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참의(常參儀)란 과거
문화재청,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재보호재단(現
국가유산진흥원)에서 궁궐 일상화 재현을 위해 시행했던 궁중 의례 재현 행사 중 하나로, 조선시대
국왕이 6품 이상의 참상관들에게 문안 인사를 받은 후 계사관들에 의해 밤사이 있었던 국정 현안을 보고 받고 처리하는 상참(常參)을 재현 및 연출한 행사였는데, 주로
경복궁 사정전(思政殿)을 무대로 펼쳐졌었으며, 현재는 궁궐의 일상을 걷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작고 짧게 연출되고 있다.
시기는 조선 전기인 15세기, 특히 가장 부지런하게 상참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진
세종(世宗) 임금 말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복식
재현 시기를 세종 시대로 정하였으므로 세종 시대
곤룡포,
관복,
갑주,
철릭 등 다양한 궁중 복식들이 재현되었다. 이 복식들 중 일부는 당시 조선 전기를 배경으로 하였던 경복궁 수문장 교대의식 및 궁성문 개폐의식에 사용되었던 복식들도 활용되었다. 특히 관복은 조선 초기 흉배 없는
단령과
사모를 착용하고 있는데, 조선 초기 관복의 색깔이 정리 되어있지 않은 모습[1]을 표현하기 위하여 녹색(綠色), 아청색(鴉靑色), 홍색(紅色) 등 다양한 색이 일부 연출되었으나, 『세종실록』에 따르면 상참의에 참여하는 관료들은 흑색으로 염색(黑染)한 단령[2]을 입도록 명한 이후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으므로 대다수의 관리들은 아청색 흑단령을 입고 있다.
갑주의 경우
수문장 교대의식에 사용되고 있던
경번갑(鏡幡甲), 황동두정갑(黃銅頭釘甲)를 활용하였다. 초창기에는 국왕 뿐만 아니라 관료들 모두 철릭-답호-단령의 착장 순서를 엄격히 지켜서 입힌 것으로 확인된다.
의장
상참의가 궁중에서 매일 아침마다 있는 행사였기 때문에 특별한 의례라고 보기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국왕의 권위와 신성함을 표현하기 위하여 최소한의 의장(儀杖)들이 동원되었는데, 산(傘)[3]과 선(扇)[4], 운검(雲劍), 화개(華盖)[5], 금월부(金鉞斧), 수정장(水精杖), 휘(麾)와 같은 의장물이 복원되었다. 해당 복원을 위하여 『
조선왕조실록』, 『
악학궤범』과 같은 문헌 자료 및 현존하는 의장 유물들을 연구한 것으로 보인다.
궁중어
조선시대 궁중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일반 백성들이 흔히 사용하던 언어와는 달리 궁궐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사용되었던 언어로, 최고위층들이 자신의 권위와 존엄성을 높이기 위해 사용한 권력의 일종이자 특수 계층언어에 속한다. 궁중어에서는 우리 국어 뿐만 아니라
한자어,
몽골어,
중국어 등이 혼합되어 사용되었다. 본 행사에서 고증 및 재현한 궁중언어의 사례는 '사뢰나이다.(아뢰옵니다.)', '망극하오이다.(망극하옵나이다)', '모르리잇가?(모르겠습니까?)', '좋으리잇가?(좋겠습니까?)', '사량하옵나이다.(사료되옵나이다)' 등으로 지금 사용하는 언어와는 많이 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실제 90년대까지 이어지는 사극에서는 이와 같은 궁중어 사용이 연출되었으나, 근래 사극에서는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춰 이러한 언어들이 재현되지 않고 있다.
- 참고로 궁중조회 상참의는
수문장 교대의식 및
궁성문 개폐의식과
왕가의 산책의 연장선으로 이어지는 행사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는 위의 그림과 같이
경복궁을 배경으로 한 조선 전기 궁궐 일상 재현을 목표로 궁중의 일상적인 모습을 행사로 연출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밤새 근무를 섰던 수문장들이 아침 해가 뜰 무렵 서로 근무 교대를 하면서 도총부 경력과 승정원 주서, 액정서 사약과 같은 중앙 관리들이 감독하는 아래 궁성문을 열면, 밤새 궁성 주변을 순찰하던 요령장과 요령군, 그리고 상참의에 참여할 문무백관들이
관복 차림으로
광화문을 통과해 흥례문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후 궁중 조회 상참의를 진행한 후 국정을 돌보던 국왕이 궁궐 내를 산책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왕가의 산책이 펼쳐지고, 다시 해가 질 무렵 다시 당직 근무자를 제외한 문무백관과 요령장과 요령군이 흥례문에서 나와 광화문 밖으로 퇴장하게 되고, 이후 다시 개문 절차와 같이 도총부 경력, 승정원 주서, 액정서 사약이 감독하는 아래 궁성문을 닫는 모습이 연출되었다. 이러한 재현을 통해 그저 궁궐이 비어있는 큰 장소가 아니라 당시 궁중의 일상이 어떤 루트로 펼쳐졌는지를 보여줌으로서 궁궐이 보다 친근하고 살아숨쉬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하여 하나로 묶어 연출된 것이다.
- 문헌 기록에 따르면 상참의는 매일 아침 해뜰 무렵 진행되었다. 그러나 문무관리들이 대궐로 출근하기 위해서는 궁궐 정문과
사대문이 열려야 출근이 가능했을 것이다. 실제 도성문은 인정(人定)[6]과 파루(罷漏)[7]에 닫고 열었으며 궁궐문은 해뜰 무렵 열고 해질 무렵 닫았다. 그러니까 사대문과 궁성문이 열리는 아침 새벽녘부터 이러한 절차가 진행된 것이다. 따라서 상참의를 참석하기 위해서라도 6품 이상 참상관 급 관리들은 상참에 참석하지 않는 참하관들보다 더 일찍 출근할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는 새벽에 상참을 해야하지만, 새벽에 관람객들이 보러 오지 않을 뿐더러, 예나 지금이나 경복궁은 오전 9시에 문을 열어 오후 6시까지 운영되므로, 궁중조회 상참의 재현행사는 관람객들이 붐비기 시작하는 오전 10시나 정오 즈음에 재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 현재 상참의는 메인 이벤트로 진행되지 않으며,
궁중문화축전 또는 궁궐의 일상을 걷다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부대 행사로 작게 연출되고 있다.
[1]
잡색단령(雜色團領)을 말한다.
[2]
세종 28년인 1446년의 기록, 이 관복은 훗날 조선 전기 시복 흑단령(黑團領)의 원천이 된다.
[3]
일산과 홍양산이 해당된다.
[4]
청선,용선,봉선 등이 해당된다.
[5]
청개와 홍개가 해당된다.
[6]
인경이라고도 부른다. 저녁 10시로 추정
[7]
새벽 4시로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