힌 다는 뜻으로 본래 장자에게만 상속되는 가독을 자녀들 전원에게 상속시킨다. 대략 오초칠국의 난 직전에 가의 조조(전한)가 제안한 제후왕 견제책의 프로토타입이라 할 수 있겠다. [159] 그래도 이후 조선의 권역과 활동에서 엑스트라들이 필요하면 이들이 등장하는 식으로 구귀족 세력과는 달리 죽어서 얼굴은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