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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己汶한반도 남부의 옛 지역명. 상기문, 중기문, 하기문의 세 지방을 포괄하는 이름인 듯하다. 한국 측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고 중국과 일본 기록에만 나타난다. 위치에 대해서는 섬진강 유역이라는 것이 통설이나, 낙동강 유역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섬진강과 낙동강에 모두 기문이라는 지명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2. 상세
6월
백제가 저미문귀(姐彌文貴) 장군과 주리즉이(州利卽爾) 장군을 호즈미노오미 오시야마(穗積臣押山)[『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위의사이마지미(委意斯移麻岐彌)라 하였다.]에 딸려 보내어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를 바쳤다. 따로 아뢰기를 “
반파국(伴跛國)이 저희 나라 기문(己汶)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엎드려 청하옵건대 천은으로 본래 속했던 곳으로 되돌려 주게 해주십시오”라 하였다.
11월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와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이 달 반파국이 집지(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 일본서기》 권17 게이타이 덴노 7년(513) 6월, 11월
일본서기에 따르면 원래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기문 땅을 반파국이 빼앗자, 백제가 513년에 왜의 도움을 얻어 이를 되찾았다. 왜가 백제, 신라, 안라국, 반파국 사이에서 조정자 역할을 했을 리는 없고, 단지 백제에 원조를 제공한 것으로 이해된다. 반파국이 반발했지만 대세를 뒤집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11월 조정에서 백제의 저미문귀 장군과 사라(斯羅)의 문득지(汶得至), 안라(安羅)의 신이해(辛已奚)와 분파위좌(賁巴委佐), 반파(伴跛)의 기전해(旣殿奚)와 죽문지(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은칙을 선포하여 기문(己汶)과 대사(滯沙)를 백제국에 주었다. 이 달 반파국이 집지(戢支)를 보내어 진기한 보물을 바치고 기문의 땅을 요구했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 일본서기》 권17 게이타이 덴노 7년(513) 6월, 11월
일본의 씨족지인 《 신찬성씨록》에는 임나와 신라가 이 지역을 두고 다투었다는 기록이 있다. 파문(巴汶)은 기문(己汶)의 오기로 본다.
임나국에서 “신의 나라 동북에 세 개의 파문(巴汶)[상파문, 중파문, 하파문]이 있습니다. 땅의 넓이가 300리이고 토지와 인민이 풍족합니다. 신라국과 서로 다투어 피차 이곳을 통치하는 것이 불가합니다. 전쟁이 계속되어 백성이 안심하고 살 수 없습니다. 신은 (일본에서) 장군을 파견하여 이 땅을 다스리게 하여 귀국의 부(部)로 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 속일본후기》에도 기문이 언급되며, 《신찬성씨록》의 파문에 대하여는 이것을 바탕으로 오기로 판단한다.
종5위상 기치타노스쿠네노 후미누시(吉田宿禰書主), 종5위하 기치타노스쿠네노 다카요(吉田宿禰高世) 등에게 오키요노아소미(興世朝臣)의 성을 내려 주었다. 시조 시오다레츠(鹽乘津)는 왜인이었는데, 후에 나라의 명에 따라 삼기문(三己汶)에 가서 살았다. 그 땅은 마침내 백제에게 예속되었다. 시오다레츠의 8대손인 달솔 길대상(吉大尙)과 그의 아우 소상(少尙) 등은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잇달아 우리 조정에 왔다. 대대로 의술을 전수하였고 아울러 문예에 통달하였다. 자손은 나라쿄(奈良京) 다무라노사토(田村里)에 거주하였으므로 기치타노무라지(吉田連)의 성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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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문헌에는 보다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당나라 때에 편찬된 일종의 백과사전인 《한원(翰苑)》에는 백제에 관하여 이런 기록이 있다. ‘기문하(基汶河)가 나라에 있어 원천이 그 나라에서 나온다. 원천은 그 나라의 남산(南山)으로부터 나오고 동남쪽으로 흘러 대해에 이른다.’ 원문 양직공도에서도 백제 인근의 소국을 나열하면서 ‘상사문(上巳汶)’이라는 나라를 언급했는데, 상기문(上己汶)의 오기로 보인다. #
우륵이 지은 가야금 12곡은 셋째 보기와 여덟째 사자기를 제외하면 모두 가야의 지역명인데, 일곱째 하기물과 열두째 상기물은 하기문과 상기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첫째 하가라도(下加羅都), 둘째 상가라도(上加羅都), 셋째 보기(寶伎), 넷째 달이(達已), 다섯째 사물(思勿), 여섯째 물혜(勿慧), 일곱째 하기물(下奇物), 여덟째 사자기(師子伎), 아홉째 거열(居烈), 열째 사팔혜(沙八兮), 열한째 이사(爾赦), 열두째 상기물(上奇物)이다.
《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 음악 #
《 삼국사기》 권 제32 잡지 제1 음악 #
3. 위치
3.1. 섬진강 유역설
위:
유곡리와 두락리 출토 청동거울, 금동신발 조각 아래: 월산리 출토 청자 계수호, 철제 초두 |
기문이 섬진강 유역을 가리킨다고 보는 측에서는 고고학적인 근거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전라북도 동부에 분포하는 가야계 유적이 그 증거가 된다. 남원 월산리와 두락리에서 삼국시대 고분군이 발굴되었는데, 지산동 고분군보다도 규모가 큰 월산리 M5호분에서는 가야 유적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확인된 중국 남조의 청자 계수호와 철제 초두 등 최고급 위세품이 출토되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사적 제542호)에는 구릉의 정상부와 사면에 동서방향으로 40여 기의 중대형 고분이 모여 있다. 32호분 발굴조사에서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과 유사한 청동거울, 금동신발 조각 등이 출토되어 크게 주목받았다. 남원시 운봉고원에는 제철 유적이 밀집되어 있다. 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철제 유물들은 여기서 나온 것으로 추정된다. 위의 고고학적 증거들로 보아 5세기 중후반에 독립적인 정치체가 이 지역에 존재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정체가 바로 기문국이라는 주장이다.
기문이 섬진강 유역이라고 보는 설에서, 기문과 함께 백제로 넘어간 대사(帶沙)는 지금의 하동으로 본다. 근거는 《삼국사기》에서 하동군은 본래 한다사군(韓多沙郡)이고, 하동에 속한 악양현(嶽陽縣)은 본래 소다사현(小多沙縣)이라고 한 점이다. # 전북 동부의 제철 세력이 섬진강을 따라 내려와 하동을 거쳐 외부와 교역했다는 이야기다.
전북 동부의 가야 봉화대 분포 |
반파가 자탄(子呑)과 대사(帶沙)에 성을 쌓아 만해(滿奚)와 이어서 봉수와 군창(軍倉)을 설치하여 일본에 대비했다. 또 이열비(爾列比)와 마수비(麻須比)에 성을 쌓아 마차해(麻且奚)와 추봉(推封)에 걸치게 했다. 사졸과 병기를 모아 신라를 핍박하여 백성을 약탈하고 촌읍을 노략질하였으니 흉악한 세력이 가해진 곳은 남겨진 것이 거의 없었다. 포학하고 사치하였으며 괴롭혀 해를 끼치고 침략하여 죽인 것이 매우 많았으므로 이루 다 실을 수 없다.
《일본서기》 권17 게이타이 덴노 8년 3월 #
《일본서기》 권17 게이타이 덴노 8년 3월 #
한편, 가야 봉화대의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주장이 있다. 건축 형태가 일정하지 않고, 가야의 국력으로 볼 때 이 정도로 체계적인 시스템을 운영했다고 보기 어려우며, 출토 유물이 소략한 점을 들어 가야가 운영한 것으로 볼 근거가 불충분하다는 주장이다. 몇몇 봉화대의 토양을 연대 분석한 결과 고려~조선 시대의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이 주장에서, 봉화대에서 나온 가야 유물들은 산으로 피난했던 가야인들이 남긴 것이라고 추측한다.
장수군에서는 240여 기의 가야 무덤이 발견되었다. 장수 동촌리 고분군(사적 제552호)은 금강 수계권의 가장 대표적인 가야 고분군이다. 여러 능선에 남북 방향으로 80여기의 고분이 있어 전북 소재 가야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가야 묘제의 무덤 안에서 철 제품과 위세품은 물론이고 백제, 신라, 가야 양식의 토기가 모두 출토되었다. 이 지역이 반파국의 중심지였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3.2. 낙동강 유역설
기문을 낙동강 유역, 특히 중류 지역으로 보는 설이다. 신찬성씨록의 기사에 기문이 임나의 동북쪽이면서 신라와 상쟁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기문을 경상북도 김천이라고 본다. 여기에 있던 감문국이 곧 기문이라는 이야기다. 진흥왕 18년(557)에 감문주를 설치하기 전까지는 이곳이 신라의 통제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대사의 위치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다사지현(多斯只縣)’을 통해 현재 대구 달성군 다사읍의 낙동강과 금호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본다. 반파국이 쌓은 산성과 봉화 등은 죽곡리 산성을 비롯해 낙동강을 따라 있는 문산리 산성, 월성리 토성 등 산성군의 존재로 설명할 수 있다. 특히 죽곡리 산성에서는 돌을 쌓아 올린 기단과 고분이 발견되어 군사와 관련있는 유구로 판단된다. 고령 혹은 성주를 중심으로 한 반파국이 섬진강 유역에 성을 쌓으면서 신라를 핍박했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대사가 낙동강 중류라면 기문은 낙동강 상류로 올라가 찾는 것이 옳다. 기문을 남원 등지로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인 ‘기문하’ = 섬진강 설은 올바른 추정이 아니다. 오히려 지리산에서 발원해 동남으로 흐르는 덕천강과 덕천강과 만나는 남강이 기문하가 될 수 있다.
섬진강 일원에서 가야계 유물이 나타나는 것은 가야의 세력권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가야로 도망한 백제 백성들을 다시 데려와 머물게 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가야 토기와 백제 토기가 섞여 나오는 것을 보면 단순히 대가야 영역으로 보기 어렵다.
4. 기타
- 2019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가야본성-칼(劒)과 현(絃)’ 전시의 가야 지도에 기문이 등장했는데, 이를 두고 가야본성 전시 임나일본부 논란이 일어났다. 결론은 해프닝.
- 전라북도와 전라남도, 광주시가 공동으로 발간한 책 《 전라도 천년사》에 남원을 기문, 장수는 반파라고 기술한 것에 대해 식민사관이라며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 위의 전시 관련 논란에 더해, 남원 두락리와 유곡리 고분군의 조성 주체를 기문이라고 표기해 유네스코 등재를 추진할 때에도 있었던 일이다. 《전라도 천년사》 편찬위원은 이덕일 주장의 반복에 불과하다며, 일부 세력에 의한 폄훼와 사실왜곡이라고 밝혔다. #
5. 참고 문헌
- 백승옥(2007), 己汶·帶沙의 위치비정과 6세기 전반대 伽羅國과 百濟, 한국학연구원 학술총서 2007-10
- 홍성화(2014), 己汶, 帶沙 지명 비정에 대한 일고찰, 사총 제82호
- 곽장근(2015), 운봉고원의 제철유적과 그 역동성. 백제문화 제1권 제52호
- 전상학(2020), 고고자료와 문헌으로 본 상기문국, 전북학연구 제2집
- 국립완주문화재연구소(2020), 전북지역의 가야고분 분포현황조사 보고서
- 곽장근(2022), 전북 동부 가야 봉화망과 그 의미, 전북학연구 제5집
- 이도학(2022), '전북가야'의 역사적 실체 검증, 전북학연구 제5집
- 홍성우(2023), 전북 동부지역 伽耶烽燧說 검토, 한국고고학보 2023권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