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라 문무왕 19년(679) 경주 사천왕사에서 양지가 만든 녹유사천왕상 48판.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었다.2. 내용
일제강점기이던 1915년에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경주시 배반동 사천왕사지에서 최초 발견한 사천왕상전이다. 여기서 '전(塼)'이란 흙으로 구운 벽돌을 뜻한다. 1915년 서탑터에서 최초로 녹유전 조각을 발견했을 때에는 이게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부서진 채라 다시 땅에 묻었다. 1918년과 1922년에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하자 다양한 사천왕상 파편들이 출토되었다.
사천왕사는 삼국통일전쟁이 끝난 직후인 679년에 신라가 창건한 호국사찰이다. 676년에 당나라를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냄으로써 신라는 통일을 달성한 뒤, 삼한(三韓)의 통일을 기념하고 통일 국가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지키려는 염원을 담아 수도 금성 낭산(狼山) 서쪽 기슭에 세웠다. 이 터에 사찰을 세운 이유는 당시 당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여러 번 영검을 보인 신유림(神遊林)이었기 때문이다.
발굴 당시의 모습. 사진 출처: 오마이뉴스 - 경주 사천왕사지 출토 초화문 "아름답구나"
679년 사찰이 건립될 때 함께 조성된 탑은 2탑 1금당식, 즉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를 따른 한국 최초의 탑으로 유명하다. 연구 결과 목탑은 석조를 이용하여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전돌(벽돌)을 쌓아올린 다음, 그 위에는 목조탑을 세웠다고 확인되었다. 이러한 방식은 종래 한국 불교건축계에서는 전혀 보고되지 않은 새로운 건축양식이다. 이 녹유사천왕전(綠釉四天王塼)들은 2개 탑의 기단면석으로 사용되었는데 총 48점이다.
경주시 석굴암 신라 사천왕상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 신라 사천왕상
경주 기림사 신라 사천왕상. 사진 출처: 신라 사천왕과 조선 사천왕은 지물과 방위가 다르다
녹색 유약을 바른 가로 약 70 cm, 세로 약 90 cm, 두께 7-9 cm인 사각형 전돌에 사천왕상을 새겼는데, 반부조(半浮彫)이지만 가슴, 손, 무릎 등은 고부조(高浮彫)로 하여 입체적 형태를 강조했다. 신라시대 다른 사찰의 사천왕상들이 악귀를 밟고 서 있는 데 반하여, 이 유물들은 특이하게 악귀를 깔고 앉은 좌상의 형식을 취했다. 특히 사천왕이 왼손에 칼을 세워들고 잡귀 두 마리를 꿇어 앉혀 그 등에 앉은 모습은 조각적 기량이 뛰어나다. 또한 흠잡을 데 없는 사천왕의 정확한 신체표현과 정교한 무늬, 그리고 악귀의 사실적 표현은 생동감과 현실감을 잘 살려주었다. 이러한 조형감각은 기존 삼국시대에는 볼 수 없었던 완벽한 기법이라고 평가받는다.
3. 의문점
- 이 글은 동아일보: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조각 한쪽 한쪽 맞추자…‘신라의 미켈란젤로’ 걸작이 생생과 한겨레: 사천왕사터 ‘수호신상’ 수수께끼를 풀어라, 사천왕사지 녹유신장벽전(四天王寺址 綠油神將壁塼) 등의 내용을 참조하였습니다.
이 유물들이 사천왕을 새긴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왔다.
우선 이 녹유신장상은 일반적인 사천왕 조형물과 달리 네 가지 상이 아니다. 단지 사천왕과 비슷한 옷차림을 한 세 가지 상일 뿐이다. 머리에 우아한 보관을 쓴 A상, 화려한 투구를 쓴 채 화살을 든 정면의 B상, 옆이 말린 투구를 쓴 채 칼을 들고 반가 자세로 앉은 C상 순서대로 탑 기단부 한 면마다 2번씩 되풀이하여 붙인 형태였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기단부 한 면마다 가운데 계단을 중심으로 녹유신장상 6개를 A-B-C 계단 A-B-C 순으로 배치했다. 따라서 탑 하나의 기단부 사면에 붙은 신장상은 모두 24개이고, 동탑과 서탑을 합쳐 총 48개이다.
지금까지 불탑에서 사천왕상은 1좌, 또는 혹은 4좌를 배치함이 정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사천왕사지 녹유신장상의 배치는 지금까지 보아온 것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문명대 동국대학교 교수를 비롯한 일부 미술사학자는 이것이 사천왕이 아니라 팔부신중을 묘사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단 일연(一然)이 『 삼국유사』에서 이 상들을 팔부중(八部衆)이라고 기록했고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 녹유사천왕상전[1] 양지(良志) 스님이 남긴 다른 불교조각 중, 천왕사(天王寺) 탑 하단에도 팔부신장(八部神將)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현재까지 확인된 녹유사천왕상을 적어도 신라 당대에는 팔부신중으로 인식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이야기이다.
한편 미술사학을 전공한 경주대학교 임영애 교수는 '이 녹유전 상은 사천왕이 아니고, 그렇다고 팔부신중도 아닌 신왕(神王)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먼저 이것이 사천왕이라면 북방을 관장하는 다문천왕은 반드시 손에 탑을 들고 있어야 하는데 그런 상은 없다. 사천왕 중에서는 다문천왕이 대표자 격으로 인식되었다. 만약 세 가지 녹유상이 사천왕을 표현하였다면, 다른 천왕들을 내두고 다문천왕이 빠졌다니 이상한 일이다. 활이나 화살을 든 모습을 보고 사천왕상이라는 근거로 들기도 하지만, 이런 사천왕상이 등장한 때는 9세기 이후인데 사천왕사는 7세기에 창건된 사찰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팔부신중이라면 신장의 수가 8개가 아니라 48점에 달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상 또한 8종류가 나와야 하는데 3종류밖에 없다.'면서, '각종 불교경전을 보아도 팔부신중은 8명이라 했지 그 외 숫자를 거론한 사례는 없다. 따라서 이 녹유전 상은 불법 전반을 수호하는 신왕(神王)'으로 보아야 하고, 이는 불설관정경과 같은 불교경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