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ぐらだ さとこ
1922년 ~ 2007년 (향년 85세)
1. 개요
삼성 창업주 이병철의 측실. 구라다의 존재는 80년대 초 외부에 알려졌다.2. 일생
시골 출신의 여성으로, 동경에서 1940년 이병철 회장을 처음 만나 교제를 시작했다.1952년, 이맹희가 도쿄농업대학에 정식으로 입학하고 이창희도 도일하며 이 둘을 본인의 집에서 숙식시켰다. 이 때 이 둘은 고향에 있는 어머니의 존재로 인한 위화감과 심지어 구라다가 이맹희와 비슷한 연령이었기에 이들은 구라다를 상당히 불편해했다고 전해진다.[1]
하루는 구라다의 집에서 이창희와 이맹희가 친구들을 불러 함께 한꺼번에 계란 20개를 먹자, 이맹희 형제와 달리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2] 구라다는 가정부에게 "이러다간 한 달 생활비로 일 주일도 못 버티겠다"며 난색을 표했다고 한다. 이를 우연히 들은 이맹희는 구라다를 붙잡고 욕을 했고, 결국 싸움이 났다고 한다. 이 갈등을 계기로 구라다는 이후 형제를 무척 조심히 대했고,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한다. 이후 귀국하는 날 이창희는 구라다와의 갈등을 어머니 박두을 여사에게 말했다. 장남이 그런 취급을 받자 화가 난 박두을 여사는 이병철 회장에게 따졌지만, 난감해진 이 회장은 오히려 갈등의 원인을 제공한 이맹희를 체벌하였다고 한다. 이맹희가 기억하는 한, 이병철 회장의 자식들 중 체벌을 받은 건은 이 사건이 거의 유일했다고 한다. 한편 아직 어렸던 이건희는 반대로 구라다와는 관계가 무난한 편이었지만 대신 강아지와 어울리며 외롭게 지냈다고 한다.
이후 사토코는 이병철 사이에서 얻은 큰 아들 이태휘와 딸 이혜자를 일본에서 키우며, 이병철이 상당한 재산을 주었고 이 돈으로 큰 미장원과 음식점을 경영하며 살고 있었다.
아들 이태휘는 한때 이병철 회장의 총애를 받아서 삼성에 입사하여 고속승진을 했고, 호텔에서 가운만 입은 채 이병철 가신들한테[3] 보고를 받았을 정도였다.[4] 이것에 차후 회장이 되는 이건희는 크게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구라다는 자연스레 이병철이 사망한 뒤 자식들과 본인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났으며, 재산을 정리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현재는 일본에서 빌딩 임대 사업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3. 가족관계
이병철의 4남인 이태휘(1947~)[5]와 6녀인 이혜자(1952~)의 친어머니다. 이맹희의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 따르면, 이병철 회장은 구라다의 두 자녀도 본처인 박두을과의 자녀와 함께 호적에 모두 올려두었다고 한다.
[1]
이맹희는 구라다를 '미찌꼬'라고 불렀다.
[2]
일본은 당시 전시 재건으로 물자가 썩 여유롭지 않았다.
[3]
대표적으로 이병철의 오른팔격인
소병해 비서실장
[4]
이병철 회장이 타계하기 1년 전인 1986년 2월 처음으로 삼성그룹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그는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와 CJ상무로 임명되었다. 일각에서는 82년 큰 교통사고를 당한 당시 삼성그룹 부회장인 이건희가 후유증으로 고생하고 있고 해서 경쟁 구도로 이태휘를 한국으로 불러 들인거 아닌가?하는 말들도 있다. 이맹희의 언론사 인터뷰에 나온 이태휘의 경영 능력은 영 별로인 것으로 보인다.
# 이병철의 총애를 받는 이태휘는 갈수록 기고만장해져서 이병철과 상의 없이 자기 독단으로 임원들을 해고 시키는등 여러 문제를 일으켜 그룹내 평판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86년 12월 이병철 회장의 언론사 인터뷰를 봐도 차기 후계자는 변함없이 이건희라고 못 박은거 보면 이런 행태에 실망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5]
일본명 야스테루. 이병철 회장이 마흔 가까이 되어 얻은 막내아들이다.
게이오기주쿠대학과
스탠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미쓰비시 상사에서 근무하다가 1986년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前 삼성그룹 비서실 이사, CJ 상무 등의 직책에 임명되어 한국에서 잠시 근무하였다. 이후 후계 구도에서 밀리자 재산을 정리하여 일본에 정착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